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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2007

부활의 희망, 그 놀라운 힘

LNCK 2007. 3. 16. 21:41

 

 

◈부활의 희망, 그 놀라운 힘        벧전1:3-6, 롬12:12       07.03.04. *원제목 : 희망, 그 놀라운 힘

*새길교회 한완상 님(대한적십자 총재)의 설교문을 너무 길어서 1/2로 축약했으니

전문을 보실 분은 인터넷으로 찾아가셔서 보시기 바랍니다

 

 

아래 설교문은 1) 부활의 의미에 대해,  그리고

2) 복음의 중요한 구성 요소 중 하나인 희망(소망)에 대한 교훈을 줍니다.

 

 

▲지난 20년을 회고해 볼 때, 지금이 더 절망적입니다

지금부터 20년 전인 1987년, 한국은 여전히 군사정권 아래 있었습니다.

군사정권이 정권안보를 위해 안간힘을 쓰면서

민주주의를 억누르고 있던 때였습니다.

(그 때는 이 땅에 진정한 민주주의만 이루어지면,

참 평화와 행복이 도래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이십년이 지난 지금, 과연 우리들의 희망은 어느 수준에 이르고 있습니까?

과연 새 날이 왔고, 그간 우리들의 꿈과 희망이 현실로 전환되어 왔습니까?

 

전 지구적 차원에서 보면 경제적 양극화는 더욱 심해지고 있습니다.

선,후진국을 가릴 것 없이 개발탐욕은

자연과 생태계를 더욱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습니다.

이러다가는 인류의 종말이 생각보다 빨리 다가올지 모른다는 불안을

떨쳐낼 수 없습니다.

꽃이 보름 가까이 일찍 핀다는 것은 결코 희망의 징후가 아닙니다.

오히려 불길한 징조로 느껴집니다.

 

나라 안을 보면, 정치적 민주화 속도는 너무 불규칙하게 빨라

마치 브레이크 고장 난 자동차가 내리막길을 거칠게 내달리는 형국 같습니다.

이러다가는 히틀러가 화려한 거짓 희망으로 독일 국민을 현혹시키면서 구세주같이

등장했던, 저 독일의 1920년대 형편이 재현되지 않을까 불안해지기까지 합니다.

 

 

사회적으로도 십대들의 자살과 폭행, 방화와 폭주가

내일 한국 사회의 참담한 모습을 미리 보는 듯해 섬뜩해집니다.

 

한마디로 지난 20년간 어둠의 세력은 물러간 듯하면서도

더욱 무서운 힘으로 우리를 옥죄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만치 우리의 미래 희망은 점점 더 암울해 지고 있습니다.

 

▲지금, 희망이 필요한 세대

그래서 미래의 불안과 불확실성에 대해 떨고 있는 이 시점에

우리는 희망의 가치와 그 힘에 대해 새롭게 조명해 보아야합니다.

원래 희망의 가치는 절망의 상황에서 더욱 빛나기 마련입니다.

불안과 고독, 절망과 좌절의 현실이 없다면, 희망의 빛은 발하지 않습니다.

 

기독교가 희망의 종교라고 말하는 것도

바로 그것이 절망의 밑바닥 현실에서, 희망 빛으로 나타났기 때문이지요.

 

 

◑제자들의 절망과 희망

 

▲제자들의 절망

팔레스타인에서의 예수의 삶을 객관적으로 보면,

그것은 무던히도 괴롭고 외로운 삶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체포당하시고, 힘든 고난의 과정으로 들어갔을 때

스승을 배반하거나 비겁하게 달아났습니다.

 

예수가 당시 로마법에 따라 처참하게 십자가 처형을 당한 직후,

한때 구름처럼 몰려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군중들은 말할 것도 없고,

죽기까지 따르겠다고 다짐했던 소수의 제자들마저 불안과 절망을 씹으며

고향으로 귀환하거나 은밀한 곳에 몸을 숨기며 사태를 관망했습니다.

 

절망하던 제자들이 달라진 이유 - 부활의 힘

그런데 이같이 비겁했고 절망했던 제자들이

어느 순간부터 갑자기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을 좌절, 절망, 불안, 공포로부터 놀랍게 해방시켜준 사건이 터진 것입니다.

그들은 180° 달라졌습니다.

 

그들을 그렇게 변화시킨 실제적 힘은

바로 예수 부활 사건체험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절망과 공포의 밑바닥에서 납작 엎드려 떨고 있던 사람들을

벌떡 일으켜 세워주었습니다.

 

육체의 인간 예수보다, 부활로 체험된 예수는

훨씬 더 힘 있고 더 감동적인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의 절망희망으로,

그들의 좌절은 분발로 전환되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심리적 현상이 아니라,

개인과 역사의 구조를 변혁시키는 엄청난 실체적 힘이었습니다.

바로 이 부활의 힘이 2천년 전 기독교를 촉발시키고 현재까지 유지시킨 동력입니다.

 

그래서 부활희망의 참 힘이 폭발한 사건이지요.

지난날 죽었던 인간 예수가 공자나 부처처럼 역사적 실재인물로

단순히 기억되는 대상이 아니라,

질적으로 한걸음 더 나아가 새로운 영(성령)의 존재로

<오늘, 여기에> 살아 계시어,

우리를 끊임없이 새로운 존재로 변혁시킬 뿐 아니라

새로운 희망의 역사를 또한 만들어가고 계십니다. (마지막에 자세히 설명)

 

 

◑제 개인적 절망과 희망

 

오늘 저는 희망의 힘이 저에게 얼마나 크고 소중한 것인지를 나누고 싶습니다.

 

(아래 간증은, 예수 믿는 사람은 자기가 늘 고생 중에 사는 것 같지만,

바깥사람들이 그들을 볼 때, 얼마나 희망적으로 바라보는지 잘 보여줍니다.) 

 

▲예기치 않게 찾아온 절망

1980년 봄, 여름, 가을은 저에게 혹독한 시련의 기간이었습니다.

하기야 1976년 2월부터 저는 서울대학에서 쫓겨나 재야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1980년 신군부가 들어서서 광주학살을 주저 없이 저질렀습니다.

그 즈음 저는 이유도 알지 못한 채, 남산 중앙정보부로 끌려갔습니다.

하기야 체포되어 갈 때는(5월 17일) 광주의 비극이 일어난 것도 몰랐습니다.

그것이 어둠과 공포의 긴 터널의 시작인 줄도 몰랐습니다.

 

남산 중앙정보부 지하 2층에서 지옥의 심문을 받으며 두 달을 보내고,

서대문 교도소로 이감될 때 느꼈던 그 상대적 행복감을

여러분들은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남산에서 서대문으로 이동 중에는 검은 차 뒷좌석에서 총 개머리판으로

머리가 짓눌려 차창 밖의 모습을 전혀 볼 수가 없었습니다.

짐작으로 ‘번잡한 광화문 거리를 지나가는구나’라고 생각하면서

창밖으로부터 희미하게 들려오는 거리의 온갖 소음들,

이를테면 차 굴러가는 소리, 사람들의 웅얼대는 잡음들이

저에게는 오히려 모차르트의 달콤한 멜로디처럼 들렸습니다.

두 달간 남산 정보부 지하 감옥에 갇혀있을 때,

살아있는 인간소리가 그렇게 그리웠나 봅니다.

 

그 해 여름과 늦가을을 서대문 교도소에서 보냈습니다.

절망과 좌절을 이겨내기 위해 매일 저는 책 속에서 살아보려고 애썼습니다.

성서를 비롯하여, 소설과 전공서적, 심지어 아내가 넣어준 웃기는 만화책까지도

친구로 삼아 열심히 읽었습니다.

 

책 속의 인물들과 깊은 대화를 나누는 재미를 놓칠 수 없었기 때문이지요.

크로닌의 소설을 읽으며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소설『토지』를 다시 읽으며 새삼 비분강개도 했습니다.

다산의 책을 읽으며 그 분의 외로움과 괴로움을 함께 나누면서

그가 마치 친형 같이 바로 옆에 다가와 저를 격려해 준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때로는 서울대학교 교수에서 서대문 감옥의 수인으로 전락한 저의 신세에 대해

비감해지기도 했습니다.

저의 죄수복에 붙여진 수감 번호(58번)에 눈길이 갈 때마다, 비감은 더해갔지요.

사람이 숫자로 환치되면, 인간 존엄성은 증발되고 맙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도 저는 우울한 시간이 더 많았습니다.

열악한 음식과 환경, 특히 0.7평 밖에 안 되는 작은 감방 속에 변기가 따로

없었습니다. ‘뺑기통’이라는 김치 항아리만한 플라스틱 똥통을 끼고 살았지요.

 

방바닥 밑에는 큰 들쥐보다 더 살찐 쥐들이 낮에는 감방 밑에서 운동회 하듯

쉼 없이 부산하게 소음을 내다가, 밤이 되면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고

오히려 저 같은 사람을 무시하듯 힐끗힐끗 쳐다보며 감방 안을 들락날락했으니

깊은 잠을 잘 수가 없었지요.

‘감방에서 쥐들도 나를 무시하는 구나!’라는 자격지심도 생겼습니다.

 

▲내 속에 희망을 본 어떤 기업인

그런 가운데서도 희한하게 우리들은 묘한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불안하고 불편하고, 외로웠던 조건 속에서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는

저를 보고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옆방에 잠시 갇혀있던 기업인이 하루는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 교수님. 나는 지금 죽을 지경입니다.

가족들도 나를 돌보지 않아 외롭기 짝이 없습니다.

아내는 미국으로 달아났습니다.

그런데 한 교수님은 여기 피크닉 오신 것처럼 행복해보이던데,

비결이 무엇입니까?”

 

“아니, 제가 여기 소풍 나온 사람처럼 즐겁게 보입니까?”

 

“예. 한 교수님 뿐 아니라, 함께 오신 분들(민주 인사) 다 그런 것 같은데요.”

 

저도 그 말을 듣고 ‘어떻게 피크닉을 온 사람처럼 내가 보일까’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돈 많은 회장께서, 저희들 속에서 은근히 빛나는

그 어떤 희망의 빛을 보았기 때문이 아닐까요?

 

▲내 속에 희망을 본 어떤 교도관

제 속에 있는 희망의 빛을 꿰뚫어 본 사람이 또 있었습니다.

바로 우리를 감시할 책임을 진 젊은 교도관이었습니다.

사실 저는 그때 스스로 불행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결코 희망 속에 언제나 즐거워하지 못했고, 그렇게 할 수도 없었습니다.

 

즐거워하려고 노력은 했으나, 늘 불편하고 불안했습니다.

그런데, 11월 초 제가 형 집행정지로 석방된다는 소식을 석방 하루 전날

그 교도관이 전해주었습니다.

그는 밤늦게 감방 문을 조용히 두드렸습니다.

모든 수인들은 잠들었을 때였습니다.

 

“내일 석방되니까, 한 교수님,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제가 지금 사귀는 여자가 있는데, 내년 봄에 그녀와 결혼하려고 합니다.

그때 한 교수님이 꼭 주례를 해 준다고 약속해 주세요!”

 

나는 빙그레 웃으며 그가 정말 귀여운 젊은이구나 하고 새삼 느꼈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부탁을 받아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왜 그가 주례를 수인이었던 저에게 부탁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평소에 그가 나에게 한 말이 기억납니다.

자기는 아직도 20대 후반이지만, 자기에게는 직업상 희망이 없다고 했습니다.

한 교수님은 비록 감방에 갇혀 있지만, 희망이 있지 않느냐며 부러워했지요.

 

과연 그랬던가를 저는 스스로 물었습니다.

저는 제 안에 과연 희망이 불붙어 있는지

스스로 확신할 수 없을 때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 젊은 교도관은 제 속에 꺼지지 않고 빛나고 있는

희망의 불빛을 꿰뚫어 볼뿐 아니라, 그것을 자기도 갖고 싶어 했습니다...

 

 

(세월이 흘러 십여 년이 지난 후, 저는 KBS의 "TV는 사랑을 싣고"라는 프로그램에서

경찰로 재직 중인 그 젊은 교도관을 다시 만날 수 있었습니다. 정말 반가웠습니다.)

 

(절망적 감옥이란 상황에서, 제가 희망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2천년 전에 죽어서 끝난 예수가 아니라,

그 예수가 부활하셔서, 오늘 살아서, 성령으로 내 곁에 계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성경을 읽고 기도할 때, 주님은 내 곁에 임하시고,

그 때 우리에겐 아무리 상황이 암울해도 푸르푸릇한 희망이 생깁니다.)  

 

-중략-

 

 

◑지금은 희망의 선포가 필요한 시기

 

▲사랑은, 이웃에게 희망을 나눕니다.

이 같은 희망 제조는 결국 사랑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지요.

그래서 바울은 이런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딥니다.” (고전13:7)

It(love) always hopes, always preserves.

 

영어가 더 쉽게 가슴에 와 닿습니다.

사랑은 <항상> 희망을 품게 하며

온갖 어려움을 <언제나> 견디어내게 하는 힘입니다.

높은 산이나 거친 들에서나, 감옥에서나 궁궐에서나,

어디서나 어느 때나 사랑은 희망을 심어 견디어 낼 수 있게 하는

놀라운 힘입니다.

 

절망 속에 허덕이는 이웃을 사랑한다면,

그에게 희망을 만들어 주고 심어 주는 일을 하지 않을 수 없지요.

그래서 희망과 사랑은 항상 동전의 양면입니다. 아니 사실 같은 하나입니다.

 

인간이 인간답게 존엄한 존재로 살 수 있는 것은

서로 신뢰하고, 서로 사랑하고 서로에게 희망을 심어주는 힘을 갖고 있고

또 이 힘을 활용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뜻에서 누구에게나 희망과 사랑을 준 예수는, 가장 아름다운 인간이었으며,

부활의 그리스도는 이런 존재가 되게 하는 사랑과 희망의 원동력이었습니다.

 

<우리는 희망을 나눈다. 고로 우리는 존재한다> 라고 해도 틀림없습니다.

희망을 나눠가질 때, 특히 어려운 조건 속에서 그러할 때

사랑과 희망은 사막에서 샘물 터지듯, 황무지에서 장미꽃이 피듯 할 것입니다.

 

▲예수가 가졌던 ‘희망의 힘’ the power of hope

그렇습니다. 예수는 항상 희망을 가지고 사역했습니다.

자기를 비워 남을 채워주고, 육체를 죽이는 세력을 용서해주며,

원수를 사랑과 희망의 능력으로 이겨내는 힘, 바로 그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가져야 할 힘이 바로 ‘희망의 힘’입니다.

 

희망이 이기적 욕망과 다른 것은

그것이 남에게 값지게 살 용기를 주고 온갖 어려움을 견디어 내게 하는

사랑의 힘이기 때문입니다. 절망 속에서 견디게 할 뿐 아니라,

그 속에서도 즐거워하게 하는 힘, 그것이 놀라운 희망의 힘입니다.

 

희망을 선포합시다!

이런 뜻에서 희망의 선포는, 오늘 우리에게 절박하게 필요한 메시지입니다.

전 지구가 기후변화로 위기를 겪고 있고,

나라마다 선후진국을 가릴 것 없이 양극화의 질병을 앓고 있습니다.

 

우리는 분단으로 온 민족이 고통당하고 있는 유일한 민족이며,

개발의 이름으로 인간과 자연을 훼손시키려는 세력이 득세하고 있습니다.

또한 평화와 개혁을 외치는 세력은 설득력을 상실하여 우왕좌왕하고 있습니다.

 

이때야말로 예수께서 선포하셨던 하나님 나라의 희망을 밝게 비춰져야 하고,

부활의 그리스도 능력이 크게 폭발해야 할 카이로스(Kairos)의 때입니다.

교회의 존재이유는 바로 이 요청에 겸손히 그리고 힘차게 응답하는데 있습니다.

 

▲부활의 그리스도는 우리의 희망 - <지금, 여기에> 살아계시기 때문!

 

갈릴리 예수는 어둠과 절망의 상황에서 희망을 선포하셨을 뿐 아니라,

희망을 실천하시다가 죽으셨습니다.

 

부활의 그리스도는 오늘 우리에게 그 희망을 힘 있게 다시 심어주시고

어떤 악조건에서도 용기 있게 살아가도록 우리를 감화시켜주십니다.

부활의 예수는 <지금>, <여기에> 임재하시는 우리의 그리스도이십니다.★


(부활 이전에, 예수님은
<지금>, <여기에> 계실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은 <지금>, <여기에> 임재해 계시고

금년 2007년에도 우리 바로 곁에 계십니다. 우리가 간절히 찾기만 하면요!

 

그것이 우리가 선포하는 희망의 이유요, 내용입니다.

내가 희망을 주는 것이 아니라, 나를 통해 부활하신 주님이

그에게 임재해 희망을 수여해 주시는 것입니다!

현실과 영원한 희망 모두요...

이렇게 예수님이 임재하시는 곳에는, 항상 희망이 있습니다. 감옥에서도요..)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희망을 선포하고 실천하는 것은

예수따르미의 신성한 의무일 뿐 아니라 참으로 소중한 특권이라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희망의 그 놀라운 힘을 새롭게 깨달아야 합니다.

 

<인터넷 설교 발췌, 축약  07.03.04. *원제목 : 희망, 그 놀라운 힘

 

*새길교회 한완상 님(대한적십자 총재)의 설교문을, 너무 길어서 1/2로 축약했으니,

전문을 보실 분은 인터넷으로 찾아가셔서 보시기 바랍니다.

 

 

[주제별 분류] 부활, 추수, 성탄, 성찬   http://blog.daum.net/bible3/112805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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