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에게 환란이 많은 이유 말라기1:2 설교스크랩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다 (말1:2)
사랑은 ‘간섭’이다.
사랑하면... 그 대상을 가만히 방치해 두지 않는다.
하나님도 자기 백성이 절대 곁길로 못 가도록 계속 지키시고 간섭하신다.
이스라엘 민족이 고난을 많이 겪은 것도, 그런 ‘간섭의 사랑’ 때문이라 볼 수 있고,
그것은 오늘 21세기 크리스천에게도 마찬가지다...
▲선택받은 민족의 특별한 사랑(?)
이스라엘같이 기적 속에서 살아온 민족은 없습니다.
홍해를 건너 나오고, 만나를 먹으며, 반석에서 나오는 샘물을 마시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인도를 받으며,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땅을 얻은 족속입니다.
하지만 역사상, 이스라엘 민족만큼
수난의 연속이었던 민족도 또 없습니다.
(주변 나라들은 한 때 흥했으나 결국 망했습니다.)
이스라엘은 망한 적은 없지만,
놔두고 계속 고생 속에 있게 합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셨다는 게 이겁니까?
홍해를 가르고 나와서 뭐 좀 나은 줄 알았더니 광야였고,
가나안에 들어갔더니 전쟁이었고,
거기서 언제나 싸워야 했던 블레셋이 있었고,
애굽이 있었으며, 나중에 바벨론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후 페르시아에게 그리고 로마에게 당했습니다.
그 이후에는 뿔뿔이 흩어져서 나치한테 당하고...
그런데 성경에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였다’ 고 말입니다.
이것이 사랑입니까?
이스라엘 역사 중에 하나님께서는
한번도 간섭하신 손길을 놓은 적이 없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좋았던 날 수는 길지 않고, 대부분 고생한 날들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언약백성이었고,
하나님이 늘 사랑하신다는 자녀였습니다.
그래서 고생을 억수로 시키신 것입니다.
▲범죄 코스트
시카고대학의 경제학자 게일리 베커 교수는
모든 인간은 범죄를 저지를 잠재성을 지니고 있는데
그것을 저지르지 않는 것은
이득(베니핏)보다 비용(코스트)이 많이 들기 때문이라는
경제원리를 적용해 유명합니다.
예전보다 현대에 범죄가 많은 것은
신앙 이탈로 양심가책이라는 코스트가 적게 든 때문이요,
서양보다 동양 사람에게 범죄가 적은 것은
동양 사람들의 체면손상이라는 코스트가 너무 크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불신자는 대충 봐 주셔도) 사랑하시는 신자가 잘못을 저지르면,
반드시 ‘코스트’를 톡톡히 물게 하십니다.
그 코스트가 크면 클수록, 다음부터 더욱 철저히 조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약 이스라엘이 계속 고난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신기하게 완전히 망해서 없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야곱이 받은 사랑의 간섭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다 (말1:2)
(여기서 야곱은 원래적 의미로 이스라엘 민족을 가리킵니다.)
야곱과 에서의 생애가 어떻게 다릅니까?
야곱은 고생했고, 에서는 고생하지 않았습니다.
이게 가장 큰 차이입니다.
야곱은 고생을 무지무지하게 했습니다.
그의 전 인생에 걸쳐서 고생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게 사랑이라 그럽니다.
사랑이란 다른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죽을 것을 향하여 뛰어가는 것을 막는 것입니다.
태만과 비참을 향하여 뛰어가는 우리의 발을 꺾는 것이 사랑입니다.
돌이켜 생명과 진리와 영원을 준비케 하는 것입니다.
그 간섭이 우리에게는 싫은 것입니다.
왜요?
우리는 원래 우리의 욕심을 따라 뛰어가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승리는 천국에 있다
아브라함이 가로되, (부자야)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눅16:25
지옥에 안 가 봐서 모르지만,
거기의 과반수이상은 이생에서 편안하고 태평하게 살았을 것입니다, 부자처럼.
그래서 주님을 의지하고 믿을 만큼 마음이 가난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천국에 안 가 봐서 모르지만,
거기의 과반수이상은 이생에서 괴롭고 어렵게 살았을 것입니다, 나사로처럼.
그래서 주님을 간절히 의지하고 믿으며 살다가... 천국에 갔을 것입니다.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계7:14
물론 성경은 여러 면을 봐야 하지만, 위 눅16:25절은
성도가 궁극적으로 추구해야할 신앙의 방향이 ‘현세’보다는 ‘내세’라는 것입니다.
‘현세, 살았을 때’에 보상을 다 못 받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현세적 복과 영원한 복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이제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눅6:21~22
(비슷하게 마태복음의 8복이 있다)
이 누가복음의 복과, 마태의 8복을 찬찬히 읽어보면서,
예수님이 가르치신 복이 현세적인가, 저 천국인가? 한 번 생각해 보게 됩니다.
물론 둘 다 포함합니다.
그런데 그 궁극적 강조점은 어디에 있을까요?
위 구절에서 유의해서 보아야 할 점은,
현세에서 가난할 수 있다는 것, 주릴 수 있다는 것, 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그것을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오늘날 신앙생활을 하는 가운데,
형통은 무조건 좋고, 고난은 나쁘다는 ‘잘못된’ 인식이 널리 퍼져있습니다.
주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간섭’하실 때는, 남의 자식과는 차원이 한참 다릅니다.
조금만 빗나가도 후려치십니다.
구약 이스라엘 민족역사, 야곱의 삶, 그 외 많은 신앙 인물의 삶에 그런 면이 있었습니다.
오늘 내 삶과 내 주변 현실을,
너무 현세적 관점 일변도로 치우쳐서 보지 맙시다!
◑신자와 불신자와의차이
신자와 불신자와의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인지 아십니까?
불신자는 무엇이 진리이며, 무엇이 가장 귀중한가를
돌이킬 수 없을 때 가서야 비로소 깨닫습니다.
그러나 신자는 돌이킬 수 있을 때 깨닫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가 사랑하시는 백성에게는
돌이킬 수 있을 때에 깨닫게 하기 위하여 결과(벌)를 일찍 보여 주십니다.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 내세가 있다는 것은 모두 죽어야만 압니다.
문제는 죽고 난 다음에는, 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랑하시지 않는 자, 즉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자들은
그 사실을 죽어서,
다시 말하면 돌이킬 수 없는 때에야 알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 삶이 평탄합니다)
이 세상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과 영원을 준비해야 된다는 것,
내가 세상에서 추구했던 것들이 최고가 아니었다는 것을 그때 비로소 알게 됩니다.
그때는 이미 돌이킬 수가 없는 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돌이킬 수 있는 때에
그 사실을 깨달아야만 하기 때문에
신자에게는 그토록 환난이 많은 것입니다.
<박영선 목사님 칼럼을 토대로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