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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9 안식일을 “넘어서” 부활

LNCK 2007. 4. 16. 14:40
 

◈안식일을 “넘어서” 부활하신 예수                                    07.04.08.   박종화 목사님 설교 녹취


안식일이 지났을 때에,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는

가서 예수께 발라 드리려고 향료를 샀다.

그래서 이레의 첫날 새벽, 해가 막 돋은 때에, 무덤으로 갔다.... 막16:1~2



◑안식일을 피해서 부활하셨다.


예수님은 안식일 다음 날(주일)에 부활하셨다.

당시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으므로

예수님이 부활하신다면, 특별히 안식일 날을 골라서 부활하셨으면

더 의미 있지 않았을까?


▲1. 창조적 의미의 안식일 : 천지창조로 인해

안식일은, 하나님이 엿새 동안 천지를 창조하시고,

마지막 이레 째 되는 날 쉬셨다.

이 안식은 단순한 ‘쉼’의 의미를 넘어서, ‘창조의 마무리 작업’이었다.


만약 ‘안식’이 없다면, 하나님의 창조는 결코 끝나지 않는다.

‘안식’은 ‘끝맺음’이었다. ‘안식’ 속에 ‘끝’과 ‘새로운 시작’이 함께 있다.


그래서 출애굽 때 율법을 받은 이후로

유대인들은 반드시 안식일을 지켰다.

그것은 쉼을 넘어서, 하나님의 창조를 되돌아보고 묵상하는 시간이었다.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출20:8~11


▲2. 역사적 의미의 안식일 : 자유와 해방으로 인해

신명기에 보면, 안식일을 지키되 거룩하게 지키라고 하셨다.

아무 일도 하지 말되, 반드시 역사적 사건 한 가지를 기억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렇게도 원하던 출애굽 사건을 기억하며

역사적인 자유와 해방을 주신 것을 기억하고 감격하며 쉬라는 것이다.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신5:12~15


▲상식을 무시한 주일날의 부활

이렇듯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하나님의 날’에

하나님의 아들이 죽었다가 부활한다면

상식대로 하면, 당연히 안식일 날 부활했어야 한다.


안식일이 토요일이니까, 사흘 만에 부활하시려면

예수님은 목요일에 죽으시는 것이 옳았었다.


안식일(토) 아침에 부활하셨다면,

유대인들은 대대로 지켜오던 안식일의 큰 의미를 생각하며

부활을 더 의미 있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안식일을 “넘어서” 부활하셨다.

그러나 미안하게도

예수님은 안식일을 “넘어선 날” 부활하셨다.


안식일은 모든 유대인들의

생활방식이요, 신앙이요, 체제와 이념이 집중된 날이었다.

이런 유대인이 생각하던 안식일 체제를 “넘어서” 그 다음날 부활하셨다.


이것은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주는데,

예수님은 바로 ‘전통적 유대주의’를 뛰어 “넘으시고” 부활하신 것이었다.



◑유대주의와 갈등을 빚으신 예수님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그 이전 유대인의 안식일 체제로 돌아가지 않으셨다.

그래서 부활공동체는 그 때부터 주일(부활하신 날)을 새로이 지켰다. 


안식일을 지난 부활은,

안식일을 넘어서, 즉 유대교를 넘어서

유대인이었으나, 유대인을 넘어서

지리적으로 이스라엘 안에 있었으나, 이스라엘을 넘어서

이스라엘 독립을 원했으나, 이스라엘 민족주의에 머물지 않고


그 유대주의의 한계를 뛰어넘어서, 세계로 뻗어 나아가시기 위해

안식일 다음날 부활하셨다.


당시 유대 백성들 가운데, 4가지 사회적 그룹이 있었다.

 

▲1. 사두개파, 성직자 그룹

그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관장하던 성직자, 제사장의 후예들이었다.

그들은 옛날부터 내려오는 엄청난 종교적 제사 규례와 율법을 고수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권위가 굉장히 강했다.


그들은 모세 5경(모세율법)만 경전이고,

시편, 사무엘서, 예언서 등 다른 구약은 경전이 아니라고 믿었다.


이들은 너무 제도, 체제, 유대교 제사 전통에 충실한 나머지

성전에서 드리는 예배, 회당에서 가르치는 율법 교육을 제외하고는

이것을 뛰어넘는 그 어떤 것도, 상상조차도 불허했다.


심지어 사두개파 사람들은 죽은 후에 하나님 나라에 간다는 영생에 관한 이야기,

죽었다가 살아난다는 부활의 이야기,

천사의 존재도 거부하고 부인했다. (아마 모세오경에 안 나오는 내용인 듯)


그들은 사람들을 종교적으로 다스리고 있었지만

민심을 알지 못했고

외형적으로 매우 튼튼한 조직처럼 보였지만

내적으로 정신은 고갈된 사람들이었다.


당시 종교적 지성인, 관료주의, 현상(황) 고수파, 당시의 극우, 당시의 수구

사두개인은 당시 시대상황에서 그렇게 봐도 된다.


▲2. 에세네파, 수도원파

이들은 사두개파와 정반대의 사람들이었다.


세상은 너무 타락했고, 불결하고, 로마의 압제 속에서 해결될 길도 없고

차라리 세상을 등지고 산 속에 들어가자...

그래서 사해 남쪽에 쿰란 공동체를 만들어서 거기서 수도원적 공동생활을 했다.


재산도 공동분배로 나누었다.

이 수도원 공동체 회원이 아닌 어떤 사람들로부터 선물 받는 것도 금지했다.


세상을 등지고, 스스로 자급자족해서 살며, 영혼 불멸설, 예정론도 믿었고

철저히 영성 중심의, 세상을 등진 삶을 살던 사람들이었다.


이 사람들의 눈에, 예수는 너무나 ‘비 영적’이었다.

예수가 선지자이긴 하지만, 너무 세상에 물든 사람처럼 보였을 수도 있겠다.


이들의 시각에서 볼 때, 사두개파들은 너무 관료적이었다.

반대로 사두개파 눈에는, 에세네파가 너무 수도원적 산골 사람들이었다.


▲3. 젤롯당, 행동파

그런가 하면 길거리에 전혀 다른 그룹이 있었다.

로마로부터 당장 독립하자, 군대를 육성하자, 무력투쟁도 불사하자는

유대교 독립을 위해 무슨 일도 하겠다는 ‘행동주의자’가 생겼다.


이들이 바로 젤롯당(열심당)이었다.


현상고수파인 사두개파나

현실을 외면하고 산 속에 숨어버린 에세네파,

현실 혁명을 주장하는 젤롯당,


이 세 파는 모두 예수에 대해 불만을 품었다.

예수님은 세 파에 대해 아무 것도 그들이 원하는 확실한 답을 줄 수 없었다.


▲4. 바리새파, 중도연합파,

이 세 파를 모두 보듬어 않으면서

유대민족과 율법과 규례에 총체적으로 집중하면서

그래도 유대민족을 살리려고 노력한 사람들이 바리새파들이다.


비교적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우수하다는 사람들이 모여서

유대 민족적 중지를 모은 세력이 바로 바리새파였다.


▲오늘날 한국에도 이런 네 파가 있을 수 있다.

오늘 우리가 처한 현실의 한국에는,

에세네파가 혹시 없는가?

젤롯당은 혹시 없는가?

아니면, 아예 사두개파처럼, 그냥 현상 고수파는 없는가?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하고, 교회음악을 들어도

‘어느 방식’에 따라 기도와 찬양과 예배를 드리고 있는가?


▲바리새파와 가장 많은 갈등을 빚으시다

성경에, 바리새파 와 예수님사이에 무한한 갈등이 있었는데

사두개파는 갈등의 대상이 아니었고, (너무 높은 관료적이라서?)

젤롯당은 아예 예수를 무시했고 (비 혁명적이라서?)

에세네파는 이미 산골에 들어가 있었고 (부딪힐 기회가 없었음)

실제로 유대 백성을 지도하고, 유대주의의 대표적 자존심을 지킨 사람들은

바리새파였다.


그러다보니, 이 바리새파가 예수님과 실제적인 갈등을 가장 많이 빚었다.

늘 서로 부딪히는 현장에 공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 인간적 생각으로는, 바리새파 사람들이 훌륭한 유대주의자들이었는데

왜 예수님과 갈등을 벌였을까?


▲바리새파는 의로웠지만, ‘자기 의, 자기 이념’이었다. ↔복음

저는, 오늘 이 땅에 진실로 아름답고 훌륭한 바리새파가 많았으면 좋겠다.

그런데, 예수와 바리새파 사이에 엄청난 갈등이 생겼다.


이유는 단 하나다.

최고의 윤리와 도덕, 세상에서의 풍족함은 물론

미래 세계에서 부활까지 믿고

젤롯 당처럼 폭력이 아니라 비폭력으로 나가자고 하고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유대백성을 구해보고자 하는

가장 중심적 세력인 바리새파 사람들과 예수는 서로 등을 돌리게 되었다.


세상의 윤리와 도덕이 그런대로 일리는 있으나

이것이 진실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려고 하면

하나님의 뜻이, 하나님의 의가, 하나님의 말씀이 중심이 되어야지


바리새파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자기들이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자기 의, 자기 이데올로기(이념)

마치 그것이 하나님의 것인 양 둔갑시켜서 옳다고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

 

예수님의 말씀은, 나는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러 왔다.

세상 나라에서 선포하는 것과 같은

지성적, 윤리적, 도덕적 엘리트주의와

그들의 ‘자기 의’ 중심적 자세로는 하나님 나라를 펼칠 수 없다며,

그들을 단호히 거부하셨다.


그래서 예수는 바리새파와 갈등을 가졌고,

결국 예수는 바리새파 사람들에 의해 고소를 당했고

거기에 젤롯 파, 에세네 파, 사두개파도 동조했고

총체적인 유대주의자들부터 따돌림을 받았고

마침내 로마 제국도 동조해서 십자가 형을 언도해 버리고 말았다.



◑유대교를 “넘어서” 전 세계로 나아간 부활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예수님의 부활의 아침이

안식일이 아니었던 이유가 자명해진다.


이런 안식일 체제를 고수하는 유대교 모든 사람들의 체제와 이념 속에

동조해 주시려고 예수님이 안식일에 부활하셔야 했겠나?

그래서 옛날의 유대교 체제를 다시 살려주셔야 하셨나?

유대주의 회복을 위해 부활하셔야 했나?


▲유대교, 유대주의를 넘어서 → 전 세계 구원으로 나아가는 부활

그래서 예수님은, 안식일을 넘어서, 현실을 넘어서 부활하셨다. 


로마 제국에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종교적으로 해방 받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은 잘 알지만,

예수는 ‘민족주의 함정’에 빠지고 싶지 않으셨다.


예수는 매우 비행동적이었고

유대교 입장에서 보면 아주 이해 안 되는 사람이었지만,

나중에 지나고 보니

예수님에게는 세계 구원이라는 큰 뜻이 (주일날 부활에) 담겨 있었다.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새롭게 일어난 ‘부활 공동체’는

유대 지경을 넘어서 로마 제국을 굴복시켰고,

내부에서 들어가 로마 제국(전 세계)을 내부에서부터 모조리 변화시켰다.

그래서 그들은 안식일 보다, 주일을 지키게 되었다고 본다.


▲적용 : 예수의 부활은 유대주의(사두개, 바리새, 에세네, 젤롯당)을 뛰어넘어야

예수님의 부활은, 옛날로 회귀하는 부활이 아니었다.

유대교 체제를 도와주는 부활이 아니었다.


오늘 우리가 진정으로 부활을 해야 하지만,

옛날 자기 의, 자기 아집을 계속 유지하는, 그런 식의 부활이 되어서는 안 된다.


부활은, 자기 의, 자기 윤리, 자기 기준의 도덕을 버리고

하나님 나라의 의, 윤리, 가치관에 맞추는 부활이 되어야 한다.


자기 이기주의, 자기 이익, 자기 아집을 위한 부활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

온 세계로 나아가는 하나님 나라의 부활,

현재에 만족하고, 현실을 고수하는 부활이 아니라,

내일의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부활을 기대할 때

예수님은 진정 우리 가운데 부활하실 것이다.


그렇지 못하고 우리가 자기를 굳게 지키면서 예수님의 부활만을 기대한다면,

예수님은 우리를 ‘뛰어넘어’ 다른 데서 부활하실 것이다.

 

<07.04.08. 인터넷 설교 정리  *원제목 : 부활에 동참하라                                           [주제별 분류] 부활, 추수, 성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