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내면화 요6:26~27 인터넷 설교 스크랩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썩어 없어지는 음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영원히 있어서 영생을 주는 음식'을 위해 일하여라 요6:26~27
요즘 시대의 화두가 바로 ‘신앙의 내면화’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본 받는 것’과 같은 개념입니다.
‘신앙의 내면화’ 개념을 쉽게 이해하려면,
반대 개념인 ‘외형화’를 생각해 보면 됩니다.
외형화란, 그래도 뭔가 버젓하게 남에게 보여줄 만한 게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등입니다.
사실 그 동안 우리가 계속 강조해 온 것은 ‘신앙의 외형화’였는데,
기독교의 본질은 ‘외형’보다는 ‘내면’에 있으며,
사실 신앙생활 하면서도 가장 도달하기 어려운 부분이기도 합니다...
◑시련을 통해 ‘신앙의 내면화’의 중요성을 깨닫다
▲우리 아들이 너무 난폭해요!
신앙이 좋다고 칭찬을 듣던 한 자매가 있었다.
시집가기 전부터 신앙 안에서 교회 생활을 성실히 했고,
시집도 기도 응답을 받아서 갔고, 모든 것이 순탄하게 보였다.
그런데 첫 아들을 출산하고,
그 애가 자라서 6살이 되어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할 무렵,
어떤 문제점을 한 가지 발견했다.
자기 아들이 유치원에서 자꾸 다른 아이들을 때린다는 것이다.
또한 조금만 자기 원대로 안 되어도 아이가 울며 짜증을 부리는데,
그 정도가 아주 심각했다.
그래서 엄마가 아이를 나무라면, 발을 구르면서 거세게 반항했다.
6살배기 아이가 하기에는 너무 심할 정도로 반응하는 것을 보면서
그 엄마는, 자기 아이 속에 있는 ‘어떤 난폭성’을 발견했다.
그저 개구쟁이 남자아이의 투정이라고 보기에는 분명히 도가 지나쳤다.
그래서 그 자매는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무엇 때문에 내 아이가 이렇게 되었을까? 이럴 때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이런 가운데 자매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갑상선 암 판정을 받게 되었다.
그런 고난 가운데 그는 자신을 낮추며, 하나님을 깊이 대면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자기 아들과 관련된 문제도 어떤 실마리를 찾게 되었는데...
▲아래는 그 자매님의 간증이다.
6살 된 아이가 왜 저렇게 난폭하게 되었는지
그것을 엄마인 제 책임이라고 미처 생각 못 했는데,
하나님과 대면해서 가까이 지내면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런 깨달음이 왔다.
우리 아들이 20개월쯤 되던 때였다.
그런데 아직 소변을 가리지 못했다.
어떻게 이 문제를 풀어야 할지 몰라서 친정 언니에게 물어보니,
매를 때려서 해결하라는 조언을 듣게 되었다.
그래서 아들이 오줌을 쌀 때마다 매를 들었다.
그런데 지금 가만히 자신을 돌이켜 보니,
그렇게 아이를 때리기 시작하면서부터
그 후로 아이가 약간만 잘못해도 아이를 때리게 되었다.
그런가 하면 아이가 작은 잘못을 저질러도
아이에게 큰소리로 고함을 치며, 심지어는 욕설까지 하면서
아이를 때렸던 적도 간혹 있었던 것이 생각났다.
그래서 아들이 지금 저렇게 난폭한 아이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 때 아이를 때릴 때는, ‘이것은 다 아들을 위해 훈육하는 거야!’,
또는 ‘엄마로서 당연히 해야 되는 거야..’ 이렇게 생각했지만,
지금 깊이 자신의 과거를 돌이켜보니,
당시에 ‘신앙의 내면화가 자신에게 실제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신앙 인격적인 대처방법이 아니었던 것이다.
평소에 사람들은 나를 볼 때, ‘믿음 좋은 사람’으로 인정해주었다.
내가 나를 봐도 ‘믿음 좋은 사람’으로 알고 지금까지 살아왔다.
(주일날 안 빠지고, 헌금도 꼬박꼬박 내고, 크게 나쁜 짓 안 하고 살아왔으니까...)
그런데 실제로 적나라한 나의 모습을 보니,
‘그것이 아니었다!’
아이를 키우는 문제만 놓고 봐도, 나는 너무 엉터리 짓을 했었다.
때려서 해결될 문제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이제 내 몸에 병(갑상선 암)도 나면서, 하나님과 깊이 만나면서 깨닫는 것은
‘과거에 내가 믿음 좋았다는 것은 허울뿐이었구나!’ 라는 자괴감이었다...
▲핵심 문제를 그제야 발견하다!
그 자매는 교회에 열심히 다니고, 성경도 읽고 기도도 드렸지만,
자기 신앙이 내면화 되지 못했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던 것이다.
기독교 신앙이, 자기 몸에 익숙한 ‘문화’로는 소화되었는데,
정작 아이를 어떻게 성경적으로 키울 것인가에 대해서는,
또한 자기 삶의 내면세계가 하나님 앞에 어떻게 바로 서야 하는 것은
자기가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이제껏 살아왔던 것이다. ★
‘외면적’으로는, 자타가 볼 때 신앙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도리어 ‘신앙이 좋다’는 판정을 받고 살아왔다.
그러나 ‘내면적’ 적나라한 곳에서는
사실 하나님과 그리 가깝지 못했다.
자기 삶의 중요한 문제들을 처리하는 방식이 ‘신앙적’이지 못했던 것이다.
▲누구나 처리되지 못한 내면적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이 분이 나중에 깨닫고 발견한 것은
자기 아이가 조그만 잘못을 해도 매를 때리고 고함을 지른 것은,
자기 자신이 어릴 때 친정어머니께 매를 많이 맞고 자랐다는 것이다.
한편으로 자기 어머니를 사랑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어머니에 대한 분노가 쌓여 있었다.
이제 결혼을 해서 신앙생활 잘 하면서 무난하게 사는 것 같았지만
아직 그 속에 해결되지 못한 분노,
어머니에 대한 상처가 마음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여러분, 우리 마음속에 ‘분노의 찌꺼기’가 남아 있으면,
미운 그 사람을 향해서만 분노가 표출되는 것은 아니다.
그 분노가 다른 사람 -남편, 자녀 등- 을 향해서도 나타나기도 한다.
예를 들면, 혹시 택시를 탔다가 어떤 기사에게 억울한 일을 당했으면,
그 다음날 엉뚱한 택시기사들을 보고서,
‘그놈이 그놈이야!’ 하면서 막 화를 내게 된다.
우리 자신이 가지고 있는 그 상처를
성령의 도우심으로 치유 받음으로써
주님께서 내 상처를 치유하시는 분이시라는 증인이 되어야 되겠다.
▲나의 연약함의 발견
‘나는 특별한 문제없어!’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면서 살아간다.
직장 갔다가, 교회 갔다가 바쁘게 살다보니
‘자기 인격적 결함’이 무엇인지 규명도 한 번 제대로 못해보고
20~30년 지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심각하게 조명해 보아야 한다.
‘나의 연약함’을 조기에 발견해서 치료해야 한다.
(보통은 시련을 통해 그것을 발견한다.)
▲나의 연약함의 발견
신앙의 내면화를 이루는 사람들은,
자기 인격적 결함을 끊임없이 다듬어갈 뿐만 아니라,
물질, 명성, 사회적 신분- 이런 외적 요소들을 가꾸고, 자랑하고, 열등감 갖기보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임재, 동행 - 이런 내적 요소들을 가꾸고 자랑한다.
그 안에서 참 만족, 인생의 참된 의미를 깨닫는다.
◑동창회에서 ‘외형적’인 것 때문에 주눅 든 집사님
어떤 중년 여 집사님은, 오래 동안 안 나갔던 대학동창회에 나가보기로 결심했다.
그 때 당시에 은혜가 충만했기 때문에 이렇게 생각했다.
‘동창회에 나가서 만나는 많은 불쌍한 영혼들(친구)중에
한 사람에게라도 내 간증을 나누고, 복음을 전한다면 얼마나 좋으랴!’
동창회 날 아침에도 그 집사님은 큐티하고 기도하면서 간절히 기도드렸다.
‘오늘 지혜롭게 주님을 증거 하게 하시고, 너무 무식하게 해서 반발사지 않도록...’
드디어 집사님은 자기 차를 몰고 동창회 장소에 도착했다.
그런데 주차장에 굉장히 비싼 차 한 대가 같이 들어오고 있었다.
더 놀란 것은, 그 차에서 내리는 사람이 자기 동창 친구였다.
그 때부터 집사님은 갑자기 속으로 기분이 막 언짢아지기 시작했다.
‘저 친구가 학교 다닐 때 나보다 공부를 더 잘했던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나보다 인물이 더 나은 편도 아니었는데,
어쩌다가 운 좋게 돈 잘 버는 남편을 만나서 저렇게 비싼 차를 끌고 다니다니...’
“야, 반갑다!”
그 친구가 집사님께 인사를 건네 왔다.
그런데 쳐다보니 옷은 또 얼마나 비싼 것을 사 입었는지...
친구의 목을 보니 또 얼마나 비싼 것을 걸치고 있는지...
집사님은 기가 콱 죽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자녀가 그럴 수 없지!’ 하며
마음을 가다듬고 기도하며 모임 장소에 걸어 들어갔다.
모여서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니
‘누구는 얼마 전에 어디 아파트로 이사를 했고...’
‘누구 아들은 무슨 대학에 들어갔고...’
거기에 세상 적으로 자기보다 못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는 것처럼 여겨졌다.
동창들의 자녀들은 모두 다 공부도 잘 하는 것 같았고,
남편들은 모두 다 돈도 잘 버는 것 같았고,
그들의 자랑하는 말들을 들어보니,
부부 금실도 좋은 것 같아보였고...
집사님은 거기에 계속 앉아 있는 것이 도리어 불편하게 느껴졌다.
아침에 ‘오늘 이들에게 복음을 잘 전하게 하옵소서!’ 라는 기도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고, 전도는커녕
‘이렇게 주눅 들면 안 되오니, 이 열등감을 극복하게 하옵소서!’
앉아서 내내 그렇게만 기도하다가 동창회가 끝나 버렸다고 한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다.
안 그런 사람 누가 있겠는가!
우리는 얼마나 쉽게 열등감을 느끼는가!
한 꺼풀만 벗기고 보면,
우리가 조그만 일 때문에도 상처받는 사람들이 아닌가!
나이를 지긋이 먹어도,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상처를 잘 받는다.
말 한 마디 때문에 상처 받고,
누가 눈빛 한 번만 흘겨봐도, ‘저게 명퇴했다고 날 무시하는 구나!’
당장 그렇게 반응한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말씀을 공부하는 것은,
열등감이나, 세상 것들에 대한 집착과 비교의식 등을
‘신앙으로’ 넉넉히 넘어설 수 있는 길로 들어서는 것이다.
신앙의 내면화를 이루면서
남들이 아무리 비싼 차를 몰고, 큰 차를 타고, 남편이 돈을 잘 벌어도
하나님 자녀로서의 자존심이 상처를 입으면 안 된다. 더 자랑할 수 있어야 한다.
◑주님의 소원
▲나의 소원 ... 주로 외형적일 때가 많다.
우리는 여러 가지 문제를 안고 살 수 있다.
그러나 그 문제로 인하여 위축되지 말고 자기 사명의 길을 가야 하는데...
‘내가 병들었으니까, 병 낫게 해 주시고
내가 돈 없으니까, 돈 주시고
내가 집 없으니까, 더 큰 집 주시고
그래서 하나님, 제가 이 땅에서 (번듯하게 되어) 예수를 잘 증거 하게 하소서!’
(우리가 구하는 것들은 '외형적'이 되기 쉽다.)
이렇게 기도하시는 분들은, 빨리 꿈 깨시기 바란다.
주님은 그런 방식으로 자녀들을 격려하시지 않는다.
물론 필요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모든 것을 주시겠지만,
여러분, 우리가 그런 가치관/신앙관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면,
평생 주눅 들면서 살다가 생을 마치게 된다.
나보다 더 큰 부자는 세상에 항상 있게 마련이고,
우리 집보다 더 큰 집도 세상에 항상 있다.
나보다 더 잘나고 똑똑한 사람도 항상 있게 마련이다.
그런 욕심은 절대 만족할 만큼 채워지지 않는다.
우리는 이런 세상적, 개인적 소원들로부터
빨리 탈피해야 한다.
그런 외형적인 것들로부터 탈피해서, 신앙의 내면화를 이루어야 한다.
▲주님의 소원 ... 내면적이다.
주님이 이 땅에 계실 때나, 승천하셔서 하늘나라에 가셔서 마찬가지로
주님 마음속에 가득 차 있는 소원은 -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것이다.
로마 가지고는 안 되고,
미국 가지고도 안 되고,
일본 가지고도 안 되고,
대한민국 가지고도 안 된다.
오직 하나님의 나라야 된다.
그래서 예수님 마음에는 지금도 ‘하나님의 나라 세우는 일’만 가득 차 있다.
오늘날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대변할 사람들이 필요하다.
주님이 중요하게 여기시는 일을, 나도 중요하게 여기고
주님이 별로 라고 여기시는 일을, 나도 별로 라고 여긴다면
우리는 주님과 매우 깊은 친밀한 관계에 들어갈 수 있다.
반면에, 주님이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시는 일을, 나는 하찮게 여기고
주님이 하찮게 여기는 일을 나는 너무 너무 중요하게 여기면서
그 우선순위를 바꾸어 살면
우리는 하나님과 절대 친밀해 질 수 없다...
우리가 정말 바울처럼, 베드로처럼
주님의 제자가 되기 원한다면
신앙의 내면화를 이루면서
주님과 더욱 친밀해 져야 한다.
그리고 주님의 소원을 내 사명으로 여기고 남은 생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진리에 대한 열정이다.
구원에 대한 열정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대한 열정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만 하면, 저 사람이 달라질 것인데
이 세상이 정말 살만한 세상이 될 것인데
이런 열정을 갖고 살아야 한다.
<인터넷 설교 발췌, 편집, 07.04.15. *원제목 : 주님과 친해지는 법 ▣영적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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