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은 여호와의 기업
자녀는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시127:3
▲자식은 여호와의 기업
‘기업’이란 말은
‘토지 혹은 가옥처럼 상속권을 가지고 물려줄 수 있는 것’을 뜻한다.
‘자녀를 기업’이라고 말한 것은
주님으로부터 상속으로 물려받았다는 뜻이며,
언젠가는 다시 돌려드려야 한다는 뜻도 내포하고 있다.
한마디로, 자녀는 하나님의 재산에 속한 사람이다.
하나님의 소유를 내가 잠시 맡아서 키우는 것이다.
자녀는 부모의 소유물이 결코 아니다. (내가 낳아서 키우기는 했지만...)
자녀가 여호와의 기업이란 여호와의 소유물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소유를 내 마음대로 조종하려고 할 때 어려운 일이 생긴다.
부모 마음에 원하는 대로 키워서는 절대 안 된다는 뜻이다.
오직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만 키워야 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 젊은 시절의 못다 이룬 꿈을 자식에게 강요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성경적으로 어긋남을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
▲방목해서 키워야 인물이 나온다.
일본에서 자라는 ‘코이 잉어’에 대해 들어보셨는가?
이 물고기는 어항에서 키우면, 5~8cm 정도만 자라는 조그만 물고기가 된다.
그런데 연못에 넣고 키우면, 15~25cm 정도 자라는 제법 큰 물고기가 된다.
코이 잉어가 강물에서 발견되기도 하는데, 다 자란 놈은 90~120cm 라고 한다.
우리 어린 자녀들의 장래를 논할 때, 이 코이 잉어 비유가 종종 사용된다.
너무 가정이란 어항 속에 가두어 놓고, 부모가 짜 준 학원 스케줄에 따라 자라면,
마치 어항 속의 코이처럼 크게 자라지 않는다.
지식은 많지만, (속된 표현으로) 잔챙이가 될 가능성이 크다.
지금 중년에 사회에서 한 자리 하시는 분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거의 대부분 시골 출신들이시다.
시골에서 방목하다시피 하며 자라났다.
그래서 큰 인물, 자수성가가 될 수 있었다고 본다.
어떤 부모가 자녀를 방목할 수 있는가?
자녀는 내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기업이요 하나님의 소유임을 확신할 때이다.
하나님이 내 자녀를 책임져 주신다고 확신하고,
하나님께 맡기는 믿음이 있으면 된다.
▲어느 교육전문가가 말하기를
모든 자녀교육비결을 한 마디로 축약하면,
‘떠나보내는 것’이라고 한다.
‘자기 품에서 내어 놓는 것’이라고 한다.
옛날에 우리가 자랄 때 부모들은 항상 “나가 놀아라!”고 주문하셨다.
그 때는 집은 좁은데, 식구가 많으니까 그랬다.
알고 보니, 그것이 좋은 교육법이었다.
▲방목하되 경계는 정해주라
클라우드 박사가 쓴 boundless(경계선이 없음)란 책을 보면,
유치원 다니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실험, 조사를 했는데,
한 그룹은 부모가 지켜보는 가운데 정확한 경계선이 있는 놀이터에서 놀게 하고,
다른 한 그룹은 경계선이 없는 곳에서 마음껏 뛰어놀게 했다.
우리 생각에는, 경계선이 없는 곳에서 자유롭게 뛰어논 아이들이
더 자유롭고, 더 활발하게 자랄 것 같지만,
그러나 수 백 번 실험을 거듭한 결과, 우리 생각과는 정 반대로
경계선이 분명히 그어진 곳에서 노는 아이들이 훨씬 더 자유로웠다고 한다.
아이들이 훨씬 더 안정된 마음으로 놀고 있더라는 것이다.
때로는 신앙생활이 우리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 같고,
때로는 부모의 간섭이 아이들에게 지나친 간섭이 되는 것 같지만,
어떤 경계선(바운더리)안에 있는 것이 사실은 더욱 자유롭다는 것이다.
마음이 더욱 안정된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말하는 경계선(바운더리)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계명)이다.
절대 타협하거나 포기해서 안 되는 분명한 경계선(바운더리)이다.
미국의 대중문화는 1960년대부터 그 경계선을 다 깨어버렸다.
성적 순결성 보존의 바운더리, 가정의 바운더리를 다 깨어버리자,
지금 미국인은 더 자유롭기는커녕, 더 부자유스럽고 불행한 삶을 살고 있다.
미국의 사회와 가정이 급격하게 타락하고 있는데,
문제는 우리나라도 그 뒤를 따라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기준standard 안에서
그 경계선 boundary 안에서 살 때 훨씬 더 안정되고 자유로움을 누린다.
그러므로 자녀를 방목하되 말씀의 경계선을 분명히 그어 주어야한다.
▲당당한 자녀를 키우는 법
부모 생각에는, 공부 잘 하는 애를 어디에다 내 놓아도 당당할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부모의 사랑을 충분히 받은 아이가, 어디다 내 놓아도 당당하게 처신한다.
사춘기 이전, 특히 유아기 자녀 사랑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부모의 사랑은 부족하기 쉽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듬뿍 입은 사람이라야 진짜 당당해진다.
교회에서 떠드는 아이를 보시더라도,
가급적 야단치지 마시라. 왜냐하면 기가 죽고 당당함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대신에 그에게 사탕을 주시라.
사랑을 부어주어서 당당함을 세워주는 것이,
야단을 치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교육법이다.
▲만약 우리 아이가 커서 사도바울처럼 된다면...
정말 괜찮으시겠는가? 동의하시겠는가?
요셉이나 다윗 같으면 차라리 더 나을 것 같은데...
바울은 결혼을 했으나 부인으로부터 버림 받았다는 사실에,
거의 대부분 신학자들은 동의한다.
그는 외롭게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
오직 ‘사명 감당’ 때문에 정상적인 가정도 못 이루었다.
그렇다고 크게 출세한 것도 아니고, 물론 돈도 많이 못 벌었다.
오늘 우리가 바울 선생을 크게 높이지만,
바울이 살던 당시에는 그를 지금처럼 크게 높이지 않았다.
자기와 함께 전도하던 동역자 외에는,
외롭게 살다가 아주 쓸쓸하게 인생을 끝낸 분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영락없이 실패한 인생이다.)
여러분, 당신의 자녀들이
이런 길을 걸어가는 것을 동의하실 수 있겠는가?
“아멘”을 아무도 하지 않으시네요! (웃음)
내 자녀가 바울의 길을 걸어간다면
부모인 우리가 정말 기쁠까 한 번 곰곰이 생각해 보자.
저는 이 질문을 지난 일주일간 곰곰이 생각하면서 다음과 같은 답을 얻었다.
‘우리가 원하든지, 원치 않든지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니, 한 번 그 길로 순종하며 가보자!’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와 우리 자녀들을
바울 같은 전도자로 세우기를 원하신다.
우리가 거기에 순종하면 축복이요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교회에 다니며, 기도하며, 진정한 자녀 교육에 늘 관심가지는 데,
그저 내 자녀가 장래에 돈 잘 벌고, 자기 앞가림 잘 하는 수준에 머무르면 안 된다.
우리 자녀를, 바울처럼, 하나님의 인도에 예민하게 순종하는 인물로 길러야 한다.
우리 자녀를, 바울처럼, 주님이 주신 사명에 따라 사는 인물로 양육해야 한다.
(비록 돈을 좀 많이 못 벌더라도...)
우리 자녀가 바울처럼 사명에 따라 사는 것... 힘들지 않겠나?
그렇지 않다.
신명기에, 모든 계명은 네 행복을 위해 주셨다고 했다. 신10:13
신약도 주님의 멍에를 지고 갈 때, 오히려 그 짐이 쉽고 가볍다고 하셨다. 마11:30
거기에 큰 기쁨을 주신다고 약속하셨다.
돈 많이 벌고 출세하는 것보다 더 큰 기쁨과 영광이다.
물론 자녀들이 건강하게 자라고, 좋은 대학, 좋은 직장... 좋은 복들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복은
주님의 사명을 따라 사는 인물로 양육해야 한다.
그런 자녀들을 양육하는 부모들이 되시기 바란다.
예를 들면, 이용규 몽골선교사는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 하버드 대학교 박사가 되어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몽골선교사로 갔고,
거기서 무슨 돈벌이도 안 되는 대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
만약 그의 부모가 예수 안 믿으면, 울화병으로 돌아가셨을 것이다.
사명을 따라 사는 사람에게 돈을 안 주실 수도 있다.
바울도, 베드로도 큰 돈 받지 않았다.
내 자녀를 무조건 돈 잘 벌고, 잘 되게 키우는 것보다
주님의 사명을 감당하는 자녀로 키우시는
놀라운 믿음의 부모들이 되시기 바란다.
<2007년 5월 가정의 달에, ‘자녀 양육’에 관한 세 분 목사님의 설교를 편집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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