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에 가장 큰 표적 마22:11~14
혼란스럽고 뒤죽박죽인 삶을 수 년 동안 계속 살다보면,
실패를 통한 교훈이랄까? 한 가지 교훈을 배우게 되는데...
▲내게도 하나님의 손길, 표적... 반드시 있다.
하나님의 자녀로 자처하는 내가,
하나님이 자기 자녀에게 주신 약속이나, 하나님이 직접 행하시는 증거들을
과거와는 다른 좀 새롭고 신선한 방식들로 좀 보여주십사고,
즉, 내게도 ‘표적’ 좀 보여주십사고 기도하게 된다.
그렇다. 하나님은 우리의 이런 간구에
확실히 ‘표적’으로 응답해 주시는데.... (표적 : signs & wonders)
▲표적1.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나는 그런 ‘표적’이
실제로 내 일상 속에 나타나도, 그것을 쉽게 깨닫지 못한다.
오직 그런 ‘표적’으로 머리를 한 대 세게 얻어맞고 내가 고꾸라지면,
그제야 비로소 하나님의 간섭하시는 손길, 즉 표적이
내게 나타나고 있음을 깨닫는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 충성스럽게 섬기는 나를,
못살게 굴고 괴롭히는 사람이 있으면,
‘주님이여, 저런 못된 나의 대적들에게 본 떼를 보여주시고
나를 구해주소서!’ 간구하게 되는데,
사실 그런 기도는 잘 응답되지 않는다.
대신에
‘나도 (저 대적처럼) 다른 제 삼자들에게 못되게 구는 대적이 될 수 있겠구나..!’
라는, 그런 나의 잘못과 실수를 깨닫고 고치게 해 주신다.
이것이야말로 내 삶에 신선하게 일어나는 ‘표적’ 이요,
하나님이 내 삶을 직접 간섭하신다는 증거다.
▲표적2
우리가 마음을 겸허하게 열고 성찰하면,
바로 그런 내 실수와 허물을 계기로 삼아
주님은 나를 ‘내 중심주의’에서 구원하시고,
앞으로 하나님의 인도를 철저히 받아 살고자 하는 사람으로 변화시켜 주신다.
이것 또한 내 삶에 나타난 놀라운 ‘표적’이다.
▲믿음의 사람의 증거 - 전투적이지 않다.
진짜 믿음 좋은 사람의 증거는,
다른 이웃과의 관계에 있어서 항상 겸손한 자세를 보여주는 것이며,
특히 자기 원수들에 대해서도 같은 자세를 가지는 것이다.
즉, 자기중심적이지 않으며 전투적이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최고의 믿음으로 사는 길임을 예수님이 가르쳐주셨다.
진짜 믿음 좋은 사람은
‘내가 믿음 좋고 충성했으니까 나를 인정해 주시고, 높여주시오!
내 원수들은 망하게 해주시오!’
라고 기도로 요구하지 않는다.
자기를 돌아보고, 자기를 낮출 뿐이다.
▲비록 타고난 인격자가 아니더라도...
물론 내가 원수 앞에서까지 그렇게 진정 겸손하게 살기란 인간인지라 어렵다.
또한 나는 스스로 그렇게 타고난 인격자가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계속 시도한다는 keep trying 뜻이다.★
성경에 보면, ‘믿음의 사람, 믿음의 조상’이란,
날 때부터 믿음이 좋아서 된 사람이 아니다.
많은 결점과 허물이 있었지만, ‘시도하고 또 시도했던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오랜 세월의 다듬는 기간을 거친 후에야 비로소
하나님의 형상, 믿음의 조상으로 변모될 수 있었다.
▲오늘도 주님이 내게 보여주시는 표적
오늘도 하나님은 잠자고 계신 분이 아니라,
살아계셔서 나에게 직접 역사해 주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그 살아계신 증거를 보여 달라고 기도로 간구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응답하셔서 표적을 보여주시는데,
내게 ‘가장 큰 표적, 가장 큰 기적 중에 기적’은
내 미성숙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또다시 시도하게 하신다! ★
내 원수를 멸해 주시는 것이나,
내가 기적처럼 문제와 딜레마에서 벗어나는 것보다,
하나님은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 인격적으로 성숙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또 시도하고 또 다시 시도하라고...
내가 겪는 반복적인 시련에는 이런 목적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 중요한 것은,
나와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이다.
그것은 지상에서 시작해서 영원토록 계속되는 것이다.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맺으려면,
우리의 인격이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야 한다.
(‘하나님의 인격과 형상을 닮는 것’이, 왜 그리 중요한지는... 앞으로 풀어야 할 과제임)
(아래 글 편역)
Over the years of muddling through life,
I’ve learned that when we the faithful servants of God
call on God to reveal the power of God’s promises in new ways,
it is really up to us to look for those signs and wonders
in new ways.
But most of the time, we stumble around until we are hit over
the head with them.
I’ve also learned that the reward we need to seek for
our faithfulness to God is not so much deliverance from our enemies,
but deliverance from the way we make enemies of other people.
Despite our human errors, or rather, because of them,
God rescues us from ourselves and rewards us
with new signs and wonders of God’s leadership
if we are open to them.
God is so compassionate and kind,
forgiving the sins of our loss of hope.
It is this light of God’s mercy that we must accept and praise.
Jesus teaches us that the best way we can live
in the light and life of God’s kindness toward us is
to not ask for recognition and glory for our faith,
but to demonstrate it by assuming a humble position in our relationships
with others, even those who are our enemies.
Most of the time, we are not very good at that.
But to live in faith means to keep trying.
And if we look for evidence that God is with us in this struggle,
the Bible is full of stories of flawed human beings
who let God lead them in the way of justice and hope.
Over the years, I’ve learned that is still true, even for me.
I pray today and always that all of us as God’s people
will look for new signs and new wonders of God’s mercies
and that will allow ourselves to be led to see them. by Barbara Dilly
◑도도하면 안 됨!
예수님이 복음서에서 반복적으로 가르치신 것은,
천국에 들어가는 자는,
부자(청년, 관원), 출세한 자(바리세인), 성공한 자... 이런 사람보다는
가난한 자, 겸손한 자, 자기를 부인하는 자, 자기를 낮추는 자들이다.
이런 사람들이 복되며,
천국이 그런 사람들의 것이라고 하셨다.
물론 부자, 출세한 분, 성공한 분도 다 천국에 갈 수 있고, 가야 하지만,
유혹과 걸림돌이 그만큼 많고,
가난하고 겸손해지기가 그만큼 상대적으로 힘든 것은 사실이다.
같은 맥락으로 천국잔치의 비유를 이해해 보자. 마22:11~14
임금은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에게 노하시는데... 이해가 퍼뜩 되지 않는다.
초대해 놓고, 그래서 초대받아 왔는데, 왜 임금은 그에게 화를 내시는가?
초대를 받았지만, 잔치에 안 온 사람에게 화를 내야 되지 않는가?
비록 예복은 안 입었더라도, 잔치에 왔으면... 잘 한 것 아닌가?
그 자리까지 온 사람을 ‘내 쫓아버린 것’은 더욱이 이해하기 어렵다. 마22:13
천국이 ‘옷이 날개’인 문화권일 리가 없는데도 말이다.
천국 잔치에 옷을 잘 입어야 들어갈 수 있다는 말씀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이 질문에, 소설가 박완서 씨가 재미있는 예를 들어 해석하고 있다.
(다른 신학적 답변은 주석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아는 어떤 노총각이 있는데,
그는 인물도 좋고, 학벌도 좋고, 직장도 좋고,
굳이 딸리는 부분을 찾기 어려운데도,
노총각이 되도록... 결혼도 못하고, 아직 연애 경험도 없다고 한다.
무슨 연유일까?
자기가 결혼하기 싫은 것도 아니고,
결혼을 원하는데도 성사의 조짐은커녕,
여자만 만나면, 번번이 딱지를 맞는다고 한다.
그 이유는 의외로 간단했다.
그는 자기가, 여성들이 원하는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다는 걸 과신한 나머지,
옷차림에도 아무런 신경도 안 쓰고
표정과 자세도 자기 편한대로
나가서 만나는 버릇이 있음이 바로 그 이유였다.
그것은 소탈함의 차원을 넘어서
자기 도도함과 교만과 허세로 비춰졌다.
그런 남자를 누가 좋아하겠는가? 딱지 맞아 싸지!
예수님이 천국에서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을 쫓아내신 것도
여기서 예복이란, ‘초대받은 손님으로서의 최소한의 예절’을 뜻한다고 본다.
<박완서 묵상집, 「옳고도 아름다운 당신」pp.128~130.
그렇다. 교만한 사람, 도도한 사람은, 천국에 가도 도로 내어 쫓길 것이다.
‘자기 의’의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은, 자기가 괜찮다는 사람은...
아무리 스스로 깨끗해도
그것이 예수님이 입혀주시는 ‘흰 옷’은 아닌 것이다.
(아마 그는 주인이 주신 예복을, 잔치 도중에, 스스로 벗어던진 것으로 보인다)
더 나아가 천국잔치 자리까지 와서도
자기 옆에 있는 이웃을 끊임없이 고소하고 벌 내려 달라고 탄원하는 도도한 사람은,
천국에 오기도 힘들었겠지만, 어렵사리 왔더라도,
그 예복을 입지 않아서 내어쫓김을 당할 것이다.
내 평소 삶에 겸손과 자기 낮춤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가르쳐주는 예화이다.
그렇게 살라고, 주님은 ‘표적’으로 오늘날 내 머리를 때리시며 가르쳐주시는데,
나는 ‘믿음 좋은 나를 훼방하는 저 원수를 멸하여 주소서!’ 하며
하소연만 하고 있으면 안 된다... <위 책을 축약, 정리 ▣ 크리스천 인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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