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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화과나무를 마르게 하신 이유

LNCK 2007. 5. 31. 22:47

 

◈무화과나무를 마르게 하신 이유            막11:11~25      가톨릭자료번역  

 

무화과는 냄새가 향기로워, 멀리서도 향기만 맡으면

눈에 보이지는 않아도 그 나무가 근처에 있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그 감미로운 향기처럼, 열매도 역시 매우 달고 맛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무도 무화과나무를 훼손하지 않고 귀히 여기는데,

존경 받는 예수님이 그 나무를 훼손하신 이유는...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

 

성경 예언의 특징은, 마치 메아리처럼 예언을 재차 반복해서 들려주시며,

그래서 어떤 말씀이나 예언을 시대를 지나서도 다시 재확인하게끔 해 주신다.

 

무화과나무를 마르게 하신 예수님의 행적은

그저 화가 나셔서 순간적으로 분풀이 하신 것이 아니라,

구약의 예언을 되울림(에코)하시면서, 어떤 예언적 메시지를 주시기 위함이다.

 

▲1. 예레미야의 시대와 같다는 의미

무화과나무가 말라버린 것은,

구약의 예레미야, 하박국, 요엘 선지서를 통해 해석하면,

예수님 당시 패역한 이스라엘의 멸망을 예고하신다는 뜻이다.

 

내가 그들을 완전히 망하게 하겠다. 나 여호와의 말이다.

내가 열매를 따려고 하는데도

포도밭에는 포도가 없을 것이며, 무화과나무에는 무화과가 없을 것이며,

잎사귀도 말라 죽을 것이다. 내가 그들에게 준 것을 빼앗아 갈 것이다  렘8:13

 

예수님이 무화과나무를 마르게 하신 것은, 예언적 행동 prophetic deed 인데,

사람들은 지금 예수님의 행적을 보고, 렘8:13절을 떠올렸을 것이다.

 

즉, 예레미야가 열매 없는 무화과를 통해 이스라엘의 멸망을 예고한 것처럼,

예수님도 열매 없는 무화과를 통해 지금 이스라엘의 멸망을 예고하신 것이다.

 

▲2. 말라버린 무화과는 말라버린 사람들의 마음을 의미

무화과나무를 마르게 하신 예수님의 행적이 더 중대한 의미를 띠는 것은,

특별히 주님이 성전으로 가시는 도중에,

그러니까 성전에서 사고 파는 장사치들을 쫓아내러 가시는 길에서

어떤 ‘예언적 행위’를 나타내 보여주셨다는 타이밍을 눈여겨봐야 한다.

 

그 장사치들이 성전에서 벌인 착취 행태는,

당시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언약을 지키지 않았다는 명백한 증거가 된다. 

 

그런 부패한 자들과 그런 관행을 묵인했던 사람들은

마치 말라 버린 무화과나무요, 바짝 말라버린 마음상태인 것을...

예수님이 예언하신 것이다.

 

▲3. 만민이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는 의미

성전을 청결케 하신 것 역시, 예언자적 행동prophetic deed이다.

예수님은 성전을 청결케 하시면서 이사야서를 인용하셨는데,

 

내가 (언약을 굳게 지키는) 그들을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이는 내 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사56:7

 

그 외에도 ‘강도의 소굴’ 이라는 예레미야7:11절을 인용하셨는데,

이것은 당시 시대가 이사야와 예레미야가 탄식하던 그 탄식과 같으며,

곧 당시 시대가 이사야와 예레미야의 타락한 시대와 같다는 점을

구약성경을 에코우 하시면서 말씀하신 것이다.

 

물론 예수님도, 이 시점에서는, 이사야나 예레미야와 같은

엄한 예언자적인 모습을 보여주시고 계신다.

지켜보던 사람들은, 그 옛날 권위 있던 예언자를 상상했을 것이다.

 

▲예수님의 대안

그 다음날 아침, 말라버린 무화과나무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 나무는 뿌리째 아예 전부 말라 있었다.

 

무화과나무는 이렇게 질문할 수도 있겠다.

‘이렇게 성전이 타락했다면, 예수님 당신은 지금 무슨 대안이 있습니까?’

 

예수님은, 말라버린 무화과나무 앞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나님을 믿으라! Have faith in God, 막11:22

 

예수님은 ‘성전제도에 관해’ 가타부타 하지 않으시고,

대신에 ‘하나님에 대해’ 말씀하셨다.

이어지는 말씀은,

누구든지 믿고 의심치 않으면, 이 산이 저리로 옮겨지리라고 말씀하셨다. 막11:23

 

‘산을 옮긴다’는 표현은, 유대 문화에서 ‘어려운 문제를 푼다’는 뜻이다.

당시 매우 어려운 난제를 해결한 현자를 일컬어 ‘산을 옮긴 사람’으로 칭송했다.

 

제자들은, 자기들 힘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성전 정화)

그렇다고 하나님의 능력까지 의심해서는 당연히 안 될 일이었다.

 

너희가 기도하며 청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이미 받은 줄로 믿어라.

그러면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막11:24

 

구약 예언을 한 구절 더 에코우(메아리 울림) 하면서 이 글을 마친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라 합3:17~19   (이 단락, 아래 영문 편역)

 

 

You smell a fig tree before you see it.  The scent is as delicious as the fruit itself. 

Why would anyone destroy a fig tree?  Above all, why would Jesus? 

 

The Scriptures are full of echoes and cross-references.  Not only the words but the deeds of Jesus have resonances that are difficult for us, at this distance, to hear.  In the present case, the echoes are in the writings of the prophets Jeremiah, Habakkuk, and Joel.  The withering of a fig tree symbolized for them the desolation of Israel because of her unfaithfulness to God.  “When I wanted to gather them, says the Lord, there are no grapes on the vine, nor figs on the fig tree; even the leaves are withered.” (Jeremiah 8:13).  So when Jesus made the fig tree to wither, this was a prophetic deed, with the same meaning as in Jeremiah and the other prophets. 

 

The deed was all the more significant because he was on his way to the Temple, where he would drive out the buyers and sellers.  Their exploitative practices were a clear instance of unfaithfulness to the covenant.  These people, and the custom that authorized them, were the withered fig tree, the withered heart. 

 

His cleansing of the Temple was also a prophetic deed.  He quoted Isaiah as its meaning:  “[Those who] hold fast my covenant: these I will bring to my holy mountain, and make them joyful in my house of prayer… for my house shall be called a house of prayer for all peoples” (Isaiah 56:7).  Instead, he said, it had been turned into “a den of robbers” (Jeremiah 7:11). 

 

In both of these incidents Jesus is acting like the prophets of old, standing in line with them, and quoting their words.

 

Next day, the withered fig tree is still standing there.  “In the morning as they passed by, they saw the fig tree withered away to its roots.”  The fig tree, in its way, was asking a question: what do you do when you are living at a time when the institutions are corrupt?  “Have faith in God,” Jesus said  -  not in the institutions.  It seems impossible, but you will be able the move mountains, he said.  The expression “to move mountains” was a common Jewish expression for removing difficulties.  A wise teacher who could solve difficulties was called a “mountain mover”. 

 

The disciples should not measure the difficulties against their own puny strength but against the strength of God.  And finally, a wonderful echo: “For even though the fig does not blossom, nor fruit grow on the vine; even though the olive crop fail, and fields produce no harvest; even though flocks vanish from the folds and stalls stand empty of cattle  -  yet I will rejoice in the Lord and exult in God my saviour.  The Lord my God is my strength.  He makes me leap like the deer, he guides me to the high places.” (Habakkuk 3:2-4, 13, 15-19).

 

◑무관심이... 망친다            막11:11~25               설교 2편 조합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펀 글)

옛날 중국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에 첩자를 보내 살펴보고 오라고 했습니다.

얼마 후 돌아온 첩자가 은나라는 혼란에 빠져있다고 했습니다.

무왕이 어느 정도로 혼란해져 있는가 하고 물었습니다.

 

①“사악한 자들이 충성스러운 자들을 억압하고 판을 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왕은 그 말을 듣고 “망하기에는 아직 멀었다”라고 했습니다.

 

그런지 얼마 후 또다시 은나라를 염탐하고 돌아온 첩자가 무왕에게 보고하기를

혼란이 극에 달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번에는 어느 정도인가 하고 무왕이 물었습니다.

 

②그러자 첩자는, “지혜롭고 덕 있는 사람들이 나라를 버리고 있습니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무왕이 “아직 멀었다”라고 말했습니다.

 

세 번째로 갔다 오더니 첩자는 망국의 조짐이 완연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왕이 “뭘 보고 그러느냐?”라고 물으니

③첩자는 “백성이 아무 불평도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고 답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무왕은 군사를 보냈습니다.

겨우 3천명밖에 안되는 병력을 보냈는데도

별다른 저항도 받지 않고 손쉽게 은나라 왕을 사로잡았습니다.

 

아무도 관심이 없고 무관심할 때, 그 단체, 그 나라는 망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무관심할 때 망한다.

사회든, 단체든, 삶이든, 고여 있는 것을 생각 않고 무관심해지면

자연히 망하게 됩니다.

바꾸어 말해서 그냥 젖어 흘러가는 데로 두고 무관심해질 때

변화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변화가 없으면 발전이란 없고 퇴보하거나 망할 수 있습니다.

 

*나라를 망하게 하는 제일 좋은 방법이 무엇일까요?

분란을 일으키고 잘못된 일을 하면 잘 망할까요?

그보다 더 좋은 방법은 어떻게 돌아가든 무관심한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가정을 망치는 제일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요?

안 좋은 짓만 골라서 하는 것일까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식이 서로에게 관심이 없으면 자연스레 망하게 됩니다.

 

*농사를 망치는 데 제일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요? 잡초를 뿌리면 될까요?

아니면 병을 옮길까요? 아닙니다.

그냥 가만 놔두고 관심을 안가지면 제대로 망쳐 버립니다.

 

*자기 삶을 망치는 제일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요?

안 좋은 일만 골라서 하는 것? 아닙니다.

잘못 된 것이 있으면 변화되어야 하는데도

그냥 거기에 젖어서 무관심하게 대충 사는 것...

그러면 자연스럽게 망칩니다.

 

*교회를 망하게 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사사건건 반대하고 분열을 일으키면 될까요?

굳이 그럴 필요 없습니다.

그냥 되는대로 흘러가고 대충 주일예배나 때우고

대충 지켜야 할 것만 지키는 것으로 무관심하게 내버려두면 알아서 망합니다.

 

▲물론 변하지 않아야 할 것도 있습니다.

의지하고 살 변하지 않는 무엇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이나 정, 신뢰나 혹은 상식, 예의 등등입니다.

 

하지만 변해야 할 것도 있습니다. 잘못되고 고여서 바뀌어야 하는 것입니다.

참된 삶이란 이 두 가지를 균형 있게 유지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조화를 이루어서 서로를 이끌면서 살아갈 때 삶이 충만해집니다.

 

안정에 집착해서 변화를 거부하고 틀에 박힌 생활만 한다면 그것은 죽은 삶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아무런 바탕과 근본적인 것이 없이 바람이 부는 대로,

흘러가는 대로 생활한다면 아무 중심이 없이 막 살아가는 인생이 됩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인에게 있어서 믿음이란 변하지 않는 가장 확고한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그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께서 사랑과 자비에 있어 바위와 요새처럼

변함없으신 분이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큰 위안이 됩니다.

 

하지만 신앙의 삶이란 근본적인 것과 변화해 가는 것,

이 두 가지가 조화를 이루어야만 참된 것이 아닐까합니다.

 

매너리즘에서 벗어나시라

오늘 이야기는 주님께서 분노하여 성전의 상인들을 내쫓으시면서 벌어지는

성전정화 사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행동은 단지 성전이라는 장소를 깨끗하게 만드는 일이 아닙니다.

거룩한 성전이라는 곳 답게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팔지 못하도록

장소를 정화시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성전을 통해 하나님을 흠모하는 일에,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신앙의 삶에 대해

올바로 생각하고 참된 관심을 가지라고

사람들 마음에 변화를 주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기 위해 제물을 바치고

그 제물을 성전에서 파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고 편리한 일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진정 중요한 것을 잊어버리고 그릇된 것을 당연히 반복하고

계속 무관심하게 흘러가는 신앙의 모습에 대해 변화를 요구하십니다.

 

구태의연하게 지켜야할 주일예배와 의무적으로 바쳐야 할 기도 등이

신앙의 전부인양 생각한다면 오산입니다.

그저 소와 양이나 비둘기를 바치는 게 전부라고 생각하는 유대인들처럼

그게 전부라고 생각하고 신앙생활을 한다면

내 삶에 변화란, 바뀌는 것이란 없습니다.

 

예수님이 나의 삶에서 변화되기를 바라시는 부분,

나의 삶과 신앙에서 내가 제대로 관심을 가지기를 원하시는 부분이 무엇인지

오늘 한번쯤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인터넷 설교문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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