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과 아버지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고전4:14~16
▲‘가르치는 자’(스승)를 넘어서 ‘본을 보이는 자’(아버지)로!
기독교의 핵심 교리를 정리한 자는 사도 바울입니다.
그는 지성적으로 뛰어났을 뿐 아니라
당대 최고의 종교 지도자 아래에서 체계적으로 훈련을 받아
율법 안에서 철저하게 경건했던 유대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열심에서도 어느 누구에게 뒤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십자가 복음 밖에서 자기가 가르침 받은 대로만 따라 하려 했습니다.
자기 생각에 하나님을 모독하고 있는 기독교인들을 핍박하려고
다메섹까지 가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거듭나는 체험을 했습니다.
그 후 유대교 최고의 열성 신자가 복음의 최고 열혈 전도자로 바뀌었습니다.
곳곳에 교회를 세워 복음을 가르쳤고
신약성경의 교리에 관한 부분을 거의 혼자서 정리하다시피 했습니다.
그도 제자를 둔 스승의 위치에 오른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 즉 제자들을 향해 권하는 말이 이상합니다.
“내가 가르친 대로 잘 따르라”고 하지 않고.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했습니다.
유대교의 최고 스승 자리에 오를 뻔하다가 기독교 최고의 스승이 되어
그 교리를 정연하게 확립했던 자와는 뭔가 어울리지 않는 권면이지 않습니까?
복음은 지성적 가르침과 종교적 훈련으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기독교는 교리를 배워 따른다고 구원을 얻지 못합니다.
따라서 기독교의 스승, 즉 목사는 복음을 가르치는 자가 아니라,
복음 안에서 자기부터 본을 보여 제자들로 그대로 닮게 만들어야 합니다.
바꿔 말해 목사는 강대상에서 설교한 대로의 삶으로써 복음을 가르쳐야 합니다.
▲폴 워커 목사는 자기의 구원 경험을 이렇게 간증했습니다.
“자라는 동안 많은 주일학교 선생님들의 가르침을 받았는데
오직 한 분만이 나의 기억 속에 두드러지게 남아 있다.
해병대 출신으로 몸집이 크고 얼굴이 붉었던 그 분은
아마도 좋은 교수 방법이나 규칙은 하나도 따르지 않았던 것 같다.
내가 그 선생님에게 가장 잘 기억하는 것은
그가 우리들을 매우 사랑해 주셨다는 것이다.
수업이 끝날 때마다 잠시 무릎 꿇고 하나님께 기도하자면서
그 큰 팔로 우리 모두를 끌어안으려 하면서
이름을 하나씩 불러가며 기도해 주었다.
그중 나를 포함해 일곱 명이 목회자가 되었다.”
제자들이 스승인 주일학교 선생의 본을 너무 닮다 보니
무려 일곱 명이, 아마 그 반 전체가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폴 워커 목사의 스승은, 단순히 가르치는데 그치는 스승이 아닌,
학생들을 사랑으로 품는 아버지로서의 본을 잘 보여주었습니다.
▲스승과 아버지의 차이
바울은, 목자는 “스승 같은 목자”와 “아버지 같은 목자” 두 가지 타입이 있는데
후자는 찾기 힘들다고 말합니다.
스승 목자는 가르치기만 하고,
아버지 목자는 가르치지 않고 사랑만 베푸는 자입니까?
아닙니다.
스승은, 학생보다는 가르치는 것 자체를 더 사랑하고,
아버지는, 가르치는 것보다는 학생 본인을 더 사랑한다는 의미입니다.
정확하게는 스승은 가르쳐서 제자를 변화시키려 하고,
아버지는 사랑하여서 제자를 변화시키려 하는 차이입니다.
▲‘아버지’가 사람을 변화시킨다. ‘스승’만으로는 안 된다.
초대교회 신자는 예수님의 본을 받아 아무 주저나 불평 없이 십자가를 지고
이웃을 사랑했습니다. 예수가 복음 안에서 그들을 낳았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제자들을 먼저 변화시켰고
그 후 변화된 제자들은 그분 가르침대로 따랐습니다.
그들은 스승을 본받아,
복음을 모르는 자들의 영혼이 거듭나도록 죽기까지 힘썼습니다.
▲스승은 교리를, 아버지는 사랑을 앞세웁니다.
스승은, 제자가 지식이 진보되기를,
아버지는, 제자의 존재 전체가 변화되기를 소원합니다.
스승 목자는 자기 가르친 대로 제일 잘 따르는 제자를 가장 사랑합니다.
아버지는 자기를 그대로 쏙 빼닮은 제자를 가장 사랑합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는 복음으로 고린도 교인들을 낳았고,
그들에게 본을 보이면서 그들을 길렀습니다.
그의 목표는 애초부터 스승에 있지 않고 아버지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고린도 교인들이 그런 자기를 본 받아,
스승을 넘어서, 아버지가 될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가르치는 것을 넘어서, 끌어안아 주는 것
완벽한 커리큘럼 코스를 짜서 가르치고,
찬양과 기도로 감정을 고양시키며,
심리학적인 치유법을 동원한다고 해서,
사단에게 묶여 있는 영혼이 새롭게 되지 않습니다.
천하의 죄인이라도 복음을 가르치는데 그치지 말고, 복음으로 끌어안아 주어야만 합니다.
작금 목사들이 십자가 사랑을 실천하는 모습은커녕
강단에서 그 십자가의 메시지마저 차츰 사라지고 있으니
오늘날도 분명 일만 스승은 있으되, 아버지는 너무 찾기 힘들어진 것은 아닐까요?
<박신 목사님의 칼럼 편집.
*원문 보기 : http://www.nosuchjesus.com 8/10/2007 *원제목 : 참된 목사가 너무 없다.
[후기] 솔로몬의 명 판결에서 보듯이,
진짜 아기 엄마는, 아기를 어떻게 해서든지 살리는 사람이고,
가짜 아기 엄마는, 아기를 서슴없이 죽이는 사람입니다.
진짜 아기 엄마는, 자기가 고통(아기 뺏김)을 당하면서라도 아기를 살립니다.
'살리는 사람', 진짜 부모가 됩시다.
[주제별 분류] 리더십, 지도자 http://blog.daum.net/bible3/12542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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