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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본능과 무관심

LNCK 2007. 10. 1. 21:02

 

 

 

◈선한 본능과 무관심                  모두 펀 글

 

네 아우 소돔의 죄는 다음과 같다. 소돔과 그의 딸들은 거만하였다.

많이 먹어서 살찌고 평안했지만 다른 사람들에 대해선 무관심했다.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돕지 않았다.  겔16 :49 

 

 

◑사람의 선한 본능

 

늙은 도사가 갠지스 강가에 앉아서 시를 암송하고 있었다.

그때 강가 나무 위에 있던 전갈 한 마리가 강물에 빠져 버렸다.

전갈이 물에 빠져 허우적대자, 도사는 전갈을 건져서 나무 위에 도로 올려놓았다.

 

그러나 전갈은 괘씸하게도 자신을 구해 준 도사의 손을 물어 버렸다.

도사는 개의치 않고, 다시 강가에 앉아서 시를 암송했다.

 

얼마 후 전갈이 다시 나무에서 떨어져 강물에 빠졌다.

도사는 다시 허우적거리는 전갈을 건져서 나뭇가지에 올려 주었는데

전갈은 또 도사의 손을 깨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전갈이 또다시 강물에 떨어졌고,

도사는 물에 빠진 전갈을 건져 나무에 올려 주었다.

이번에도 전갈은 은인의 손을 깨물었다.

 

그때 마침 마을 사람이 물을 길러 왔다가 우연히 그 광경을 보았다.

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도사 곁으로 다가갔다.

 

'도사께서 저 배은망덕한 전갈을 여러 번 구해 주시는 걸 보았습니다.

그런데도 전갈은 매번 도사를 깨물더군요.

저 못된 걸 죽도록 내버려 두지, 왜 구해주십니까?'

 

그러자 도사는 그 사람을 돌아보며 말했다.

'보시오. 저 전갈도 어쩔 수 없는 거라오. 깨무는 게 전갈의 본성이니까요.'

 

'저도 그건 압니다. 하지만 그걸 알면서 도사는 왜 전갈을 피하지 않습니까?'

 

'나도 어쩔 수가 없다오. 나는 사람이고,

목숨을 구해 주는 것이 사람의 본성이 아니겠소?'

<이옥순, '인생은 어떻게 역전 되는가' 중에서

  

▲누군가의 덕분에 살아갑니다.

우리의 삶이라는 게 결국은 누군가의 덕분에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한 사람은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요4:37)는 말씀처럼,

우리는 다른 사람이 노력한 것을 누리며 삽니다.

 

의식주 어느 것 하나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는 우리들 아닙니까?

'아, 인생은 고마움이구나!' 이 깨달음을 얻으면 인생이 달라집니다.

 

노동자는 사용자가 고맙고, 사용자는 노동자가 고맙습니다.

스승은 제자가 고맙고, 제자는 스승이 고맙습니다.

고마움을 아는 사람은 함부로 살 수 없습니다.

 

내 인생이 소중한 것은 물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해주시기 때문이지만,

그것 말고도 또한 나의 생명이라는 게

누군가의 사랑과 정성과 희생으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깨달으면, 나도 누군가를 위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혹자는 낙엽을 쓸면서도,

자기가 지구 한 모퉁이를 깨끗게 한다는 마음으로 씁니다.

 

▲사랑의 확대

사람은 본능적으로 사랑할 대상을 찾으며 살아가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작은 사람은 작은 사랑에 만족하고, 큰 사람은 더 큰 사랑을 추구합니다.

 

사람은 처음에 누구나 부모, 아내, 자식을 사랑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그러나 성장해 가면서, 가족에서 → 점차 이웃으로, → 민족 사랑으로,

→ 인류를 사랑하는 방식으로 점점 확대해 갑니다.

 

지금 나의 사랑의 크기는 어느 정도 입니까?

18평, 자기 집 크기밖에 안 되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 사랑의 대상이 점점 확대되어 갑니다. 기도의 대상이 점점 확대되어 갑니다. 

 

◑사람의 선한 본능이 감춰진 이유 - 무관심 때문

 

▲무관심

어느 추운 겨울 날, 아주 어린 소녀 한 명이

얇은 옷만 입고서 추위에 떨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앞으로는 예쁘고 화사한 옷을 입은 또 다른 소녀가

아빠의 손을 잡고 행복한 표정을 지으면서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대조적인 모습이 한 장면으로 펼쳐지는 것을 본 어떤 청년이

화가 치밀어서 하늘을 바라보면서 주님께 따집니다.

 

“주님, 당신은 왜 이렇게도 불공평하십니까?

한 소녀는 저렇게 행복을 느끼며 살도록 하면서,

왜 저 불쌍한 소녀에게는 아무런 관심도 주시지 않습니까?

저 소녀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왜 아무런 대책을 세우시지 않습니까?”

 

바로 그 순간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느냐? 나는 분명히 대책을 세웠다.

그래서 너를 그 시간에 보내어 네 눈에 소녀를 보게끔 한 것이 아니냐?

그런데 너는 과연 무엇을 했느냐?”

 

주님께서는 결코 불공평하신 분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안배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는 내가 '불공평한 주님'으로 만들고 있을 뿐이지요.

그것은 바로 나의 <무관심>때문입니다.

  

▲무관심의 죄

‘부자와 나사로 비유’에 나오는 부자는,

단순히 부자라는 이유만으로 뜨거운 불길 속에서 고초를 받은 것은 아닙니다.

바로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자리에서 실천하지 않는,

즉 내 이웃에 대한 무관심 때문이었습니다.

 

마태25장에 나오는,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염소 편에 속한 사람들의 잘못 역시,

무슨 큰 죄를 지었다기 보다... 

‘무관심의 죄’였습니다.

 

오늘날 나의 무관심 때문에,

나의 선한 본성, 하나님의 형상들이 모두 가려져 있지는 않나요?

오늘 내가 관심을 갖고 기도하는 사람의 이름은, 모두 몇 명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