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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2007

908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

LNCK 2007. 10. 6. 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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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   헨리 나우웬/김명희 역/IVP   마3:16~17

                                                                                                                    *출처

심오한 내용이므로, 정독하시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Short Summary

이 책은 크게 '사랑받는 자가 되다',

'사랑받는 자가 되어 가다',

'사랑받는 자로 살아가다'의 세 부분으로 나누어

'사랑받는 자'라는 단어를 키워드로 써 내려갔다.


이것은 예수님이 3년간의 이 땅에서의 사역을 하시기 직전에 요한의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에서 들려왔던 음성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를 모티브로 했다.


예수님의 사역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하면서

우리도 동일하게 들어야 할 하나님으로부터의 음성은 사랑받는 자가 되었다는 것이라고

헨리 나우웬은 말한다.



◑머리말 - 우정이 시작되다


이 책은 오랜 우정의 열매이다.

10여 년 전 예일 신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을 때였다.

한 청년이 뉴욕 타임즈에 들어갈 기사를 쓰기 위해 나를 인터뷰하러

사무실로 찾아왔다.

30분가량 우리 둘 다 별 관심이 없는 질문과 응답이 오가고 인터뷰는 끝났다.


그가 막 노트를 가방에 넣고 의례적으로 “감사합니다.”라고 했을 때,

나는 그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어때요, 하는 일이 마음에 듭니까?”

놀랍게도 그는 별 생각 없이 대답했다. “아뇨, 그저 직업이니까요.”

“싫다면 왜 그 일을 하죠?”

“물론 돈 때문이죠.”


문득 나는 그가 자신의 꿈을 포기하기 직전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마치 원하지도 않는 일을 하도록 강요하는

'사회'라는 쇠창살 속에 갇혀 있는 죄수 같았다.

나는 그를 바라보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깊은 연민과 사랑을 느꼈다.


그의 예리함, 자신에 대한 솔직함, 사심 없이 나를 믿어 주는 것을 볼 때

우리의 만남은 우연이 아님을 알았다.

우리 사이에 일어났던 일은, 예수님이 부자 청년을 보시고

‘사랑으로 가득하셨을(막 10:21)' 때 일어났던 일과 아주 흡사한 것 같았다.


나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그를 억눌린 상태에서 풀어 주고,

그가 자신의 가슴속 깊은 욕구를 성취할 방법을 발견하도록

돕고 싶은 열망이 강하게 용솟음침을 느꼈다.


몇 달 후 프레드는 나의 권유에 따라 예일 신학교로 왔고,

소설을 쓰기 위해 애쓰면서 일 년을 보냈다.

우리는 친한 친구가 되었고, 여러 해가 지난 오늘날 나는 그 우정의 결과로

이 책을 쓰고 있다.


우정이 시작될 때부터 우리는 서로의 종교적 배경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프레드는 나를 가톨릭 사제로 존경했고,

반면 나는 그의 세속적 유대교를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둘 다 나이가 들고 성공, 경력, 명성, 돈, 시간에 대한 관심이 사라지자,

우리 관계의 중심에는 의미와 목적의 문제가 자리 잡게 되었다.

차이점은 별로 중요하지 않게 되었고, 유사점은 더 분명해졌다.

우정이 깊어지고 견고해짐에 따라, 영적으로 같은 기반을 갖고자 하는 열망은

더욱 뚜렷해졌다.


유태인인 그는, 명백히 기독교적인 용어나 오랜 교회 생활에 근거를 둔 말로는

위로나 도움을 전혀 얻을 수 없었다.


프레드의 친구들을 알게 되고 점차 그들의 흥미와 관심에 공감하게 됨에 따라,

나는 세속화된 사회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영성에 대해 말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그의 말을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

내가 그와 그의 친구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영성에 대해 무언가를 말해야

한다는 그의 말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교수님이 뭔가 하셔야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프레드는 계속해서 말했다.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가장 깊은 갈망에 대해,

우리의 수많은 소원과 희망에 대해 이야기해 주십시오.

생존 전략에 대해서가 아니라 신뢰에 대해서,

정서적 욕구를 채우는 새로운 방법에 대해서가 아니라 사랑에 대해

이야기해 주십시오.

 

변화무쌍한 우리의 관점보다 더 큰 비전에 대해,

대중 매체의 소음보다 더 깊이 있는 목소리에 대해 들려주십시오.

그렇습니다. 우리들보다 위대한 그 무엇이나 누군가에 대해 이야기해 주십시오.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해 주십시오.”


 

 

우리 시대와 사회의 중요한 모든 문제를 다룰 수는 없지만

 

생명, 빛, 진리를 깊이 추구해 나가는 길동무로서

내가 알고 사랑하게 된 친한 친구에게 편지를 쓸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영적 추구에 대해 ‘경청하기를’, 또 여기에 동참하기를 소망한다.



◑1. ‘사랑받는 자’가 되다 (타고 나다)


▲모든 인류를 향한 성경의 가장 깊은 진리

자네가 자네와 자네 친구들을 위해 영적인 삶에 대한 이야기를 써 달라고 한 후로,

나는 자네가 내 편지(이 책)를 다 읽고 났을 때

정말 꼭 기억하길 바라는 한마디(액기스)가 무엇인지.. 계속 생각해 보았네.


지난 한 해 동안 내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그 특별한 단어가 서서히 떠올랐지.

바로 ‘사랑받는 자’라는 단어였네.

난 그 단어가 자네와 자네 친구들을 위해 내게 주어진 단어라고 확신하고 있네.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로, 나사렛 예수의 세례 이야기에서

이 단어를 처음으로 알게 되었지.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 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 3:16-17).


수년 동안 이 말씀을 읽고 설교도 하고 강의도 했지만,

이 말씀이 내 종교의 한계를 넘어서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우리가 뉴욕에서 대화를 나눈 이후였지.


수많은 대화 덕분에 난 이런 확신을 갖게 되었네.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라는 이 말은 모든 인류를 향한

가장 깊은 진리를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지.


▲인간 존재의 핵심 진리 - ‘나는 사랑 받는 자’

프레드, 나의 유일한 소망은 자네의 존재 구석구석에서

이 말씀이 울려 퍼지게 되는 것이네.


자네에 대한 우정으로 내가 줄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선물은,

자네가 ‘사랑받는 자’가 되었다는 사실이네.

또 나는 그 사실을 나의 것으로 주장할 수 있을 때에만

그것을 자네에게 선물로 가르쳐 줄 수 있네.


우정이란 게 무엇인가?

우리가 ‘사랑받는 자’가 되었다는 선물을 서로 나누는 것이 아니겠는가?

 

▲사랑받지 못 할때의 부작용

(사랑과)정반대의 목소리로 가득한 세상에서

그 목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분명 쉬운 일이 아닐 걸세.

우리가 가치 없고 사랑스럽지 못하다는 목소리를 믿게 될 때,

성공, 명예, 권력은 쉽게 매력적인 해결책으로 다가오지.


그러나 진짜 함정은 자기 거부일세. 아마도 자네는 자기 거부보다도

교만이라는 유혹에 더 빠지기 쉽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네.

그러나 사실 교만이란 것도 자기 거부라는 동전의 다른 면이 아니겠는가?


영적인 삶의 가장 큰 적은 바로 자기 거부일세.

그것이 우리를 ‘사랑받는 자’로 부르신 거룩한 목소리를 부인하게 하기 때문이지.

‘사랑받는 자’가 되었다는 것은 우리 존재의 핵심 진리를 표현한 것이네.


▲‘사랑받는 자’임을 발견하라

자네를 ‘사랑받는 자’로 부르신 그 목소리에 아주 세심하게 귀 기울이는 순간마다,

자네는 더 오래 그리고 더 깊게 그 목소리를 듣고 싶어 하는

내면의 욕망을 발견하게 될 걸세.


그것은 사막에서 샘을 발견한 것과도 같지.

일단 물기가 있는 땅을 접하게 되면 더 깊이 파고 싶어 하지 않겠는가?


난 요즘 파고 들어가는 일을 하고 있네.

그리고 이제 막 건조한 사막을 뚫고 솟아나는 작은 물줄기를 발견했네.

나는 계속 파 들어가는 작업을 해야만 하네.

그 작은 물줄기는 사막 같은 내 삶 안에 깊숙이 숨어 있는

거대한 저수지로부터 흘러나오기 때문이지.


우리 삶에는 아주 거대한 모래더미가 있을지도 모르네.

그러나 우리의 갈증을 해갈시키기를 간절히 원하시는 그분이,

우리가 그 모래를 제거할 수 있도록 도와주실 걸세.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물을 발견하고자 하고

그 물을 마시고자 하는 강한 열망뿐이네.



◑2. 사랑받는 자가 되어 가다 (이 진리로 성숙해 가다)


▲하루 종일 이 진리를 묵상하시라

자넨 실용주의적인 기질이 다분하니까,

우리가 어떻게 사랑받는 자가 된 상태에서(원리, 이론)

온전히 사랑받는 자가 되어 갈 수 있는지에 대해 질문하겠지.(실제 적용)


이건 아주 중요한 질문이네.

이 질문이 우리를 낭만주의나 이상주의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일상생활의 아주 구체적인 부분을 다루게 하니까 말일세.


사랑받는 자가 되어 가는 것이란, 실제로 매시간 내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일상사 속으로 그 계시된 진리를 붙잡는 것이네.

우리 내면의 가장 깊숙한 곳에 우리가 사랑받는 자가 되었다는 진리가

자리 잡고 있다면,

그리고 우리가 그 진리를 온전히 주장함으로써 큰 즐거움과 평화가 생겨난다면,

그것은 우리가 먹고 마시고 말하고 사랑하고 놀고 또 일하는 와중에서

생생하고 실제적으로 드러나게 되지.


나는, 아래 네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도움이 됨을 알게 되었네.

-선택받은(taken),

-축복받은(blessed),

-상처받은(broken),

-나누어주는(given).

 

내 경험을 통해 볼 때, 위 4가지 체험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가 되어가는 방법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네.



▲1. 선택받은 자

선택받았다는 것은 사랑받는 자가 되는 일의 토대가 된다네.


사랑받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가 붙잡힌 존재가 되었음을 주장해야만 하네.

영적인 삶의 첫 단계는, 나의 전 존재가 이미 붙잡힌바 되었음을 인정하는 것이네.


거절과 거부로 둘러싸여 있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선택받았다는 사실을

어떻게 놓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영적 투쟁이기도 한 이 투쟁을 위해 어떤 지침이 있을까?


①첫째, 자네는 자네에 대한 세상의 거짓된 속삭임을 계속해서 밝혀야 하네.

“이 거짓된 느낌이 아무리 강할지라도 이건 진리가 아니야.

나는 날 귀히 여기셔서 영원 전부터 사랑받는 자로 부르시고

그 영원한 품에 안전하게 품고 계신 하나님의 선택받은 자녀야.”


②둘째, 자네에 대한 진리를 말해 주고,

선택받은 자라는 자네의 가장 근본적인 정체성을 상기시켜 주는

장소와 사람들을 계속해서 찾아야 하네.

또한 삶과 말씀을 통해 우리를 그 진리로 돌아오게 하는

역사상의 수많은 사람에게 귀를 기울여야 하네.


③셋째, 자네가 선택받은 사실을 계속해서 감사해야 하네.

감사는 자네가 ‘우연적’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받은 존재라는 의식을 심화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이네.

사랑이 사랑을 낳듯이, 감사는 감사를 낳지.


내 경우, 이 세 가지 지침은 선택받은 자로 살기 위한 영적 훈련이었네.

마음의 훈련을 계속했을 때, 나는 나의 그늘을 뛰어넘어

진리에서 나오는 빛으로 들어갈 수 있었네.


△전도의 열망

또한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 역시 선택받았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 싶은 열망을

곧 발견하게 되었지.

다른 사람들 역시 선택받았다는 사실에 눈을 뜨게 되는 것,

그건 선택받은 사실이 주는 커다란 기쁨이네.


△상대도 역시 ‘사랑받은 사람’

우리가 하나님 보시기에 귀한 존재라는 사실을 깊이 신뢰하기만 하면,

다른 사람들의 귀중함도, 하나님 마음속에 있는 그들의 독특한 자리도

인식할 수 있게 되네.

우정이란 서로가 선택받은 존재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고,

하나님이 귀히 보시는 존재라는 사실을 서로 확인하는 것이네.



▲2. 축복받은 자


△서로 축복하라, ‘사랑 받은 자’임을!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인 우리는 축복받은 사람들이네.

누군가를 축복한다는 것은

칭찬과 비난의 구분을,

선행과 악행의 구분을 넘어서는 것이지.

 

그것은 다른 사람의 근본적인 선함에 다가가는 것이며,

그가 사랑받는 자 되었음을 일깨워 주는 것이네.


우리가 서로에게 주는 축복은 영원 전부터 우리에게 주어진 복을 표현하는 것이며,

그것은 우리의 진정한 자아에 대한 가장 심오한 확증이네.

선택받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네. 우리는 또한 계속되는 축복(격려)을 필요로 하네.


우리는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께 속해 있으며, 그 분은 우리를 홀로 버려두지 않고

오히려 삶의 순간마다 사랑으로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새로운 방식으로 듣게 해주는 축복 말일세.


△‘사랑받는 자’로 축복받으신 예수님

예수님도 요단강에서 세례 요한의 세례를 받고 나서 축복의 음성을 들으셨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이 말이 바로 축복이지.

그리고 이것이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찬양과 비난,

사랑과 저주 가운데서 예수님을 지탱시켜 준 것이네.


보통 자기가 저주받고 있다고 느끼는 기분은

축복받고 있다는 기분보다 더 쉽게 생기는 법이지.

그리고 그러한 감정을 계속 키워 내기에 충분한 논거들도 찾을 수 있네.


우리는 내면에서 자기자신이 악하고, 나쁘고, 썩었고, 가치 없고, 쓸모없다는 소리,

질병과 죽음으로 끝나 버릴 운명에 불과하다고 하는 소리를 쉽게 들을 수 있네.

그러나 이러한 시끄럽고, 난폭하고, 소란스러운 저주들은 진리가 아니네.

그것들은 거짓말이지. 믿기 쉬운 거짓말, 그러나 분명히 거짓말이네.


그렇다면 어떻게 이 축복을 듣고 주장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축복받았다는 사실이 단지 감상이 아니라 일상생활을 형성하는 진리라면,

우리는 분명하게 이 축복을 볼 수 있고 경험할 수 있어야 하네.

이제 자네가 축복받았다고 주장할 수 있도록 두 가지 제안을 하겠네.

그것은 ‘기도’ 그리고 ‘함께 거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네.


△나에게는 ‘기도’가 축복의 음성에 귀 기울이는 점점 더 좋은 방법이 되고 있네.

그것은 고된 훈련이네.

마음 깊숙한 곳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 위해

오랫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어 본 적이 있나?


우리 세계의 소리를 넘어서 침묵 속으로 들어가기가 쉬운 일은 아니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고독을 감싸 안고 침묵과 친구가 되려 한다면

그 축복의 목소리를 알게 될 걸세.


나는 환청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귀, 내적인 마음의 귀로 들을 수 있는 목소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네.

하루에 30분씩 사랑의 음성에 귀 기울이는 훈련을 지속해 나간다면,

서서히 자네가 의식하지도 못하는 어떤 일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발견할 걸세.


△은밀하게 나와 함께 거하시는 하나님을 일상에서 발견하시라

그리고 두 번째로 제안하는 것은, ‘함께 거하는 삶’을 계발하라는 것이네.

거리에서 우리를 멈춰 서게 하는 가난한 사람들의 축복,

새 생명에 대해 알려주는 신선한 꽃과 나무들의 축복, 음악, 미술, 조각,

건축의 축복 등.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 더 큰 축복도 있네.


바로 감사, 격려, 애정, 사랑의 말을 통해 우리에게 다가오는 축복이지.

우리는 그 축복들에게 다가가야 하고 그것들을 받아들여야 하네.

그것들은, 은밀하게 숨어 있는 목소리를 부드럽게 기억나게 하지.

우리의 이름을 부르고 우리에 대해 좋은 것을 말씀해 주시는

그분의 목소리를 말일세.


우리가 축복받았음을 주장하는 것은

항상 다른 사람을 축복하고 싶은 깊은 욕망으로 이어진다네.

축복받은 사람의 특징은 그들이 어디를 가든, 항상 축복의 말을 한다는 것이네.


자네가 축복받았다는 사실에 접하게 될 때,

다른 사람을 축복하거나, 그들의 장점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그들의 아름다움과 진실함을 이끌어내는 일이 얼마나 쉬워지는지 알면 놀랄 걸세.


축복받은 사람은 항상 다른 사람을 축복하네.

내면에서 우리의 이름을 부르고 우리를 축복하는 목소리를 들을 때,

어둠은 더 이상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지 못하네.


우리를 사랑받는 자로 부르신 그 목소리가

다른 사람을 축복하는 단어들을 알게 하실 것이고,

그들도 우리와 동일하게 축복받은 존재임을 보여 주실 걸세.

우리가 진정으로 이 진리를 소유한다면,

우리는 열린 눈을 가지고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상처를 볼 수 있네.



▲3. 상처받은 자


△상처는 보편적이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우리는 상처에 대해 이야기했었지.

자네는 고통스러운 이별과 이혼을 겪어야 했고, 나는 오랜 침체의 시기를 겪었네.

자네는 업무 가운데서 많이 낙담했고, 진짜 소명이 무엇인지 계속해서 방황했지.

반면 나는 계속 시간과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많은 요구에 매몰되어 있었기 때문에

지치고 실망했지.

분명 선택받고 축복받은 이스라엘의 지도자와 선지자들도

모두 상처로 얼룩진 삶을 살았네.


 

 

△상처받은 사람들은, 치료보다, 더욱 파멸의 길로 내닫는다.

 

에이즈는 아마 현대인의 상처를 가장 뚜렷하게 말해 주는 것 중에 하나일 걸세.

난폭한 포옹 속에 사랑과 죽음이 서로 연결되어 있네.

친밀함과 교제를 필사적으로 찾아 헤매는 젊은이들이 그것에 생명을 건 것이지.


우리 사회의 공허하고 커다란 공간 속에서 절규하는 외침이 들려오는 것 같네.

계속해서 외로움 가운데 사느니, 죽는 것이 더 낫다고 말일세.

그래, 에이즈의 위기는 우리 인간의 상처에 대해

전적으로 새로운 조망을 요구하고 있네.


①상처와 친해 지시라

우리가 어떻게 이 상처에 반응할 수 있겠는가? 두 가지 방법을 제안하고 싶네.

첫째는 상처와 친해지는 것이고,

둘째는 그 상처를 축복 아래로 가져다 놓는 것이지.


상처에 대한 첫 번째 반응은 그것에 정면으로 부딪혀서 그것과 친숙해지는 것이네.

우리가 거절, 이별, 무시, 학대, 감정적 조작 때문에 생긴

심한 고뇌와 고통을 직면하지 못하고 도망가기만 한다면,

이것들은 우리를 마비시킬 뿐이지.


인간의 고통은 우리가 그토록 원하는 기쁨과 평화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아니라,

오히려 그 곳으로 이르는 수단이 될 수 있다네.

나는 그것이 분명한 진리라고 말할 수 있네.


우리의 진정한 보살핌은,

우리의 상처를 기쁨으로 이끄는 문으로 만들도록 기꺼이 서로를 도와주는 것이네.


②상처에 대한 두 번째 반응은 그것을 축복 아래로 갖다 놓는 것이네.

보통 우리가 상처에 직면하기 두려워하는 이유는

그것을 저주 아래에 놓고 살기 때문이지.

우리의 아픔을 통해 자신을 쓸모없고 가치 없다고 생각한다는 말일세.


그러나 크고 무거운 짐이라도 축복의 빛 아래 거하고 있을 때는

가볍고 쉬운 법일세.

참을 수 없을 것 같은 일이 도전이 되고 낙심할 이유가 될 듯한 일이

정화의 근원이 되지.

형벌처럼 보이던 일이 불필요한 부분을 정리하는 일이 되고,

거절 같던 일이 더 깊은 교제에 이르는 길이 되네.

기쁨과 슬픔은 더 이상 상반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받는 자로서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려는 동일한 소망의 양면이 되는 거지.


③자기 상처를 통해.. 남을 돕는 치유자로 승화되시라

우리의 상처에 대한 이야기를 결론짓기 전에,

나는 다시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이 말이 함축하는 바에 대해 말하고 싶네.

나이가 들어가면서 나는 다른 사람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아주 많은 동시에

거의 없다는 사실을 더더욱 잘 알아 가고 있네.

그래, 사실 우리는 나누어주기 위해 선택받았고 축복받았고 상처도 받았네.

내가 지금부터 하고 싶은 이야기가 바로 그것에 관한 것이네.(↓)



▲4. 나누어 주는 자


사랑받는 자의 삶의 네 번째 모습은 나누어주는 것이네.

우리 둘 다, 다른 사람을 위해 무언가 할 수 있다는 사실로 얻는 기쁨을

경험으로 알고 있네.

자넨 나를 위해 많은 일을 했고, 나는 항상 자네가 준 것으로 인해 감사하고 있네.


우리의 가장 위대한 성취는 우리를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이네.

고도로 발달된 경쟁심과 탐욕이 판치는 세상에서,

주는 기쁨을 상실한 모습을 보고 있기란 슬픈 일이네.


종종 우리는 행복이 소유에 달려 있는 것처럼 살고 있네.

그러나 나는 소유 때문에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을 본 적이 없네.

진정한 기쁨, 행복, 내적 평화는 우리 자신을 다른 사람에게 '줄 때' 생긴다네.

행복한 삶은 다른 사람들을 위한 삶이지.

그러나 그 진리는 대개 우리가 상처에 직면할 때 발견하게 되네.


△자기 상처로 깨어진 사람이.. 남을 잘 돕는다.

수년 동안 우리의 우정이 자라난 방식을 좀더 숙고해 보면

우리의 상처와 서로에게 주는 능력 사이에 신비한 연결 고리가 있음을 깨닫는다네.

우리의 상처 때문에 서로의 삶을 나누고 서로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방법을

더 깊이 알게 되었지.

빵을 나누어주기 위해서는 쪼개는 행동이 필요하듯 우리의 삶도 그러하네.


△함께 식사하라

상처를 안고 사는 서로에게 나누어주고자 하는 소망이

가장 아름답게 표현되는 때는 함께 식사를 할 때가 아닐까 생각하네.

나는 ‘함께 떡을 뗀다’는 표현을 아주 좋아하네.


함께 먹고자 하는 소망은

서로에게 양식이 되고자 하는 더 깊은 욕망까지 표현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사랑받는 자로서 우리의 가장 완전한 모습은 세상의 양식이 되는 것이네.

그것은 서로에게 우리 자신을 주고자 하는 가장 깊은 욕망을

가장 친숙하게 표현한 것이지.


①삶으로 우리를 주는 것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가? 나는 두 가지를 제안하고 싶네.

그것은 ‘삶으로 우리를 주는 것’과 ‘죽음으로 우리를 주는 것’이네.

우선 우리의 삶 자체가 나누어 줄 수 있는 훌륭한 선물이라네.


서로에게 우리의 존재를 주는 것에 대해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마음에 떠오르는 것은 우리의 독특한 재능이네.

그러나 나이가 들어가면서, 내가 주어야 하는 가장 큰 선물은 내 삶의 기쁨,

나의 내적인 평안, 나의 침묵과 고독, 나의 행복감이라는 사실을 점점 깨닫고 있네.


우리의 재능보다 더 중요한 것이 우리의 은사니까.

우정, 친절, 인내, 기쁨, 평안, 용서, 온유, 사랑, 희망, 신뢰 그리고 그 외

다른 많은 것들. 이것들이 우리가 서로에게 주어야 하는 진정한 은사들이네.



②두 번째로 우리는 <죽음으로> 우리 자신을 주도록 부름 받았네.

우리가 나누어주는 삶을 살기 위해 상처받고 깨어진 존재가 되었다면,

최종적인 상처가 되는 죽음은

우리 자신의 최종적인 선물을 위한 수단이 되지 않겠는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들에게는,

죽는다는 것이 온전히 사랑받는 자가 되는 길로 가는 문이 된다네.

선택받았고, 축복받았고, 나누어주기 위해 상처받았음을 아는 자들에게

죽음이란 순수한 선물이 되는 길일세.


우리를 사랑했고 우리가 사랑했던 이들의 죽음은,

서로에게 새롭고 더 근본적인 교제, 새로운 친밀감,

새로운 소속감을 향한 가능성을 열어 준다네.


정말로 사랑이 죽음보다 강하다면

죽음은 사랑의 끈을 강하게 하고 깊게 하는 잠재력이 있을 걸세.

예수님이 제자들 곁을 떠나신 후에야

그들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네.


그러나 그것은 사랑 안에서 죽는 모든 사람에게도 적용되는 것이 아니겠나?

우리가 죽을 때에만이 우리 영혼이 온전히 그 전체적인 모습을 드러낼 수 있네.


그러나 준비 없이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네.

그래, 훌륭한 죽음이라는 것이 있지.

우리는 자신이 죽는 방법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네.

사랑받는 자의 죽음은 많은 이들의 삶 가운데서 열매를 맺게 되지.


우리의 짧은 인생이 시간을 초월하여 열매를 맺을 수 있음을 믿어야 하네.

우리는 그렇게 되기로 선택을 해야 하고,

우리를 기억할 사람들에게 기쁨과 평화와 생명을 가져다 줄 영혼이

우리에게 있음을 확신해야 하네.


아시시의 프란체스코는 1226년에 죽었네. 그러나 그는 아직도 생생히 살아 있네.

그의 죽음은 진정한 선물이었지. 그는 죽었지만 결코 죽지 않았네.

그의 생명은 전 세계에서 새로운 열매를 맺어 가고 있고,

그의 정신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전수되고 있네.


몇 년 내에 우리 둘은 땅에 묻히거나 화장될 걸세.

이 세상에서 쉽게 망각되어 버릴 우리의 짧은 여행이

모든 시간과 장소를 통하여 사람들에게 삶을 나누어주는 일로 지속될 걸세.

일단 우리의 죽을 육체에서 자유로워진 사랑의 영은,

오고 감을 듣는 사람이 거의 없을 때조차도 원하는 대로 날아다닐 걸세.


그래서 죽음으로써, 사후에 더 많은 일을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뜻인 듯

성 프란시스나 주기철, 손양원, 한경직 목사님처럼..



◑3. 사랑받는 자로 살아가다 (‘영생’의 삶으로 살아가시라)


▲주님의 사랑에 대한 반응으로, 우리도 주님을 사랑해야, 주님과 연합해야

삶이란 우리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게 하기 위해

하나님이 주신 기회라고 생각하게.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은 “너는 내가 사랑하는 자다.”라고 말씀하실 뿐 아니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질문하시고

우리가 “네,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도록 수많은 기회를 만들어 주시지.

우리 내면에 “네,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하는 것, 그것이 바로 영적인 삶이네.


▲사랑받은 자는.. ‘연합’을 도모하며 산다.

영적인 삶이란, 우리의 일상생활에 스며들어 파괴와 폭력을 일으키는

수많은 ‘분리 현상’을 거스르는 것이네.

이러한 분리 현상들은 내면적이기도 하고 외면적이기도 하지.


내 속에서 발견되는 기쁨과 슬픔의 분리 현상이나

내 주위의 문화, 종교, 종족들의 분열은

모두 어두움의 악마적인 세력에서 그 근원을 발견할 수 있다네.


우리를 사랑받는 자로 부르신 하나님의 성령은 통일체를 만들고

연합하게 하시는 영이시네.

하나님의 성령의 임재를 분별하는 가장 분명한 방법은,

연합, 치유, 회복, 화해의 순간들을 알아내는 것이네.

성령이 역사하시는 곳마다, 분열은 사라지고 연합된 모습이 나타난다네.


▲매 순간 사랑하며 영생의 삶을 살며, 영생을 준비하시라

내가 가장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겠나?

우리의 일상생활 전체가 ‘위로부터의’ 삶,

다시 말해 ‘세상으로 보냄 받은 사랑받는 자’로서의 삶이라면,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과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독특한 기회가 된다네.


그러면 이 모든 것이 우리를 어디로 이끌고 가는가?

나는 그것이 우리가 태어난 ‘곳’,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네.

그러기에 우리의 죽음은 그분께 돌아가는 순간이 되는 것이지.


우리의 죽음이 충만한 삶을 향한 문이 되기를 기대할 수 있으려면,

우리 ‘생애’의 많은 순간들에 성령님이 우리를 주장하시도록 요구해야 하네.

영생이란 우리 존재의 종말에 갑자기 다가오는 어떤 놀라운 일이 아니라,

오히려 계속되는 우리 존재와 삶의 온전한 계시라고 할 수 있네. (매우 신학적인 개념)


▲남은 삶은 ‘사랑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

비록 나도 이 세상의 많은 두려움과 위협에 굴복하기도 하지만,

나는 아직도 이 땅에서의 몇 년(남은 인생?)은

훨씬 거대한 사건(영생?)의 한 부분이라는 사실을 굳게 믿고 있네.


그것은 시간 속으로의 사명, 아주 즐겁고 흥분되기까지 한 사명이라고 생각하네.

그 사명을 이루도록 나를 보내신 그분은

내가 집으로 돌아와 이 땅에서 배운 것을 이야기해 주기를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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