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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0 영적 전쟁의 3양상

LNCK 2007. 10. 8. 14:14
 

◈영적 전쟁의 3양상               수23:12~13



여호수아서와 사사기를 읽어보면,

①여호수아 시대 - 영적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항상 이겼고,

②여호수아~사사기 중간기 - 기세가 꺾이기 시작해서 ‘힘의 균형’을 이루더니

③사사기 시대 - 이스라엘이 주변국에 거의 패했고,

특출한 사사가 나타났을 때에만, 이스라엘이 반짝 구원(승리)을 얻었다.


오늘 나는 위 3개의 카테고리 속에, 어디에 속해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된다.



◑1. 언제나 이기는 경우


▲하나님이 전적으로 함께 하시는 경우, 성도는 영/육간 전쟁에서 이긴다.

다윗이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언제나 이겼다.

여호수아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거의 언제나 이겼다.


요셉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언제나 형통했다.

비록 감옥과 종살이였지만... 그래도 형통했다.

 

그들이 전심으로 하나님만 섬겼고, 모든 우상을 멀리할 때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다윗, 여호수아, 요셉, 모세를 편 들어주셔서 항상 이겼다.


▲이 때는 병력의 숫자, 군비의 크기가 크게 중요하지 않다.

히스기아 왕 때, 하룻밤 사이에 적군 18만5천 명이 패했으며 왕하19:35

기드온도 3백 명의 용사로 미디안 10만 대군을 물리쳤다.

아브라함은 가신 318명의 사병으로, 4개 도시국가의 연합군을 물리쳤다.

이런 예는 성경에 얼마든지 더 나온다.


▲적군은 스스로 무너졌다.

망할 때 대적들은.. 서로 치고 박고 싸운다.

기드온이 10만 미디안 대군을 물리칠 때도, 적들은 서로 칼로 쳤으며,  삿7:22


사마리아 성을 포위했던 아람 군대는, 큰 병거, 말소리, 군대의 소리를 듣고,

스스로 겁에 질려 하룻밤 사이에 모두 도망갔다. 왕하7:6

 

하나님은 때로는 10가지 재앙, 홍수 재앙 등 자연을 동원하기도 하시며,

이스라엘은, 자기 힘으로 보다는, 하늘의 도우심을 받아... 언제나 이겼다.


하나님이 참 성도에게 승리를 안겨주실 때,

대적들은 스스로 무너진다.

참 성도가 일일이 공격하거나 대응할 필요가 없다는 뜻.

(이런 자리에 나아가기를 소망합니다!)


▲악인의 의외의 승리 註1)




◑2. 이기고 지는 것을 반복하는 경우


여호수아 말기,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이 들어가서 차지한 가나안 땅에서

이방인들을 다 멸하지 못하고 조금 남겨두었기 때문이다.


▲신자가 스스로 남겨두는 올무

정녕히 알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민족들을 너희 목전에서

다시는 쫓아내지 아니하시리니, 그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며, 이 되며,

너희 옆구리에 채찍이 되며, 너희 눈에 가시가 되어서,

너희가 필경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이 아름다운 땅에서 멸절하리라 

수23:13

 


※가사, 가드, 아스돗을 남겨 둔 결과   (이 단락 펀 글)


유다와 이스라엘에 있는 아낙 사람을 다 진멸했습니다.

단지 가사와 가드 그리고 아스돗에 조금 남아있습니다.  수11:22


이 말씀 이면에는

‘조금 남은 아낙 자손 대수롭잖습니다’ 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만  

그러나 하나님은 대수롭잖은 이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아낙 자손이 아직 남아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점령하고 거기서 살아가는데

아무 방해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주의해 보아야 합니다.


지금은 조금 남아있는 아낙 사람들 대수롭잖게 여겨지지만

후일에 이들이 얼마나 큰 방해거리가 되고 원수가 되는지

이스라엘은 몰랐지만 하나님은 아셨던 것입니다.


만약 이때에 여호수아가 ‘하나도 남김없이 취하라’ 했더라면

그 당시에는 마음만 먹으면 쉬운 일이었습니다.

그랬더라면 평생 후회할 일이 일어나지 아니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수롭잖고 간과한 그 일이 나중에 얼마나 큰 불행을 초래하는지

이스라엘은 몰랐던 것입니다.


오늘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이점입니다.

오늘 나의 삶에 불편함이 없다고 그냥 넘어 가버리다가

나중에 큰 불행이 되어서 다가올 일은 없느냐는 것입니다.

즉 나의 삶에 가사와 가드와 아스돗에 남겨둔 아낙 사람은 없느냐는 것입니다.


▲1. 가사

가사는 나중에 블레셋 나라의 중요한 도시 중에 하나로 나타납니다.

삿16장에 보면 이스라엘의 유명한 사사 삼손이 가사에 가서

거기서 기생 들릴라를 알아 결국은 잡혀서

머리 깎이고 눈 뽑히고 감옥에 갇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합니다.


만약 이 지금 여호수아가 가사를 완전히 취했었더라면

이렇게 나중에 가사에서 삼손이 불행을 당하지 아니했을 것입니다.

오늘 내게 가사가 어떤 의미를 주고 있는가를 우리는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세상에서 편하게 살고자 하는 유혹,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가사입니다.

나라가 편안하고, 교회가 편안하고, 가정이 편안한 것, 다 좋은 말입니다.

그러나 편안 한 것 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하고는 구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신앙생활 하는데 별 지장 없다고 해서 남겨둔 세상적인 요소들이

나중에 나의 신앙생활에 올무가 되고

나의 신앙의 성숙에 덫이 된다는 것 우리는 바로 알아야 합니다.


▲2. 가드     

삼상17:4절에 보면 ‘블레셋 사람의 진에서 싸움을 돋우는 자가 왔는데

그 이름은 골리앗이요 가드 사람이라

그 신장은 6규빗이요, 머리에는 놋 투구를 썼고

몸에는 어린갑을 입었으니 그 갑옷의 중수가 놋 오천 세겔이요...’


한 마디로 사람이 아니라 영화에나 나오는 괴물 같습니다.

더욱 기가 막히는 것은 골리앗이 이스라엘과 하나님을 모욕하지마는

이스라엘 40만 대군 가운데 그 누구도 나갈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사람 다윗이 없었더라면 블레셋에 지배받고 피로 물든

제2의 사사시대가 되지 아니했다고 누가 장담하겠습니까?

우리는 단지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의 믿음과 용맹만 기억합니다만

이 일이 왜 일어 났는지는 알려고 하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이 일이 왜 일어났습니까?


근원적으로 올라가면

바로 여호수아가 가드에 아낙 사람을 조금 남겨 두었기 때문입니다.     

그 조금 남겨둔 아낙 사람 중에서 골리앗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 가드를 남겨두면

거기서 꼭 골리앗이 나타난다는 것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교회 직분자라 할지라도 자녀들 결혼 할 때 보면

신앙 조건을 첫째로 드는 사람 별로 없습니다.

어느 대학 나오고 직업이 무엇이냐? 그리고 가문은 어떠냐?

물론 이런 것들 무시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대부분 교인들마저 신앙보다 이런 세상의 기준으로 선택합니다.

그러나 결혼생활 10년 만에 드디어 골리앗이 등장합니다.

그때는 도저히 내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통곡을 해도 해결점이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가드를 남겨놓는 신앙생활

결국은 나의 신앙의 성숙에 올무가 되고 덫이 된다는 것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3. 아스돗    

삼상 4장에 아스돗 사건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무엘의 말이 온 이스라엘에 전파되니라 이스라엘은 나가서 블레셋 사람과

싸우려고 에벤에셀 곁에 진 쳤고 블레셋 사람은 아벡에 진 쳤더니

이스라엘을 대하여 항오를 벌이니라’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 날 전쟁에서 4천명의 사상자를 내고 참패를 당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리가 블레셋에게 질 수 있느냐?” 해서 착안해 낸 것이

하나님의 언약궤를 가져오는 것이었습니다.


언약궤가 이스라엘 진에 도착하니 다시 사기가 충천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다시 보병 3만 명이 죽고 패전합니다.

그것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궤마저 블레셋에게 빼앗겨 버립니다.


우리가 생각해 보고자 하는 아스돗 사건은 이것과 연관되어 기록하고 있습니다.

삼상5:1절에 보면, ‘블레셋 사람이 하나님의 언약궤를 빼앗아 가지고

에벤에셀에서부터 아스돗에 이르니라. 블레셋 사람이 하나님의 궤를 가지고   

다곤의 땅에 들어가 다곤의 곁에 두었더니’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벤에셀’이란 뜻은 ‘하나님이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는 뜻입니다.

왜 하나님이 여기까지 도우셨는데 블레셋에게 패했습니까?

이 말은 과거에서 현재까지 도왔다고 해서 미래가 약속된 것은 아닙니다.

과거에 은혜 받았다고 해서 지금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제의 승리가 오늘의 승리를 기약하지 않는 것이 신앙생활의 싸움입니다.


지금까지는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셨지마는

이제부터 하는 싸움에서 이스라엘은 3만 명이 죽고

블레셋에게 언약궤를 빼앗기는 참패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아스돗 사건입니다.


과거에 잘 믿었다고 지금 하나님 말씀에 은혜를 받지 못하고

신앙의 연륜만 내 세우고 직분만 앞세운다면

그것이 바로 내게 아스돗 사건이 되고 맙니다. 


오늘 이 자리까지 오신 성도 여러분 정말 잘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다가 에벤에셀의 말뚝을 밖아 놓지 마시기 바랍니다.

앞으로도 에벤에셀의 하나님은 계속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아스돗을 점령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받기 위하여 진력해야 합니다.     

경건생활에 마음을 쏟아 부어야 합니다.


말씀에 은혜 받지 못하고

전통과 습관과 외식에 메여 신앙생활 하지 마시기 바라니다.    

그러면 언젠가 꼭 내게도 아스돗 사건이 터집니다.

말씀에 은혜 받지 아니해도 신앙생활에 아무 문제가 없다는

내 마음의 아스돗 먼저 점령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도 가사가드아스돗의 아낙 사람 멸절해야 합니다.

내가 신앙인으로써 지금 나의 삶에 문제가 없다고

가사 - 즉 세상에 편 하려고 하는 마음

가드 - 세속적 욕망

아스돗 - 말씀에 은혜 받지 못하고 하는 형식적 신앙


이런 것들이 지금은 나의 신앙생활에 별 문제가 되지 아니하는 것 같지만

결국은 나를 넘어드리는 들릴라가 되고

나를 괴롭히는 골리앗이 되고

나를 무능하게 만드는 다곤이 되어 돌아온다는 것

깊이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3. 대부분 지는 경우


오늘날 내 삶이 ‘사사기 시대’처럼 ‘자기 소견에 좋은 대로 살면’

영적 전쟁에서 반드시 패하게 되어있다. 백전백패한다.

영적 전쟁에서 패하면.. 사방에 내 대적이 많아지고, 실제로 대적에게 패한다.

신약적 표현으론, 맛을 잃어 발에 밟히는 소금이 된다.

 

사사기 시대에도 물론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섬겼다.

하나님의 백성이 어떻게 하나님을 떠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지 않았다.’

적당히 섬기고, 우상과 겸하여 섬겼다.

그것이 계속되자... 백전백패 하는 것이다.


▲잘못된 친근, 퇴보하는 신앙 

너희가 만일 퇴보하여 너희 중에 빠져 남아 있는 이 민족들을 친근히 하여      

더불어 혼인하며 피차 왕래하면...

정녕히 알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민족들을 너희 목전에서

다시는 쫓아내지 아니하시리니

그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며 이 되며 너희 옆구리에 채찍이 되며

너희 눈에 가시가 되어서 너희가 필경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이 아름다운 땅에서 멸절하리라    수:12~13


“퇴보하여”란 말은 ‘다시 돌아가서’라는 뜻이다.

다시 돌아가 옛사람의 습관을 좇으면 

특별히 13절의 말씀은 점차 그 피해의 강도가 더해 가는데

다른 민족을 다시는 쫓아내지 아니할뿐더러

그들이 너희에게 올무, 덫, 채찍, 가시가 되어서

필경은 멸망할 것임을 경고하고 있다.


구원 받고 은혜 입은 성도가

옛 습관으로 돌아가서 스스로 퇴보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 한다.

여호수아는 자신의 삶의 경험을 통해 마지막으로

가나안의 주인으로 살아갈 이스라엘 백성에게

한 번 더 간곡하게 당부를 했던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사사기 시대에, 여호수아가 걱정했던 대로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버렸고, 그 결과 많은 대적의 침략과 고난을 겪었다.



◑4. 시대적 적용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2007년은, 위 3시대 중에 과연 어디에 속할까?


1990년대 초부터, 한국 기독교는 꼭짓점을 돌아서 하향곡선을 걷고 있다.


그런 와중에 북한은 핵실험을 강행했고(핵무기 보유 여부는 여전히 미확인)

필요할 때마다 미사일을 쏘아대며 주변국을 긴장시키고 있다.


북한이 핵실험을 강행하기까지 ‘레드 라인’만 외치다가 전혀 막지 못한 책임을

모두 부시 행정부 탓에 돌리기 보다는,

사사기 시대 초입에 들어선 한국을 징계하시는

‘하나님의 막대기와 채찍’으로 보는 것이 나의 사견이다.


그런 가운데 북한과 자유로운 협력을 하는 것은,

결코 좋게만 볼 일은 아닌 것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는, 어느 나라와 대결해도, 악조건 속에도 반드시 이기지만,

하나님이 떠나실 때는, 어느 나라와 대결해도, 호조건 속에서도 반드시 진다.


오늘날 나 한 사람이 ‘승리하는 성도’가 되고,

우리 공동체 하나가 ‘승리하는 공동체’가 될 때,

이런 것들이 모여질 때

남과 북의 상호 공조관계 속에서도 남쪽이 승리할 것이다.

우리 힘으로 승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도와 주시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 우리가 <여호수아 말기~사사기 초입>에 들어섰다고 보는 시점에서

남과 북의 상호 공조관계는

도리어 올무, 덫, 채찍, 가시가 될 가능성이 더 크다.

하나님이 북한을 인생 채찍과 사람 막대기로 쓰실 가능성이 큰 것이다.  삼하7:14

 

지금 많이 시정되고 있습니다만

우리는 보다 '본질적인 여호와 신앙, 본질적인 기독교 신앙'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것에 우리의 장래가 달려 있습니다.  <김지윤


*관련 글 : 

이스라엘 남북 왕국의 관계 변천사 (1)  http://blog.daum.net/ygbhygbh/9080851
이스라엘 남북 왕국의 관계 변천사 (2) 
http://blog.daum.net/ygbhygbh/9083105

 

 

註1) ▲악인의 의외의 승리

내가 악하지만, 상대가 더 교만해서 이기는 경우도 있다.

아합 왕 때 아람이 쳐들어 왔지만, 그들 아람의 교만으로 인해

불의한 북 이스라엘 아합 왕이 이겼다.


2차대전 때도, 히틀러와 스탈린이 소련 전선에서 맞붙었을 때,

두 악한 독재자 사이의 전쟁에서 결국 스탈린이 가까스로 이겼다.

스탈린은 수 백만 군인들을 ‘전쟁의 소모품’ 정도로 생각해서 무자비하게 전선으로 내몰아

비참하게 죽게 만드는 악인이었지만, 히틀러가 그 보다 더 악해서... 그는 독일에 승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