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참는 것’ 고전13:2~7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고전13:2~7.
▲바울이 정의한 ‘사랑’은 ‘참고’로 시작해 ‘견디느니라’로 마칩니다.
둘 다 <참는 것>입니다.
중간에도 모든 것을 ‘참으며’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정의한 ‘사랑’은 - <참는 것>이 아닐까요?
▲나아가 ‘아니하며’가 8번이나 나옵니다.
‘아니 한다’는 것도 사실은 <참는 것>에 해당됩니다.
그런 의미로 다시 한 번 읽어봅시다.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질투하고 싶은 마음을 참으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자랑하고 싶은 마음을 참으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교만해지고 싶은 마음을 참으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고 싶은 마음을 참으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마음을 참으며)
성내지 아니하며, (막 성내고 싶은 마음을 참으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악한 궤계를 꾸미고 싶은 마음을 참으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보고 기뻐하는 마음을 참으며)
▲그러나 단순히 참는 것이 아니라 ‘오래’ 참고 또 ‘모든 것’을 견디라고 했습니다.
요컨대 매사에 끝까지 참고 인내하는 것이 사랑의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며
사랑은 믿음 소망보다 더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다른 모든 것은 폐해져도 하나님 사랑은 영원히 남습니다.
▲아무리 성령의 은사가 많아도
교회 안에서 끝까지 모든 것을 <참지 않으면>
성도간의 분쟁은 결코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교회 안에서 성도들을 참 사랑으로 대하고 있습니까?
다른 말로 매사에 끝까지 <참습니까?>
<9/10/2007 www.nosuchjesus.com 글을 편집
◑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으며" (고전13:5)
본문의 일차적인 뜻은 상대에 대해 어떤 종류의 나쁜 생각도 품지 않는 것입니다.
우선 싫어하거나 미워해선 사랑이 아님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또 상대에게 조종, 위계, 사기를 치려해서도 안 됩니다.
손해, 부담, 상처를 주는 일을 궁리해선 더더욱 안 됩니다.
그러나 악한 생각하지 않고 가만히 있다고 사랑이 아닙니다.
상대에 대해 가능한 모든 좋은 것을 생각해서 실천해야 참사랑입니다.
그런데도 바울이 악한 생각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구태여 사랑이라고 말한 까닭은
원어적인 특별한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악한 것”의 헬라 원어 kakos에는 채무를 뜻하는 Debit의 의미가 있습니다.
즉 상대와 있었던 안 좋았던 일, 상처를 주고받은 일,
무시당하거나 자존심 상한 일, 손해 본 일 등
언젠가는 앙갚음하려고 두고두고 되씹지 말라는 것입니다.
나아가 가해자가 용서를 구하면 겉으로는 용납해 준 것처럼 해놓고
뒤로는 여전히 앙금이 남아 있어도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음의 장부에 남아 있는 상대에 대한 모든 빚을 완전히 지우라는 뜻입니다.
회계장부 상에 빚으로 기록해 놓는 것은 언젠가는 반드시 받아내겠다는 목적입니다.
어떤 형태로든 복수하여 내가 당한 만큼 톡톡히 갚아 주리라는 뜻입니다.
현실적 대응책이 불가능하다면
내 마음의 저주라도 절대 약해지거나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불편한 관계가 자주 오래가면 Black List에 올려버립니다.
말하자면 회수 불가능한 빚으로 간주하여 아예 상대조차 하지 않는 것입니다.
영원히 상종 못할 인간 취급을 하여
자기의 기대나 관심의 대상에서 완전히 제거해버립니다.
차라리 싫어하거나 미워하는 것은 되돌릴 가능성이라도 있습니다.
무관심이야말로 분노나 저주 대신 사랑의 완전 반대입니다.
사랑은 상대에게 받으려고 남겨둔 모든 채권을 완전히 탕감해 주는 작업입니다.
나아가 예수님이 가해자의 모든 잘못을 십자가에 지고 죽은 것같이
그 채권을 먼저 하나님께 갚아야 할 채무로 바꾸는 싸움입니다.
받아내야 할 것을 오히려 그저 줌으로써 받는 것입니다.
오직 십자가가 아니고는 사랑은커녕 용서도 할 수 없습니다.
상대에 대한 앙금은 예수님의 나를 향한 사랑마저 가로막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이제는 마음의 모든 부채를 십자가 지우개로 지우십시오.
9/12/2007. www.nosuchjesus.com *원제목 : 사랑의 지우개
◑관련 글: 사랑을 하면은 예뻐져요!
▲사랑을 하면은 예뻐져요!
“사랑을 하면은 예뻐져요”라고 시작되는
아주 예전 어릴 적 흥겹게 따라 부르던 대중가요가 생각납니다.
어떤 형태의 사랑이든 진실로 사랑받고 사랑하는 이들의 얼굴에는 윤기가 흐르고
자신감과 활력이 넘칩니다.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사랑을 해야 합니다.
살기 위해 밥 먹고, 숨 쉬는 이치와 똑같습니다.
내 전 존재를 다해 사랑할 때 우리는 충만한 존재, 갈림 없는 마음,
순결한 마음이 됩니다. 사랑할수록 깨끗한 마음이 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사랑 공부’는 바로 하나님을 배워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행복하게 살기 위해 언제나 사랑에는 초보자임을 인정하며
모든 존재를 다해 갈림 없는 마음으로 하나님과 사람을,
그리고 일상의 삶을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사랑을 받아도 예뻐져요
[내 마음의 풍금]이란 영화가 있다.
영화에서 홍연(전도연 분)은 17살인데도 아직 초등학교 5학년 학생이다.
어머니는 이 소녀(딸)에게 이름을 부르지 않고 언제나 욕을 하면서 부른다.
“야 이 예맨아이야!”
그 날도 밥을 태우고 집에서 쫓겨났다.
그래서 동생을 등에 업고 동산 위로 올라갔는데, 우연히 한 총각을 만난다.
그 마음 초등학교에 새로 부임하시는 총각 선생님(이병헌)이시다.
이 총각이 한 마디 한다.
“아가씨, 여기 학교가 어디지?”
그 한 마디에 이 소녀는 완전히 제정신이 든다.
그 이전까지 동네에서 아무도 자기를 ‘아가씨’로 불러준 적이 없었다.
아마도 나이는 찼지만, 아직 초등학생이었기 때문이리라.
자기 자신 역시, 나이는 많아도 항상 자신이 어리다고 생각했다.
그 한 마디를 들은 후부터, 이 소녀는 정신이 완전히 나가버렸다.
그 때부터 더 이상 아이들과 어울려 ‘고무줄놀이’도 하지 않았다.
동생하고 싸우지도 않았다.
오로지 하는 일이란, 자기를 ‘아가씨’로 불러 주었던 선생님
이 선생님은 바로 자기 반의 담임선생님이셨다.
그 분을 마음속으로 사모하는 일을 계속 하게 되는 영화다.
여러분, 주님께서 내 이름을 한 번 불러 주실 때, 내 영혼이 살아난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 가운데 우리 이름을 불러주셨다.
그 때부터 우리 인생의 목표, 의미, 생활이 완전히 달라졌다.
그 때부터 주님을 사랑하고 사모하는 인생으로 완전히 바꿔진 것이다. <이상 모두 펀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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