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오디게아 교회에 주신 말씀 계3:14~22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들을 세 그룹으로 나누어봅니다.
첫째, 예수님의 책망은 전연 받지를 않고, 칭찬만 받은 교회가 있었습니다.
서머나 교회와 빌라델비아 교회였습니다.
둘째, 예수님의 칭찬과 책망을 동시에 받은 교회가 있었습니다.
에베소 교회, 버가모 교회, 두아디라 교회 및 사데 교회였습니다.
셋째, 예수님의 칭찬은 전연 없고, 예수님의 책망만 받은 교회가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라오디게아 교회였습니다.
이처럼 라오디게아 교회는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들 가운데서 최악의 상태였습니다.
▲점진적으로 더 타락해 가는 교회
예수님의 책망을 받았던 교회들을 차례대로 살펴보면,
각 교회가 보여주었던 문제의 심각성이 갈수록 더 심해지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에베소 교회는 처음 사랑을 버렸습니다.
-그러더니 버가모 교회는 세상과 타협했습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두아디라 교회는 죄로 얼룩졌습니다.
-그 결과 사데 교회는 살았다 하는 이름만 가졌을 뿐, 아예 영적으로 죽었습니다.
그렇지만 사데 교회는 라오디게아 교회보다는 나았습니다.
왜냐하면 교회 안에는 그 옷을 더럽히지 않은 자 몇 명이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특징을 한 마디로 말하면
라오디게아 교회는 예수님을 문 밖에 세워둔 교회였습니다.
따라서 라오디게아 교회 안에는 예수님이 계시지 않으셨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그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그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었겠습니까?
예수님은 라오디게아 교회의 문 밖에 서서, 그 문을 두드리셨습니다.
문을 열기 위해서 많은 사람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단 한 사람이라도 문을 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라오디게아 교회는 아무도 문을 열어주지를 않았습니다.
만일 라오디게아 교회 안에 구원을 받은 자들이 단 몇 명만 있었더라도,
예수님은 분명 그들을 언급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이들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습니다.
이는 라오디게아 교회 안에는 구원받은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었지 않았는가,
하는 추측을 조심스럽게 해 봅니다.
◑도시 라오디게아
도시 라오디게아는 빌라델비아에서 아래쪽으로 약 70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지리적으로 라오디게아는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가 위치한 도시들 중에
가장 남쪽이면서 가장 동쪽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이 도시는 주전3세기 수리아의 안티오커스 2세에 의해서 세워졌습니다.
안티오커스 2세는 루커스(Lycus) 계곡에 이 도시를 건설했습니다.
그리고는 이 도시를 자기 아내의 이름을 따서 라오디게아라고 불렀습니다.
루커스 계곡에는 세 개의 도시가 있었습니다.
라오디게아를 중심으로 북쪽으로 약 10km 떨어진 곳에 히에라볼리가 있었습니다.
또한 라오디게아에서 동쪽으로 약 16km 떨어진 곳에 골로새가 있었습니다.
이들 세 도시는 바울 서신에도 긴밀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골4:13, 그가(에바브라) 너희(골로새)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히에라볼리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많이 수고하는 것을 내가 증거하노라
바울은 에바브라가 골로새와 라오디게아와 히에라볼리에 있는 자들을 위해서
많이 수고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들 세 도시들은 모두가 루커스 계곡에 세워진 자매 도시들로서
서로 인접해 있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과 관련해서 도시 라오디게아의
그 당시 특징을 네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1. 라오디게아는 물 사정이 매우 나빴습니다.
라오디게아의 북쪽에 있는 히에라볼리는 온천도시였습니다.
오늘날 파묵깔레라고 불리는 히에라볼리는
지금도 많은 관광객들이 온천욕을 하기 위해서 찾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히에라볼리에서 나오는 뜨거운 물도 라오디게아까지 흘러오면
식어서 미지근해졌습니다.
반면에 라오디게아의 동쪽의 골로새에서는 얼음같이 차가운 물이 솟아났습니다.
그렇지만 그 물도 라오디게아까지 흘러 내려오다 보면 역시 미지근해졌습니다.
게다가 이 미지근한 물 속에는 다량의 석회석과 철분,
그리고 각종 폐수들이 섞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라오디게아에 있는 미지근한 물은 그대로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물을 마시면 몸에 해로웠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그 물은 맛과 냄새가 역겨웠습니다.
그래서 그 물을 마시더라도 그대로 토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와 관련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계3: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라오디게아의 물) 더웁지도 아니하고(히에라볼리의 물)
차지도 아니하니(골로새의 물)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어쩔 수 없이 라오디게아는 막대한 비용을 들여서 돌로 큰 수도관을 만들었습니다.
지름이 1m나 되는 거대한 수도관이었습니다.
라오디게아는 이 수도관을 통해서 오염되지 않은 물을 멀리서 끌어와야 했습니다.
▲2. 라오디게아는 부자 도시였습니다.
라오디게아는 교통의 요충지로서 오늘날로 말하면
소아시아의 여러 곳을 연결하는 허브 도시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라오디게아는 금융산업으로 뜨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곳에는 여러 은행들이 세워졌습니다.
로마의 정치인이었던 키케로(Cicero, 106~43B.C.)는 거액의 신용장을
이곳에서 현금으로 바꾼 적이 있었습니다.
또한 주후 60년 대지진으로 라오디게아가 파괴되었을 때, 이 도시는
로마의 지원을 거절하고 자력으로 도시를 이전보다 더 아름답게 재건했습니다.
그만큼 라오디게아의 금융 자산은 대단했습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들의 부유함과 그로 인한 그들의 거만한 자세를 엿볼 수 있습니다.
계3: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3. 라오디게아는 양모 산업으로 유명했습니다.
루커스 계곡에는 검은 양들이 많이 사육되고 있었습니다.
이들 검은 양들은 까만 색깔의 윤기가 나는 털을 제공했습니다.
라오디게아는 이것으로 오늘날의 밍크코트처럼 값비싼 옷을 만들었습니다.
이는 그 당시의 패션을 주도할 만큼 아주 인기가 있는 옷이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계3:18,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그들은 검은 양털로 만든 옷을 입고서 한껏 뽐내기를 좋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눈에는 그들이 벌거벗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이 예수님에게서 흰 옷, 곧 의의 옷을 사 입어서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4. 라오디게아에는 유명한 의학교가 있었습니다.
이곳에서는 각종의 약들이 만들어졌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안약이 유명했습니다.
이 안약을 구하기 위해서 각처에서 사람들이 많이 몰려들었습니다.
이 안약은 라오디게아가 속한 지방의 이름을 따서 “브루기아의 분말”
(Phrygian Powder)이라고 불렸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계3:18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예수님은 그들이 예수님에게서 신령한 안약을 사서
자신들의 심령에 바르기를 바라셨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은 그들의 영안이 뜨이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영안이 열려야, 그들은 자기들의 비참한 영적 상태를
바로 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
성경은 라오디게아 교회의 설립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오늘 본문 이외에도 라오디게아 교회와 관련된
몇 가지 단편적인 기록들이 남아 있습니다.
이들을 통해서 라오디게아 교회의 설립과 당시의 형편을 살펴보겠습니다.
▲1. 라오디게아 교회의 설립 배경
사도 바울은 루커스 계곡을 방문한 적이, 성경 기록에는,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는 루커스 계곡에 위치해 있는 세 도시 곧 골로새, 라오디게아,
히에라볼리에 직접 가서 복음을 전한 적은 없었습니다.
골2:1, 내가 너희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무릇 내 육신의 얼굴을 보지 못한 자들을 위하여
어떻게 힘쓰는 것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리
바울은 골로새나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얼굴을 대면해서 본 적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그들을 위하여 힘쓰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루커스 계곡에 있는 세 교회들을 간접적으로 세웠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골1:6,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
바울은 제3차 전도여행 중, 에베소에서 삼 년 동안 복음을 전했습니다.
특별히 그가 두 해 동안 두란노 서원에서 복음을 전할 때, 그 열매는 대단했습니다.
각처에서 온 수많은 사람들이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듣고서,
자기들의 고향에 돌아가 교회를 세웠습니다.
골1:7, 이와 같이 우리와 함께 종 된 사랑하는 에바브라에게 너희가 배웠나니
그는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꾼이요
골4:12, 그리스도 예수의 종인 너희에게서 온 에바브라가 너희에게 문안하니
저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애써 기도하여 너희로 하나님의 모든 뜻 가운데서
완전하고 확신 있게 서기를 구하나니
골4:13, 그가 너희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히에라볼리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많이 수고하는 것을 내가 증거하노라
골로새 사람 에바브라는, 에베소에서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 뒤에 그는 자기의 고향으로 되돌아가
그곳에 골로새 교회를 세웠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인근 마을들인
라오디게아와 히에라볼리에도 각기 교회를 세웠을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라오디게아 교회의 직접적인 설립자는 에바브라로 볼 수 있습니다.
에바브라는 바울의 제자로서, 바울을 대신하여 그 교회를 세웠습니다.
따라서 라오디게아 교회는 소아시아의 다른 교회들과 마찬가지로
바울이 간접적으로 세운 교회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2. 라오디게아 교회의 당시 형편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루커스 계곡에는 세 개의 도시가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골로새, 라오디게아, 그리고 히에라볼리였습니다.
이들 세 도시는 서로 인접해 있어서
세 교회들의 사정과 형편도 서로 비슷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 갇혔을 때였습니다.
그 때 골로새 교회는 이단사상으로 인해서 심각할 정도로 몸살을 앓고 있었습니다.
이단 사상의 주된 이슈는 기독론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의 이단 사상은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하나의 피조물에 불과할 뿐이라고
이단 사상은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주장에 따르게 되면,
예수님을 믿어야 할 이유도 결국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골2:8,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
바울은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는 이단 사상을 가리켜서 철학이며, 헛된 속임수며,
사람의 유전이며, 세상의 초등학문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당시 골로새 교회는 이러한 이단 사상 때문에 큰 혼란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골로새 교회는 에바브라를,
로마의 감옥에 갇혀있는 바울에게로 파송했습니다.
바울은 골로새서를 통해서 그 당시 퍼져나가던 이단 사상의 잘못된 기독론을
반박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분명하게 밝혔습니다.
골1:15,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골1: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골1: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형상 자체이십니다.
아울러 예수님은 창조된 피조물이 아니라, 만물의 창조자이십니다.
왜냐하면 만물이 그에게서, 또한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그 당시의 이단 사상은 잘못된 기독론으로
골로새 교회를 매우 혼란스럽게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사정은 인근에 있는 라오디게아 교회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골로새서 말미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골4:16 이 편지를 너희에게서 읽은 후에 라오디게아인의 교회에서도 읽게 하고
또 라오디게아로서 오는 편지를 너희도 읽으라
사도 바울은 자신이 기록한 골로새서를
라오디게아 교회에서도 읽게 하라고 말씀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골로새 교회와 마찬가지로 라오디게아 교회도 똑같이
이단 사상에 의해서 야기된 기독론의 문제를 겪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골로새서를 기록한 지 삼십 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 때 라오디게아 교회의 형편은 어떠했겠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이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낸 편지, 곧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정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라오디게아 교회는 이단 사상을 물리치지를 못했습니다.
오히려 라오디게아 교회는 이단적 기독론에 완전히 물들어버렸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면서,
예수님을 교회의 문 밖으로 내쫓고 말았습니다.
결과적으로 라오디게아 교회는 예수님이 없는 교회,
예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교회, 구원받지 못한 교회가 되고 만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라오디게아 교회는 예수님의 칭찬은 전혀 받지를 못하고,
예수님의 책망만 잔뜩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죄와 허물로 죽은 인간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아무리 교회에 오래 동안 출석을 해도,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
베드로의 이 신앙 고백이 우리 모두의 신앙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줄 내가 믿나이다”(요11:27).
또한 마르다의 이 신앙 고백이 우리 모두의 신앙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20:28).
마찬가지로 도마의 이 신앙 고백이 우리 모두의 신앙 고백이 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편지의 발신인 3:14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①아멘이시요 ②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오
③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계3:14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나타나신 예수님의 모습은 교회마다 달랐습니다.
이는 각 교회의 사정이 서로 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각 교회의 사정에 맞추어,
의도적으로 각기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셨던 것이었습니다.
▲1. 예수님은 아멘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아멘”이라는 단어는 본시 히브리어였습니다.
히브리어는 구약성경에 쓰여진 언어입니다.
이것을 헬라어에서 그대로 음역해서 아멘이라고 사용했습니다.
영어나 우리말에서도 역시 아멘이라고 그대로 음역하고 있습니다.
아멘이라는 히브리어 단어의 뜻은 진리입니다.
구약성경에서는 아멘, 곧 진리라는 단어가 하나님을 부르는 칭호에 사용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단어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그대로 사용되었다는 것은
예수님의 신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65:16, 이러므로 땅에서 자기를 위하여 복을 구하는 자는
진리의 하나님(아멘의 하나님)을 향하여 복을 구할 것이요
땅에서 맹세하는 자는 진리의 하나님(아멘의 하나님)으로 맹세하리니
이는 이전 환난이 잊어졌고 내 눈앞에 숨겨졌음이니라
이와 같이 하나님이 구약성경의 아멘이시라면, 예수님은 신약성경의 아멘이십니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는 예수님의 신성, 곧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신 것을 우리에게 의미합니다.
물론 예수님의 신성을 나타내는 단어는 이외에도 많이 있습니다.
예컨대 거룩, 공의, 영원, 영광 등등입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라오디게아 교회에 하필이면 ‘아멘’으로 나타나셨습니까?
특별한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고후1:20,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모든 것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됩니다.
예컨대 죄 사함의 약속도, 구원의 약속도, 영생의 약속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우리에게 이루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 밖에서는 그 어떠한 약속도 이루어지지를 않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약속들이 우리에게 성취되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아멘이신 예수님이 있어야 합니다.
아멘이신 예수님을 문 밖에 세워두지 말아야 합니다.
아멘이신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셔야 하고,
또한 우리가 아멘이신 예수님 안에 거해야 합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에 믿음으로 아멘 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모든 사역에도 믿음으로 아멘 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무엇보다도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에
믿음으로 ‘아멘’ 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라오디게아 교회는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아멘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귀가 가려워서 세상의 허탄한 이야기 듣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초등 학문에 빠져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를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아멘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멘이신 예수님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에게 약속하신
죄 사함, 구원, 영생 등등을 전혀 받아 누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오로지 아멘이신 예수님, 진리이신 예수님의 말씀에만 아멘 합시다.
그리함으로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모든 구원의 축복들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풍성히 누릴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2. 예수님은 충성되고 참된 증인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요3:31,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서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요3:32, 그가 그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되 그의 증거를 받는 이가 없도다.
예수님은 위로부터 오신 이십니다. 예수님은 만물 위에 계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이 땅에 보내신 메시야이십니다.
예수님은 충성되고 참된 증인으로서 하나님 나라에 속한 모든 신령한 일들을
충성되고 참되게 우리에게 증거하셨습니다.
그러나 라오디게아 교회는 예수님의 증거를 받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는 이단 사상의 거짓된 증거를
받았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함으로서
구원을 얻지 못하는 자리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의 증거를 믿음으로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훌륭한 스승, 위대한 성현의 가르침 정도로만 생각하지 맙시다.
예수님이 증거하신 모든 것들이 바로 하나님의 계시임을 전적으로 믿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3. 예수님은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그 당시의 이단 사상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지를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육신을 가지셨기 때문에, 예수님은 하나님이 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에 불과할 뿐이라고 주장을 했습니다.
불행하게도 라오디게아 교회는 이와 같은 이단적 기독론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그저 믿음의 스승이나 위대한 선지자쯤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라오디게아 교회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으로 나타나셨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이단 사상에 빠진 라오디게아 교회가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은 하나님의 피조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라고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이는 온 세상 우주 만물이 예수님에 의해서 창조되었다는 뜻입니다.
성경은 이 사실을 계속해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골1: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히1:2,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이단적인 기독론에 흔들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의 기독론은 분명하고도 확고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누구이십니까?
예수님은 아멘이시며,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며,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아멘 하십시다.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신 예수님이 증거하신
모든 것들을 믿음으로 받으십시다.
아울러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예수님 밖에 없다는 사실을 믿으십시다.
그리할 때 거듭난 사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태어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아울러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그 모든 축복들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풍성히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1907년 평양대부흥, 본문의 설교로 촉발되다.
1907년 1월 6일 주일 저녁예배 때였습니다. 평양의 장대현 교회에서는
평안남도 도사경회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그 날 저녁 집회에는 그 당시 평양신학교의 졸업반으로서 조사의 직분으로
장대현 교회를 섬기고 있던 길선주 장로님이 말씀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설교의 제목은 『이상한 귀빈과 괴이한 주인』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중심으로 한 설교였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문 밖에 서서 그 문을 두드리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빗대어서
설파한 내용이었습니다. 그 날 설교의 요지는 이러했습니다.
“우리를 찾아오신 예수님은 <이상한 귀빈: 설교제목>이십니다.
존귀하신 분이 비천한 땅에 오셨으니 이상한 귀빈이시고,
귀하신 몸으로 문 밖에서 오래 기다리시니 이상한 귀빈이십니다.
또한 전능하신 분이 문을 열어달라고 간절히 두드리시니 이상한 귀빈이십니다.
아울러 주인이 아니면서도 주인처럼 집안에 들어앉아 있는 사람은
<괴이한 주인>입니다.
자애하신 귀빈을 환영하지 않으니 괴이한 주인이며,
간절하신 음성을 듣지 않으니 또한 괴이한 주인입니다.
그리고 굳게 닫은 방문을 열지 않으니 정말로 괴이한 주인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이 섬기고 있는 장대현 교회가,
그리고 자신을 비롯한 그날 집회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바로 괴이한 주인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리고 난 뒤에 그는 큰 소리로 이렇게 외쳤습니다.
“문을 엽시다. 문을 엽시다. 문을 열고 존귀하신 예수님을 영접합시다.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성령님을 영접합시다.”
설교를 마치고 난 뒤에 기도가 시작되었습니다.
여기 저기에서 ‘아이고 아이고’라는 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통회 자복하는 소리였습니다. 교회 안은 순식간에 온통 울음바다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모두가 회개하는 마음으로 마음의 문을 활짝 열었습니다.
그 날 예수님은 각자의 마음 안으로, 그리고 장대현 교회 안으로 들어오셨습니다.
1907년에 있었던 평양대부흥운동은 그렇게 해서 시작이 되었습니다.
올해로 평양대부흥운동 100주년을 맞이하는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회개와 대부흥의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행여 우리는 지금 예수님을 문 밖에 세워두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이 들어오시고 싶어도 들어오실 수가 없을 정도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은 세상적이며 지저분한 것들로 가득 차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애통하는 심령으로 우리의 죄를 회개합시다.
그리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심령으로 열심을 내어 예수님을 영접합시다.
그리함으로서 100년 전 활활 타오르는 불길처럼 강하게 일어났던 대부흥의 역사가
다시 한번 이 땅에 일어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책망1. 미지근함 3:15
①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②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덥지도 아니하도다.
③네가 차든지 덥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계3:15
▲1.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15
예수님의 눈은 불꽃과 같습니다. 그러기에 모든 것을 정확하게 다 아십니다.
예수님은 라오디게아 교회의 모든 행위를 낱낱이 알고 계셨습니다.
그들의 행위는 그들이 구원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물론 우리는 우리의 행위로 구원을 받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구원을 받았느냐, 구원을 받지 못했느냐?’ 하는 것은
무엇으로 알 수 있습니까?
예수님의 말씀대로, 나무는 그 열매로 알 수 있습니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각 사람의 믿음의 유무와 구원의 여부는 그의 행위로 알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롬2:6,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롬2:7,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롬2:8,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
왜 하나님은 각 사람의 ‘믿음’에 따라서 보응하신다고 말씀하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에 따라서 보응하신다고 말씀하십니까? ★
각 사람의 믿음은 그의 행위에 그대로 드러나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야고보서에서도 강조되고 있는 사실입니다.
약2: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약2: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기 때문에,
우리의 행위야 어떠하든지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는 스스로를 속이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의 행위가 믿지 않는 자들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면,
실상 우리에게는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있다면, 우리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면
우리의 행위도 당연히 달라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이 분명하다면,
우리에게는 자연히 아름다운 행위가 나타날 것입니다.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라오디게아 교회의 행위를 아신다고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난 뒤 곧 이어서 그들의 영적 상태가 어떠한가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무는 그 열매로 알듯이, 라오디게아 교회의 영적 상태는
그들의 행위에 그대로 나타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라오디게아 교회의 영적 상태를 이렇게 표현하셨습니다.
▲2.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15
이는 예수님이 라오디게아의 물 사정을 생각하시면서,
라오디게아 교회의 영적 상태를 비유적으로 표현하신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 루커스 계곡에는 세 개의 도시가 서 있었습니다.
라오디게아의 동쪽에 있는 골로새에서는 얼음같이 차가운 물이 솟아났습니다.
골로새의 높은 산에서 흘러나오는 차가운 생수는
마시기만 해도 정신이 상쾌해지는 물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물은 라오디게아까지 흘러 내려오다 보면 어느 듯 미지근해졌습니다.
반면에 라오디게아의 북쪽에 있는 히에라볼리는 온천도시였습니다.
히에라볼리에서 나오는 뜨거운 물도 라오디게아까지 흘러오면 미지근해졌습니다.
이와 같이 라오디게아의 물은 골로새의 물처럼 차지를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히에라볼리의 물처럼 더웁지도 않았습니다.
라오디게아의 물은 미지근했습니다.
예수님은 라오디게아 교회의 영적 상태가 바로 그러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곧 이어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15절 하반부의 말씀입니다.
▲3.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5
골로새의 차가운 물은 차가운 대로 사람들에게 유익을 줍니다.
갈증을 시원하게 해소시켜 주기 때문입니다.
반면 히에라볼리의 더운 물은 더운 대로 사람들에게 유익을 줍니다.
질병의 치료에 효과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라오디게아의 미지근한 물은 어떠합니까?
◑책망2. 토하여 내치리라 3: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계3:16
라오디게아의 미지근한 물 속에는 다량의 석회석과 철분, 그리고 짐승들의 오물과
주변의 모직 공장에서 나오는 각종 폐수들이 섞여 있었습니다.
그 결과 그 물은 몸에 해로웠습니다. 맛과 냄새도 역겨웠습니다.
그래서 그 물을 마시면 토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라오디게아 교회의 영적 상태는 차지도 아니하고 덥지도 아니했습니다.
그들은 미지근했습니다. 그들의 미지근함은 다른 사람들에게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하고, 오로지 해가 될 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미지근하여 해만 끼치는 그들의 영적 상태를 역겹게 여기셨습니다.
◑책망3. 영적 착각을 신랄하게 책망 3:17
①네가 말하기를 ②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③네 곤고한 것과, 가련 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3:17
▲1. “네가 말하기를,”
라오디게아 교회가 스스로 하는 말은 대단하게 들릴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삼중적인 말로 자신들을 과시했습니다.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17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들이 하는 말이 아닙니다.
이 사실은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마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중요한 것은 “네가 말하기를”이 아닙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가 중요한 것입니다. :15
다시 말해서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아니라,
그의 삶에서 나타나는 실제적인 행위입니다.
예컨대 마태복음 19장에 나오는 부자 청년을 생각해봅시다.
그는 예수님 앞에서 자기가 어릴 때부터 모든 계명을 다 지켰다고 말했습니다.
부자 청년의 말은 대단하게 들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에게 이렇게 명하셨습니다.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부자 청년은 근심했습니다.
그러더니 결국 그 부자 청년은 예수님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에게 그럴듯한 말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실제적인 행위는 없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를 무엇으로 판단하십니까?
“네가 말하기를.”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말로 우리를 판단하지 않으십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예수님은 우리의 행위로 우리를 판단하십니다.
따라서 만일 우리가 구원받은 성도라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삶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제는 모든 어둠의 일을 벗어버립시다. 날마다 빛 가운데로 걸어갑시다.
아울러 언제나 사랑 가운데서 행하는 우리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2.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17
이미 우리가 살펴본 대로 라오디게아는 부자 도시였습니다.
그곳은 교통의 요충지로서 오늘날로 말하면 소아시아의 여러 곳을 연결하는
허브 도시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라오디게아는 금융산업으로 뜨면서
많은 부를 축적했습니다.
주후 60년 대지진으로 도시 라오디게아가 크게 파괴되었습니다.
로마의 황제는 라오디게아를 재건하기 위해서 재정을 지원하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라오디게아는 그 지원을 사양했습니다.
그리고는 자력으로 도시를 이전보다 더 아름답게 재건했습니다.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17
예수님이 지적하신 대로 라오디게아는 부자 도시였습니다. 그들은 부요했습니다.
그들은 부족한 것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로마의 지원금도 거절하고,
지진으로 폐허가 된 도시를 자력으로 재건했습니다.
물론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의도는 다른데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도시 라오디게아의 물질적 풍요에 대해서 말씀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서 그 당시 라오디게아 교회의
영적 자만심을 지적하셨던 것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그 당시 라오디게아 교회는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는 이단 사상에 완전히 물들어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 이단 사상을 가리켜서 일명 영지주의(靈智主義, Gnosticism)
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영지주의는 헬라의 이원론(dualism)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영지주의자들은 영은 선하지만, 육은 악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예수님은 결코 하나님이 되실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육을 가지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영지주의자들은 예수님과 예수님 말씀만으로 족하게 여기지를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믿는 자들을 어리석다고 비웃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자기들이야말로 신령한 지식, 곧 영지(靈智)를 가진 자들이라고
자랑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않고, 자기 의를 힘써 세웠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문 밖에 세워두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의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걷는 길은 넓은 길이었습니다.
또한 그들이 짓는 집도 모래 위에 짓는 집이었습니다.
▲3. 착각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스스로 속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여 예수님은 5가지의 표현으로
그들의 영적 상태를 적나라하게 나타내셨습니다.
*그들은 곤고했습니다(wretched).
그들의 영혼은 피곤하고 고단했습니다.
자기들에게 있는 죄의 무거운 짐을 해결하지 못하고
그대로 지고 있어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의 영혼은 곤고하여 평안함이 없었습니다.
롬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롬7: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었을 때는 자기 속에 있는 죄악 때문에
영혼의 곤고함을 심하게 느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혼의 곤고함에서 해방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그의 모든 무거운 짐을 대신 맡아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와는 달리 라오디게아 교회는 배역한 교회요,
예수님을 문 밖에 세워둔 교회였습니다.
그러니 누가 그들의 무거운 죄의 짐을 맡아주겠습니까?
라오디게아 교회는 자기들의 모든 죄 짐을 그대로 짊어져야만 했었습니다.
자연히 그들의 영혼은 곤고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가련했습니다(miserable).
라오디게아 교회는 이단 사상인 영지주의에 빠져있었습니다.
그래서 자기들은 신령한 지식을 소유하고 있기에,
당연히 자기들은 다른 사람들이 선망하는 대상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실상은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서 동정을 받아야 하는 가련한 존재였습니다.
불쌍한 존재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들의 가련함을 알지를 못했습니다.
누가복음 18장에는 성전에서 기도하는 바리새인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는 영적으로 교만해서, 하나님께 기도하면서도 자신을 과시하기에만 바빴습니다.
그 결과 그는 죄 사함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는 의롭다 하심을 받지 못하였기에, 멸망의 백성이 되고 말았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도 바리새인처럼 자신의 가련함을 알지를 못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지를 않았습니다.
결국 라오디게아 교회는 죄 사함을 받지 못했기에
구원받지 못한 가련한 존재가 되어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 그들은 가난했습니다(poor).
도시 라오디게아는 금융업이 발달해서, 부자 도시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영적 상태는 가난했습니다.
이 점에서 라오디게아 교회는 예수님의 칭찬만을 받았던 서머나 교회와는
정반대였습니다. 예수님은 서머나 교회를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계2:9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서머나 교회는 궁핍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서머나 교회가
‘실상은 부요한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반대로 라오디게아 교회는 금융업 등으로 부요한 부자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가리켜 ‘가난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10:10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하십니다.
우리의 삶은 예수님 안에서만 풍성을 누리게 됩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예수님을 문 밖에 세워두었기 때문에,
풍성함을 누리지 못하고 영적으로 가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눈이 멀었습니다(blind).
라오디게아는 “브루기아의 분말”이라는 안약으로 유명했습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그들의 영적 상태는 눈먼 소경이었습니다.
그들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곤고하고 가련한 상태를 보지도 못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걷는 길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 앞에 놓여 있는 사망도 보지를 못했습니다.
이처럼 라오디게아 교회는 영적으로 눈이 멀어 보지를 못하면서도,
자기들은 영안이 밝아 모든 것을 밝히 본다고 생각했습니다.
일찍이 예수님은 보지를 못하면서 본다고 생각하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이렇게 책망하셨습니다.
요9:4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마15:14, 그냥 두어라 저희는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하신대
마23:1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마23:1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마치 라오디게아의 미지근한 물이 몸에 해로웠던 것처럼,
영적 소경이었던 라오디게아 교회도 하나님의 나라에 해만 끼칠 뿐이었습니다.
왜냐 하면 그들은 다른 사람들까지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지게 함으로
멸망의 길로, 사망의 길로 인도했기 때문이었습니다.
* 그들은 벌거벗었습니다(naked).
라오디게아는 양모산업으로 유명했습니다.
그 당시 루커스 계곡에는 검은 양들이 많이 사육되고 있었습니다.
이들 검은 양들은 까만 색깔의 윤기가 나는 털을 제공했습니다.
라오디게아는 이것으로 오늘날의 밍크 코트처럼 값비싼 옷을 만들어 입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들을 가리켜서 벌거벗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은 죄악으로 더럽혀진 자신들의 영혼을 가리워 줄
의의 옷을 입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죄를 지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수치스러운 모습을 가리기 위하여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치마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부질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이 만든 옷은 그들의 죄 된 모습을 결코 가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그들을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하나님은 짐승의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그들을 입히셨습니다.
그제야 비로소 그들의 수치는 가리어졌습니다.
이 사실은 하나님의 의만이 죄로 인한 수치를 가릴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영지주의에 물든 라오디게아 교회에는 인간의 의만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하나님이 입혀주시는 흰 옷,
곧 의의 옷이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벌거벗은 몸 그대로였던 것입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라오디게아 교회는 곤고했고, 가련했고, 가난했고,
눈멀었고, 벌거벗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기들은 부자라고,
자기들은 부요하기 때문에 전혀 부족한 것이 없다고 으스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세리처럼 애통하는 마음으로 자기의 가슴을 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창기처럼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그 발에 입 맞추며
향유를 붓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저 자기 의에 사로잡혀서 예수님이 필요 없다고
예수님을 문전박대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 당시에 자기 의에 사로잡혀 예수님을 배척하던 자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21:31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예수님은 자기 의에 사로잡힌 바리새인들보다는 하나님의 은혜를 갈구하는
세리들과 창기들을 너 낫게 여기셨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으로 교만해서 자기 의에 사로잡혀 있는 자들을
예수님은 역겹게 생각하십니다. 그 입에서 토하여 내치실 것입니다.
▲내 불신앙적인 말과 행위를 다 아신다.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우리가 영적으로 교만했다면, 이 시간 회개합시다.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우리가 예수님을 문 밖에 세워두었다면 회개합시다.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우리의 태도가 예수님을 역겹게 만들었다면 회개합시다.
이제 우리 모두 심령의 문을 활짝 엽시다. 예수님을 우리 중심에 모시어 들입시다.
그리고 이제는 말씀 위에 굳게 서서 말씀에 따라 순종하면서 삽시다.
“네가 말하기를.” :17
예수님은 우리 각자가 하는 말을 다 듣고 계십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예수님을 역겹게 만드는 가증스러운 말은
아예 입 밖에 내지 맙시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15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예수님의 책망을 받을 행위를 삼갑시다.
특별히 다른 사람을 실족시켜서 예수님의 몸 된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에
해를 끼치는 행위는 엄히 삼갑시다.
그러한 행위에 대해서는 예수님이 그 책임을 엄하게 물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우리에게는 믿음의 행위, 선한 행위, 부르심에 합당한 행위가 있어서
우리 모두 예수님의 칭찬을 받도록 합시다.
이제 우리 모두 세상의 빛으로 어두운 세상을 밝히며,
세상의 소금으로서 타락한 세상을 바로 잡아갑시다.
◑명령(시정 조치) 3: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3;18
당시 라오디게아 교회는 영지주의라는 이단 사상에 물들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면서, 예수님을 배역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교회 밖으로 내쫓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교회문 밖에 세워두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모습은 위선적이었습니다.
실상 그들은 영적으로 곤고했고, 가련했고, 가난했고, 눈멀었고, 벌거벗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자기들에게는 영지, 곧 신령한 지식이 있기에,
자기들은 영적으로 부자며 부요하며 부족한 것이 없다고 으스대었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배역한 라오디게아 교회를 당장 심판해버리실 수도 있으셨습니다.
역겹고 구역질나는 것을 입에서 토하여 내치는 것처럼,
예수님은 외식하는 라오디게아 교회를 산산조각 내어서 바람에 나는 겨처럼
날려버리실 수도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시지를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배역한 라오디게아 교회를 책망하신 후에,
곧 이어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내가 너를 권하노니.”
예수님은 부드러운 음성으로 그들을 구원으로 초청하셨습니다.
What a grace! 참으로 놀라운 은혜였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예수님을 배역하고, 예수님을 역겹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긍휼히 여기시면서, 그들에게 구원의 길을 제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 18절에서,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여
세 가지를 예수님에게서 사라고 명하셨습니다.
이들 세 가지는 도시 라오디게아가 자랑하던 것들과 관련이 있었습니다.
▲1. 불로 연단한 금을 사라
라오디게아는 부자 도시였습니다.
그곳의 사람들은 많은 금을 사 모으기를 좋아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라오디게아 교회는 자기들이 영적으로도 부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자기들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없는 신령한 지식,
곧 영지(靈智)를 가졌다는 이유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지적하신 대로, 실상 그들은 영적으로 가난한 자들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우리에게 풍성한 삶을 허락하시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그런데 라오디게아 교회에 안에는 예수님이 계시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영적으로 가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영적으로 가난한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여,
예수님에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라고 명하셨습니다.
그것만이 라오디게아 교회가 자신들의 영적인 가난함을 면하고,
진정 영적으로 부요해질 수 있는 길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불로 연단한 금”은 무엇을 상징합니까?
성경은 우리의 ‘믿음’을 금에 비유해서 설명하기도 합니다.
금이 육신의 가난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하는 것처럼,
믿음은 영혼의 궁핍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하기 때문입니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벧전1:7
라오디게아 교회는 예수님을 향하여 닫았던 문을 열어야 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문을 여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라도 들어가셔서,
그에게 “불로 연단한 금,” 곧 순수한 믿음을 제공하실 것입니다.
그리할 때 그 사람은 비로소 자신의 영적 가난을 면하게 될 것입니다.
그는 믿음에서 부요하게 될 것입니다. 아울러 그는 예수님이 주시는
생명을 얻게 되고, 또한 예수님 안에서 풍성한 삶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2. 흰 옷을 입으라
그 당시 라오디게아는 양모 산업으로 유명했습니다.
그곳 사람들은 검은 양털로 만든 검은 옷을 입고서 한껏 뽐내었습니다.
(중동에는 검은 색깔 양도 꽤 많습니다)
영적으로 라오디게아 교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영지주의에 빠져서,
검은 옷으로 상징되는 인간의 의만 뽐내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사64:6
인간의 의는 더러운 옷과 같습니다.
그것으로는 죄로 인한 영혼의 수치를 결코 가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이 지적하신 대로,
라오디게아 교회는 벌거벗은 몸 그대로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서,
그들이 예수님에게서 흰 옷을 사서 입을 것을 명하셨습니다.
물론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흰 옷은 예수님의 보혈로 죄 씻음 받은 자,
곧 구원받은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의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계7:9
장로 중에 하나가 응답하여 내게 이르되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뇨
계7:13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계7:14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피만이
죄로 얼룩진 우리의 더러운 옷을 깨끗하게 씻어 희게 하십니다.
따라서 우리 영혼의 벌거벗은 수치를 가리워줄 의의 옷은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만 구할 수 있습니다.
▲3. 참된 안약을 가지라
그 당시 라오디게아에 있던 의학교에서는 ‘브루기아의 분말’(Phrygian Powder)
이라는 유명한 안약을 제조했습니다.
각처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 약을 구하기 위해서 라오디게아를 찾아왔습니다.
이처럼 “브루기아의 분말”은 라오디게아가 자랑하던 안약이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 당시 영지주의에 물든 라오디게아 교회는
자기들에게는 다른 사람들에게 없는 영지, 곧 신령한 지식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남들이 보지 못하는 신령한 세계를 자기들은 밝히 볼 수 있다고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지적하신 대로, 실상 그들은 영적으로 눈먼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곤고하고 가련한 상태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넓은 길을 걷고 있음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 앞에 놓여있는 멸망과 사망도 보지를 못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신령한 안약을 예수님에게서 사서
그들의 심령의 눈에 바르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리할 때 예수님의 빛이 그들을 환하게 비출 것입니다.
그리할 때 비로소 그들의 영안이 열리며, 그들은 영적으로 밝히 보게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라오디게아 교회는 가난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예수님에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야했습니다.
그들은 벌거벗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예수님에게서 흰 옷을 사야했습니다.
그들은 눈멀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예수님에게서 안약을 사야했습니다.
◑격려 3:19~20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계3:19~20
▲결핍한 위의 세 가지를 얻기 위해서 해야 할 일
그러면 라오디게아 교회가 이들 세 가지를 예수님에게서 사기 위해서,
그들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했습니까?
그 구체적인 방법이 오늘 본문 19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계3:19
우선 예수님은 여기서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시고 징계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책망은 말로 표현하는 것이지만, 징계는 행동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말로 책망해서 듣지 않을 때, 그 다음에는 자연히 행동으로 표현되는 징계가
따라올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배역한 라오디게아 교회는 예수님의 책망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징계를 받아야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긍휼에 풍성하신 사랑으로 그들을 구원으로 초청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징계를 받아 멸망에 이르기를 원치 아니하셨던 것입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 겔33:11
하나님은 악인이 멸망하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은 악인이 회개하고 구원받는 것을 바라십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타락한 세상이지만, 긍휼에 풍성하신 사랑으로
자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요3:16~18
이와 같이 하나님은 타락한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자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이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주어집니다.
그러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이 주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배역한 라오디게아 교회가 예수님의 징계와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오늘 본문 19절 하반부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이에 대한 뜻은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잘 말씀해주셨습니다.
마5: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회개하라)
마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열심을 내라)
그 동안 라오디게아 교회는 열심히 자기의 인간적인 의를 세웠습니다.
이제 그들은 열심의 방향을 바꾸어야 했습니다.
이제부터 그들은 성경이 말씀하는 하나님의 의를 추구하는 일에 열심을 내어,
하나님의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되어야 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지금까지 예수님을 배역하고, 예수님을 교회문 밖에 세워두었습니다.
이제 그들은 자기들이 그 동안 그릇된 이단 사상에 빠져서,
예수님을 교회 밖으로 내쫓았던 죄를 애통하는 심정으로 회개해야 했습니다.
그리하면 예수님은 그들에게 들어오실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그들에게 불로 연단한 금을 주셔서,
그들을 부요하게 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흰 옷을 입혀주셔서,
그들의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안약을 주셔서, 그들을 보게 하실 것입니다.
이처럼 라오디게아 교회가 예수님에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고, 흰 옷을 사고,
안약을 사는 것은 돈이나 값을 주고 사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면 됩니다.
예수님을 배역했던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하면 됩니다.
사55:1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엡2: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구원은 돈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구원에 필요한 모든 값을 이미 다 지불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구원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에게서 은혜로 값없이 받는 선물입니다.
아울러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오직 예수님에게서만 살 수 있습니다.
우리를 대신해서 우리의 구원에 필요한 모든 값을 지불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
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 이외의 그 어디에서도,
그 누구에서도 우리의 구원을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은혜로 문을 두드리시는 주님
이제 오늘 본문 20절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긍휼에 풍성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바라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굳게 단힌 라오디게아 교회의 문을 부수고 들어오셔서,
바로 그 자리에서 라오디게아 교회를 심판해버리실 수도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계3:20
예수님은 문 밖에 서서 두드리셨습니다.
이 얼마나 은혜로우신 예수님의 모습입니까?
예수님은 문 밖에 서서 사랑으로 인내하면서 그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그들이 얼른 회개하도록 그들의 문을 두드리셨습니다.
요10:7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마7:7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이와 같이 사실은 라오디게아 교회가 문이신 예수님 앞에 서야 했습니다.
아울러 예수님이 명하신 대로, 사실은 라오디게아 교회가 문을 두드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예수님이 라오디게아 교회 문 앞에 서셔서,
그들의 문을 두드리셨던 것입니다.
죄인들을 향하신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는 이처럼 끝이 없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무엇으로 라오디게아 교회의 문을 두드리셨습니까?
예수님은 그들에게 보낸 편지, 곧 오늘 본문 말씀으로 그들의 문을 두드리셨습니다.
“똑 똑 똑.” “회개하라, 회개하라, 회개하라.”
라오디게아 교회는 예수님을 배역한 불신앙을 회개해야만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고, 자기들의 인간적인 의를 내세웠던 것을
회개해야만 했습니다.
그들은 이단 사상에 빠져 영적으로 교만했던 것을 회개해야만 했습니다.
만일 그들이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서, 그 동안 굳게 닫아놓았던 문을 열면
어떻게 됩니까?
예수님은 오늘 본문 20절 하반부에서 그 결과를 두 가지로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①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구원)
②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풍성한 삶).”
①문을 여는 그에게는 구원이 주어질 것입니다(salvation).
예수님은 그에게 들어가셔서, 이미 말씀하신 세 가지,
곧 “불로 연단한 금”과 “흰 옷”과 “안약”을 그에게 주실 것입니다.
따라서 문을 열고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에게는
예수님이 주시는 구원의 기쁨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개인적인 구원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이는 분명 교회적으로도 놀라운 축복이 될 것입니다.
그 동안 라오디게아 교회 안에는 예수님이 계시지 않으셨습니다.
이단사상에 빠진 라오디게아 교회는 예수님을 문 밖으로 내쫓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문을 열기 위해서 많은 사람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단 한 사람이라도 문을 열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일단 문이 열리면, 예수님은 라오디게아 교회 안으로도 들어오실 것입니다.
그러면 라오디게아 교회는 우선 아쉬운 대로 사데 교회처럼은 될 것입니다.
계3:4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사데 교회는 이름만 가졌을 뿐, 죽은 교회라는 책망을 받았던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는 그 옷을 더럽히지 않은 사람, 곧 구원받은 성도가
그래도 몇 명은 있었습니다. 이와는 달리 배역한 라오디게아 교회 안에는
구원받은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라오디게아 교회에서 그 누구라도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예수님은 그를 통해 라오디게아 교회 안으로 들어오실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라오디게아 교회 안에도
사데 교회처럼 구원받은 성도가 전연 없지는 않게 될 것입니다.
②문을 여는 그에게는 풍성한 삶이 주어질 것입니다(abundancy).
우리말은 아침을 먹을 때나, 점심을 먹을 때나, 저녁을 먹을 때나 똑같이 “먹는다”
라는 같은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을 기록할 때 사용된 헬라어에서는
이들 세 경우를 각기 다른 단어로 표현합니다.
그 당시의 아침 식사는 매우 간단했습니다.
그저 마른 떡 한 조각을 포도주에 찍어서 먹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점심도 별 것 없었습니다. 아침에 집에서 나오면서 간단하게 싸 온 것을
길거리에서, 또는 일터에서 먹었습니다.
그러나 저녁 식사는 달랐습니다. 이 한 끼만큼은 온 가족이 다함께
식탁에 둘러앉아 이야기의 꽃을 피웠습니다.
음식도 세 끼의 식사 가운데서 가장 풍성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사용하신 단어는 바로 이 저녁 식사,
곧 풍성한 만찬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은 문 밖에 서서 두드리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문을 열어야 합니다.
그리하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구원을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우리에게
세상이 알지도 못하고 세상이 주지도 못하는 풍성한 삶을 허락하십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저녁 식사를 놓치고 나면 어떻게 됩니까?
그 후로는 어두운 밤이 옵니다. 긴긴 밤이 계속될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여기서 마지막 초청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 초청을 놓치고 나면, 그 후에는 영원한 심판의 밤이 오고 말 것입니다.
행여 우리가 아직도 예수님을 문 밖에 세워두고 있다면,
바로 이 시간 회개하고 우리 마음의 문을 활짝 여십시다.
예수님을 우리 마음의 보좌에 모시어 들입시다.
그리해서 우리 모두 예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구원과 풍성한 삶을
받아 누리기를 바랍니다.
◑이기는 자에게 주시는 약속 3:21~22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계3:21~22
매번 반복이 됩니다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이기는 그”는
구원받은 성도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이미 구원받은 성도에게 이 땅에서의 풍성한 삶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 다음에 있을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어떻게 됩니까?
사실 예수님을 배역했던 라오디게아 교회였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회개하고 구원을 받더라도,
예수님은 그들을 천국의 한쪽 구석에 세워두실 수도 있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천국에서 예수님의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눅22:29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눅22:30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이 말씀은 예수님이 자신의 열두 사도들에게 약속하셨던 축복의 말씀이었습니다.
비록 배역한 라오디게아 교회였지만, 그들이 회개하면 그들에게도 예수님의 사도들
과 똑같은 축복이 주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이 얼마나 엄청난 은혜입니까?
그러면 여기서 ‘이기는 자가 예수님의 보좌에 함께 앉는다’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마치 벽돌을 쌓듯이 예수님은 이기는 자들을 예수님의 보좌에 차곡차곡 쌓아놓으시
겠다는 뜻입니까? 아닙니다. 여기에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계22:5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 노릇하리로다
이와 같이 보좌에 앉는다는 것은 왕 노릇하며, 다스린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배역한 라오디게아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하면, 그들은 예수님과 더불어서 세세토록 왕 노릇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이 얼마나 큰 은혜요, 축복입니까?
물론 이것은 이기는 자에게 예수님이 약속하신 여러 축복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습니다. 예수님은 소아시아에 있던 다른 교회들에게 보내신 편지를 통하여
이외에도 이기는 자들에게 많은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계2:7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계2:11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계2:17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계2:26-28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내가 또 그에게 새벽 별을 주리라
계3:5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계3:12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이 얼마나 놀랍고도 엄청난 축복들입니까? 신실하신 예수님은 이기는 자에게,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에게 이 모든 축복들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니 어찌 우리가 그 말씀을 귀담아 듣고 순종하지 아니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본문은 이렇게 끝맺음을 하고 있습니다.
계3:22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마치는 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로서 우리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들을
차례대로 모두 살펴보았습니다. 각 교회마다 나름대로의 특징이 있었습니다.
행여 우리는 에베소 교회처럼 처음 사랑을 버리지는 않았습니까?
행여 우리는 버가모 교회처럼 세상과 타협하면서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행여 우리는 두아디라 교회처럼 죄로 얼룩진 모습은 아닙니까?
행여 우리는 사데 교회처럼 영적으로 죽은 모습은 아닙니까?
행여 우리는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예수님을 배역하고
예수님을 문 밖에 세워두고 있지는 않습니까?
만일 우리에게 이러한 요소가 있다면, 이 시간 회개합시다.
긍휼에 풍성하신 사랑으로 지금도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를 초청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입시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예수님의 말씀 위에 굳게 서서,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갑시다.
그리함으로서 여기 있는 우리 모두는 서머나 교회처럼, 빌라델비아 교회처럼
언제나 예수님의 칭찬을 받는 복된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우리 모두의 삶은 하나님 우리 아버지에게 큰 영광을 돌리는 복된 삶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07.09.23./09.30./10.07. 인터넷 설교에서 발췌 ▣ 교회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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