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려올 때 잘 내려와야
등산을 할 때, 올라가는 것보다 내려오는 것이 더 힘들다는 말이 있는데요...
▶김훈의 ‘칼의 노래’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이순신 장군에 대한 소설인데,
보통 전통적인 소설에서 이순신 장군을 묘사할 때에 제목이 무엇입니까?
‘민족의 성웅, 영웅 이순신!’
이를 부각시키기 위해서 원균의 모함,
백의종군, 즉 아무 힘도 없는데 흰옷을 입고 나와 가지고 ‘나를 따르라’ 하고
12척 가지고 600척 박살내고 거북선 만들고... 이런 설명을 합니다.
그런데 김훈의「칼의 노래」에서는 독특하게 접근합니다.
성경의 메시지와 거의 비슷한 메시지를 증거 합니다.
‘칼로 일어선 자는 칼로 망한다.’라는 것입니다.
이순신 장군의 시대 상황 속에서 이순신을
일종의 권력투쟁의 회오리 가운데 있는 사람으로 풀이해 나갑니다.
여기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칼을 든 자는 적이 되었든 아군이 되었든
모두 마지막에는 다 적으로 화한다는 것입니다.
적도 적이지만, 우리 편도 칼을 든 자는 나중에 적으로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이순신과 같이 한 사람에게 권력이 집중되면
반드시 감시와 의심의 대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가 그런 모든 선입견을 다 버리고 선조시대로 돌아가 봅시다.
나라가 위기 가운데 놓여 있습니다. 일본한테 연전연패입니다.
그런데 이순신이라는 영웅이 나타났습니다.
배 몇 척 가지고 일본을 박살내고 제해권을 장악해 버립니다.
모든 권력이 이순신에게 집중됩니다.
당시의 당파들이 있었고 분쟁들이 있지 않았습니까? 그들이 좋게만 보았겠습니까?
반발세력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소설 속에서는 누가 제일 경계했겠습니까.
왕이었던 선조가 경계했다는 것입니다. 이순신에게 너무 권력이 집중되고 있다,
힘이 집중되고 있고 있다, 그래서 은근히 이순신이 죽기를 원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마지막 전쟁이었던 노량해전에서 이순신이 죽습니다.
그랬더니 선조가 안도하면서 그에게 사후에 충무공이라는 시호를 내려주더라,
그래서 이순신은 영웅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의미가 있지 않습니까? 잘 보십시오.
이 땅에 존재하는 많은 영웅들을 보면 어떤 부분에서 탁월한 업적 발휘합니다.
그리고는 죽습니다. 죽었기 때문에 영웅이 되는 것입니다.
알렉산더가 왜 영웅입니까? 빨리 죽었기 때문입니다.
공산주의에서도 보면 왜 레닌이 영웅입니까?
제가 보기에는 레닌이나 스탈린이나 별 차이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스탈린은 오래 살아서 못할 짓 많이 하니까 역적이 되어 버렸고,
레닌은 할 일 딱 하고 죽으니까 영웅이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이 무엇이지요?
위대한 업적을 이루고 난 다음에는 빨리 죽어야(사라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명이 길어서, 안 죽으면 어떻게 됩니까? 스스로 죽으면 됩니다.
▶스스로 죽으면 돼요. 역사에 나오는 스스로 죽는 사람 중 대표적인 예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넬슨 만델라라고 생각합니다.
넬슨만델라는 아프리카의 민중운동의 상징이었습니다.
독립운동의 상징, 흑인 민권운동의 상징이었습니다.
감옥에 39년 갇혀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넬슨만델라는 참 멋있는 사람, 연구해 볼 사람입니다.
감옥에서 나와 흑인정권이 성립되고 난 다음에 화해를 선포하잖아요.
백인을 부통령으로 삼잖아요. 복수할 것 같은데 복수 안 하잖아요.
한 텀 딱 마치고 난 다음에 권력을 집어 던집니다.
넬슨 만델라는 얼마든지 대통령을 더 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 자체가 파워였습니다. 그러나 집어던지잖아요.
지금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전 세계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서
어디를 가나 현직 대통령 이상의 대우를 받으면서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스스로 죽잖아요. 그러니까 살더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매순간하마다
많은 능력과 은혜와 권세를 주실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우리가 깨달아야 될 것은 스스로 죽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내가 망합니다.
겸손입니다. 승자의 겸손, 승자의 죽어짐,
그 한 부분에서 이루었던 업적을 가지고 거기에서 즐기려고 하지 마십시오.
집어던지고 또 다른 곳을 향해 나가든지 죽는 곳을 향해 나아가면 살아납니다.
(펀 글, 출처 분실)
◑나무를 보고 얻는 통찰력
어느 날 샤를르 드 푸코(프랑스의 위대한 수도자)는
나무를 보면서 깊은 깨달음을 얻습니다.
나무는, 떨어지는 자신의 잎이나 부서져 나가는 가지에 대해
아무런 염려를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떨어지지 못하도록 기를 쓰거나
떨어지는 것을 잡으려고 전혀 안달하지도 않았습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나무는 그저 의연할 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다는 자들이
떨어져 나가는 재물이나 건강이나 생명 때문에 염려하고 절망한다는 것은,
스스로를 하찮은 나무보다도 더 못한 존재로 전락시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그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근심하거나 탄식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믿는 자인가 아닌가는 평소에는 판가름 나지 않습니다.
오직 결정적인 때에 드러나는 법입니다.
내 건강이, 내 재물이, 내 생각이, 내 뜻이 찍히고 떨어지고 빼앗기고
부서지고 깨어져 나갈 때,
바로 그 순간에서 마저 우리가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한다면
우리는 정말 하나님을 믿는 자들입니다. (펀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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