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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조화 눅24:49
사도행전의 성령의 역사는, 어느 날 갑자기 하루 아침에 시작된 것이 아니라,
누가복음의 3년간 말씀의 기반이 다져진 이후에 비로소 가능했다는 주제의 글.
◑1. 실패한 것처럼 보이는 제자들
▶성경을 읽을 때마다 참 이해가 안되는 사실 한 가지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끄신 교회의 교인이요, 동역자였던 12제자의 변화되지 않는 모습입니다.
과연 인간은 변할 수 있는 존재인가?
아니면 그 모습 그대로 인정하고 살아야 하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12제자 가운데 가롯 유다같은 배신자가 있었다면
예수님의 목회는 과연 성공한 목회라고 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지상에서 섬긴 그의 공생애 사역 중 대부분의 시간을
제자들과 함께 보내셨습니다.
그 몇 명 안 되는 제자들을 가르치고 훈련하는데 시간을 다 보냈습니다.
제자들의 입장에서 보십시다. 그들의 스승이 보통 분입니까? 예수님이십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모든 가르침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사역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성품의 향기를 맡으며 함께 먹고 함께 자고 함께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뿔뿔이 다 흩어졌고 수제자 베드로마저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그까짓 목숨이 두려웠던 게지요. 그 후에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러고도 물고기 잡으러 간다고, 버렸던 그물을 챙겨들고 갈릴리 바다로 갔습니다.
그들은 많이도 들었고 많이도 보았고 많이 깨닫기도 하고 많이 받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왜 이토록 무력하기만 했을까요?
▶이는 예수님의 제자들뿐만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적어도 하나님의 자녀요 구원받은 백성이라면 죄지으면서 좋을 리야 있겠습니까?
죄도 싫고, 죄 짓고 사는 자신도 싫은 겁니다.
그런데 왜 이토록 죄가 끊어지지 않는 겁니까?
예수님 닮은 향기로운 성품으로 살고 싶은데, 왜 내 속엔 더러운 냄새만 나고
분노와 가시 엉겅퀴만 자라고, 초라한 모습으로 살고 있는 것입니까?
사랑해야 할 줄 몰라서, 사랑이 안 되는 것입니까?
용서해야 한다는 것을 몰라서, 미워하고 사는 것입니까?
충성해야 한다는 사실을 몰라서, 충성이 안 되는 겁니까?
뻔히 끊어야 할 줄 알고 있는데, 왜 안 끊어집니까?
능력이 안 따라 주는 겁니다. 문제는 실천의 능력, 삶의 능력입니다.
냉장고도 가져다놓았고 에어컨도 설치해 놓았습니다.
온갖 가전제품을 들여다 놓았지만, 전기가 들어오지 않으면 무용지물인 게지요.
성령의 능력에 연결되지 않으면, 많이 안다는 것조차 거추장스럽기만 한 겁니다.
오래 믿었다는 것조차 짐스럽기만 한 겁니다.
성령의 인도가 없는 용기는 악이요, 만용일 뿐입니다.
성령이 없는 교리는 율법이요, 우상이 되고 마는 겁니다.
성령이 함께 하지 않는 직분은 짐이 될 뿐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을 보십시오.
성령님이 제자 공동체 가운데 임하자 모든 것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비겁했던 제자들에게 신령한 용기가 넘쳤습니다.
-하나님 외에 무서울 것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배신했다는 죄책감이 그들을 가두지 못했습니다.
-유대주의의 전통도, 협소하기만 했던 민족주의도 그들을 가두지 못했습니다.
-성령의 임재와 함께, 예수님께 들었던 하나님나라 복음은 폭발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이 하셨던 사역 -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 자를 고치고,
천국 복음을 가르치는 능력이 바로 자신의 사역이 되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요14:12)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믿어지기 시작했고, 현실로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2.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조화
그러면 예수님의 지상사역은 실패했고, 성령님의 사역만 성공한 것이란 말입니까?
말씀 사역은 필요가 없고, 성령 사역만 필요하다는 말입니까?
복음서는 의미가 없고, 사도행전만 중요하다는 말입니까?
당연히 그런 것은 아니지요!
오늘 눅24:49 말씀과, 행1:4-5 말씀을 읽었습니다만 내용은 같은 내용입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저자는 의사 누가입니다.
성서신학에서 가끔 저작권 문제가 대두되곤 하지만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저자가 누가라고 하는 데는 이의가 없습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뗄래야 뗄 수가 없는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두 책은 서로 ‘전편과 후편의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전편인 누가복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삶, 그분의 가르치심과 죽으심,
부활과 승천, 그리고 성령님을 보내주시겠다는 약속으로 마쳐지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후편 사도행전에는, 성령의 임하심과 교회의 탄생
그리고 그 교회와 사역자들을 통해 성령님이 예수님의 지상명령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펼쳐 가시는가를 보여줍니다.
그런 점에서 사도행전은 곧 성령행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메시지는 누가복음과 다른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은 계속되고 있다.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반드시 완성되고야 말 것이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도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균형과 조화>가 필요합니다.
*흔히 말씀운동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오직 말씀’만 있으면 된다고 합니다.
오직 말씀 - sola scriptura!
종교개혁자들의 외침은 성령님이 없어도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교황의 교시나 교회의 전통을, 말씀과 대등하게 둘 수 없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성령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오직 성령의 감동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됩니다.
성령님의 감동이 없는 성경은, 종교 서적이나 교훈집은 될 수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역할은 할 수가 없습니다.
*반대로 성령운동을 하는 사람 가운데
말씀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체험이나 기적만을 사모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위험천만한 일입니다.
기차가 레일을 벗어나지 않듯이 성령님은 말씀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올바른 신앙은 예수님 사역과 성령님 사역의 조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균형,
말씀과 성령의 일치, 나아가 부활절과 오순절의 바른 관계입니다.
▶부활절과 오순절의 조화
누가복음은 부활절로 문을 닫고, 사도행전은 오순절로 문을 엽니다.
기독교는 십자가나 부활절로 끝나는 종교가 아니라
오순절로 부활의 역사를 새롭게 시작하고 펼쳐가는 종교입니다.
그래서 오순절이 없는 부활절은, 역사적 사실에 지나지 않고
부활절이 없는 오순절은, 신비주의에 불과합니다.
오순절은 부활절에 그 뿌리를 두고 있고
부활절은 오순절로 새로운 부활 운동을 만들어 갑니다.
*신앙인의 행태도 십자가 지향적인 사람이 있고
부활절 지향적인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오순절 지향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바른 신앙은 균형입니다.
오순절이 없는 부활절은 메마른 사실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부활절이 없는 오순절은 신비주의로 그치고 마는 것입니다.
*참된 신앙은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성령이 함께 살아 역사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땅의 크리스천들이 살아나는 길이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 한국교회가 살아나는 길이 여기에 있습니다. 바로 복음운동과 성령운동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 진수요 핵심입니다.
▶상품 과 사은품
요즘 기독교 복음에도 덫칠이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현대인들은 상품 자체보다 사은품, 경품에 관심이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목사인 저 자신도, 이러한 현대인의 관심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당황스럽습니다.
어떤 교인들은 상품인 말씀과 성령엔 오히려 관심이 없고
경품, 사은품 같은 축복이니 치유니 하는 것만 받아가려 합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계절 따라 시대 따라 백화점 상품을 바꾸듯이
시류에 따라, 내 개인의 취미와 취향을 따라
복음 상품도 바꾸어 주기를 기대합니다.
설교를 바꾸고, 목회 원리를 바꾸길 기대합니다.
▶복음이 살아나야 합니다!
기억하십시다. 복음은 복음 자체에 능력이 있습니다.
기독교는 성령의 능력 하나 만으로 충분합니다.
경품이나 사은품이 있어야 팔 수 있는 그런 싸구려 진리가 아닙니다.
이제 한국교회에서 당당히 복음의 능력이 살아나야 합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이 복음은 모든 믿는자를 구원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성령의 능력이 당당히 역사하실 수 있도록 해 드려야 합니다.
성령님 환영합니다. 인정합니다. 성령님의 역사를 우리교회가 제한하지 않겠습니다. 우리 교회가 성령님을 사모하며 기다립니다.
복음이 살면.. 한국교회가 삽니다.
성령이 살면.. 이 민족이 삽니다. 믿습니까?
◑3.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
예수님은 이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성에 머물라 하시니라. 눅24:49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행1:4-5
요약하면,
첫째,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둘째, 아버지가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셋째,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는 것입니다.
▶1.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
성령으로 세례를 받기 전까지는, 적어도 하나님의 일은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사역 현장에서 뛰기 전에 내가 먼저 변화되어야 합니다.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아마 제자들은 예루살렘을 빨리 떠나고 싶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못 박아 죽인 그곳에 머물고 싶었겠습니까?
혹 어떤 제자들은 세계에 흩어져
빨리 예수님의 지상명령을 순종해야겠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 중요하고 우선 되는 것은
내가 먼저 성령으로 변화되는 일입니다. 성령으로 푹 젖어 바뀌는 일입니다.
뛰는 것보다 먼저 해야 하는 일은 엎드리는 일입니다.
성령 세례를 받기 전에 직분자가 되고 사역자가 되려하지 말라는 겁니다.
▶2.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
구약성경, 신약성경은 모두 약속입니다.
구약은 오실 메시야에 대한 약속이요 신약은 다시 오실 메시야에 대한 약속입니다.
약속과 성취를 연구한 학자들의 말을 빌리면 66권 성경 안에
32,500가지 약속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수많은 약속 가운데 오늘 본문의 약속은 가장 크고 중요한 약속입니다.
성령을 부어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사도행전의 성령 임재 사건은 인류역사상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신비스런 사건입니다.
충분히 기다릴 만한 가치 있는 일이었습니다.
*문제는, 주시겠다고 마음먹었으면 주시면 될 텐데, 왜 기다리라고 말씀합니까?
성령을 부어주시는 일은 언제나 가능한 일이지요.
중요한 것은 받을 수 있는 우리 자신이 준비가 되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부어졌을 때 순복할 준비가 되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바로 섬길 자세가 준비되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며 기다리라는 겁니다.
-사모하며 기다리라는 겁니다.
-준비하며 기다리라는 겁니다.
-함께 모여 기다리라는 겁니다.
-합심하여 기다리라는 겁니다.
-약속을 믿고 기다리라는 겁니다.
-약속하신 성령님은 반드시 오십니다.
▶3. 그리하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성령 세례를 받아야 사도행전적 삶이 가능합니다.
-성령 세례를 받아야 사도행전적 교회가 가능합니다.
-성령 세례는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기적입니다.
-성령 세례는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능력입니다.
-그것은 낡은 자동차 엔진 대신 제트기 엔진을 달고 천국을 향해 달리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사도행전의 성령 경험이 없었더라면 60억 인구가 몰려와도
그 어느 누구 한 명도 구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자력 없는 쇠붙이가 바늘 하나도 끌 수 없듯이 말입니다.
-성령 세례는 제자들의 모든 죄, 모든 실수, 연약함, 모든 허물을 덮어버렸습니다.
-성령 세례는 제자들의 모든 상처, 모든 두려움, 모든 공포를 씻어 버렸습니다.
-성령 세례는 제자들의 미움과 불평을 거두어가고 용서와 사랑을 부어주었습니다.
-성령 세례는 옹졸했던 제자들의 가슴을 넓혀 세상을 품게 했습니다.
-성령 세례는 제자들을 갈릴리 바다에서 시시하게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았습니다.
땅 끝까지 뛰어가게 했습니다. 도시와 세상을 정복하게 했습니다. 할렐루야!
◑4. 바벨탑의 분열이, 방언으로 하나 되다.
약속하신 성령의 임재를 믿고 기도하며 기다리던 제자들을 하나님이 외면하셨나요?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행2:1-4)
인간은 오래전에 바벨탑을 쌓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인간의 언어를 혼잡케 해 버렸습니다.
혼동된 인간의 땅에 성령님이 오시자 언어가 통하기 시작했습니다.
성령님은 교통케 하시는 영이십니다.
▶여러분, 성령님이 아니고는 한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마음이 나뉘어 집니다.
부부, 부모 자식간에도 가치관이 통하지 않습니다.
같은 한국말을 하는데 말이 안 통합니다. 왜요?
그 깊은 곳에 들어가 보면 다른 것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 성경을 보고 기도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왜 정반대의 말을 합니까?
그 안에 성령님이 안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이름을 내자”고 했던 바벨탑 사람들처럼
자신의 말과 자신의 뜻, 자신의 생각과 주장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비전을 성취하고 싶은 욕망, 자신의 이름을 내고 싶은 숨은 욕망
- 이것이 가득 할 때는 교통케 하시는 성령님, 하나 되게 하시는 성령님,
부흥케 하시는 성령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성령 없이 성경을 읽으면 마태복음이 ‘내가복음’이 되고
누가복음이 ‘지가복음’이 됩니다.
하나님의 음성대신 자기 음성 - 심지어는 사탄의 음성이 들립니다.
▶여러분, 뭔가 답답하고 성령의 사람들과 대화가 잘 안 통합니까?
냉정히 한번 돌아보세요. 자신의 생각에 붙들려 살고 있지 않는지!
성령님은 다른 언어를 같은 언어로 통일하시는 분이십니다.
사도행전의 성령님은 인간의 바벨탑을 무너뜨리고 언어를 하나 되게 하고
비전을 하나 되게 하고, 마음을 하나 되게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령님은 시대와 시대를 연결하여 역사하십니다.
사도행전의 교회와 오늘의 교회를 연결합니다.
1907년의 교회와 2007년의 교회를 연결하십니다. 하나 되게 하십니다.
같은 폭발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성령님은 지역과 지역을 하나되게 하십니다.
지금 전 세계적 부흥을 한국교회와 교통케 하십니다.
우리의 기도운동, 성령운동이 한국교회 운동이 되게 할 것입니다. (후략)
<05. 07. 10. 인터넷 설교에서 발췌 http://blog.naver.com/kaikk/60016501579
[주제별 분류] 제자 양육 http://blog.daum.net/bible3/139250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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