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도 다시 사는 선행 행9:36~43
◑도르가의 모범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행9:36
욥바는 예루살렘에서 서쪽으로 56km 지점인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팔레스타인의 유명한 항구 도시입니다.
오늘날의 이름도 여전히 ‘야파(욥바)’입니다.
그 가운데 진실한 믿음을 가진 다비다라는 여성도가 있었습니다.
‘다비다’는 당시 널리 사용하던 아람어 이름이고
헬라어 이름은 ‘도르가’(아름답다)입니다.
▲1. 과부(사회적 약자)를 돌아 본 사람
자비의 천사 도르가에 대해
행9:36절에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은 사람이라고 소개합니다.
이 말은 도르가가 적당히 구제와 선행의 시늉을 한 것이 아니라
아주 헌신적인 태도로 최선을 다해 구제와 선행을 베풀었다는 의미입니다.
즉 도르가는 믿음과 행함이 일치하는 참된 신앙의 삶을 살았는데요...
도르가는 형편이 어려운 과부들을 위해 손수 옷을 지어 입혔습니다.
이것은 정말로 큰 애정과 수고 없이는 하기 힘든 선행이었습니다.
여러분, 주의 종에게 옷 한 벌 해 주는 것은 (쉽지는 않지만)... 빛이 나는 일입니다.
그런데 가난하고 늙은 과부에게 옷을 해주는 일은... 어쩌면 옷감이 아까운 일입니다.
여러분, 부자에게는 축의금도 많이 냅니다. 자기 체면 때문입니다.
정작 가난한 사람에게는 축의금 많이 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당시 ‘옷’은 아주 귀하고 비싸던 시절에, 만만한 구제가 아니었습니다.
도르가는 가난한 자들에게 ‘비싼 것’으로 구제한 셈입니다.
가난한 자들이라고, 형편 없는 싸구려 물건으로 구제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2. 여제자
특히 누가는 다비다를 향하여 “여제자”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어보면 남자들에게는
‘제자’(마데테스)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그러나 ‘여제자’(마데트리아)란 말은
신약성경에서 단 한번 도르가에게서만 사용된 단어입니다.
이렇게 놓고 볼 때 이 ‘여제자’란 말은 보통 귀한 말이 아닙니다.
다비다가 어떻게 이런 이름을 얻었겠습니까?
그런 그가 귀한 ‘여제자’로 불리워진 데 대해서는
열심 있는 선행과 구제로 얻어진 존경의 표현이었다고 봅니다.
▲3. 선행과 구제하는 심히 일이 많았더니. 9:36
여기서 '많다'는 영어성경에 always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선행과 구제를 시간 나고 틈나면 짬짬이 한 것이 아니라
always, 언제나 자나깨나 남을 돕는 사람
남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것을 챙기는 것보다, 남 주기를 항상 더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이런 도르가가 자신의 몸은 돌보지 않고 가난한 이웃을 돌보느라
중한 병이 들어 결국 숨을 거두었습니다.
◑죽은 후에, 그가 누구인지 말해준다.
도르가의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가 죽은 후에 진가가 드러났습니다.
사람은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 그가 죽은 후에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인생의 평가는 그 사람이 죽은 후에 나오는 것입니다.
▲이미 죽은 사람을 살려 내고자 했던 성도들의 열심
도르가가 죽자, 그를 애도하는 사람들은, 죽은 그의 시체를 그대로 두고는
어쨌든지 그를 살려내어 보고자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 사도가 근처의 룻다에 있다는 소문을 듣고는
사람을 보내어 욥바로 모셔온 것입니다.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저 자신을 한 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만약 내가 죽었다면, 나의 가족 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나의 죽음을 애도하며
아까운 사람 죽었으니 하나님 살려내어 주십시오! 하겠는가?’
▲죽은 후에도 남은 증거
9:39절 하반절에 보면
도르가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어 보이거늘...
평상시에 자신들에게 베푼 구제의 손길이 얼마나 많았으면
죽은 후에도 이렇게 실물로 증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도르가가 죽었을 때 사람들은
‘아까운 사람 죽었으니 장례식이나 거창하게 치러져야 되겠다.’
라고 생각하지 않고
도르가가 얼마나 아까운 사람이었으면
그들은 죽음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아마 자기 남편이 죽고, 자식이 죽었을 때도
이렇게까지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 우리의 도르가는 꼭 살려내야 합니다!
이들의 열심 앞에서는
자연의 법칙도, 이성의 논리도 어떻게 할 수 없었습니다.
과부들이 “하나님 도르가를 데려갈 바에야 나를 데려가십시오!” 라고 하는 데는
하나님도 선택의 여지없이 감동받지 아니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다시 살아야할 가치 있는 삶
그것이 도르가가 다시 살아난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죽어도 여전히 살아있는 사람
(사진작가 김중만씨가 인터넷에 올린 글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외과 의사였는데, 그가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충청도 시골에서 외과의사로 있을 때, 닭고기 먹여 주신 것 밖에 없다고 합니다.
의사 아버지가 자기에게 남겨준 유산은
할아버지가 사준 아버지의 양복 두벌과 구두 두벌 남기셨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정부가 아프리카 빈민구제목적으로
<부르키나파소>로 파견한 의사였습니다.
김중만 씨는 프랑스 유학시절에는 내내 아르바이트로 생활을 꾸려나가야 했고,
그 후 사진작가가 되어
아버지께 환자 치료하는 사진 한 장 남기자고 자기가 여러 번 제의했지만
모두 거절당했다고 합니다.
수술에 방해가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하는 선행을 홍보하려는 의사 치고
제대로 된 사람 없다는 것이 아버지의 대답이었습니다.
정작 의사이면서도
아버지는 아내와 자식들이 아플 때는 정신력으로 극복하라고 했습니다.
감기에 걸려도 주사는 안 놓아주시고
콩나물국에 고춧가루 풀어서 먹으라고만 하셨고
프랑스 유학할 때 한 번도 학비를 보내주신 적이 없어
항상 자기 학비와 생활비를 스스로 벌어야만 했습니다.
나중에 알았지만 아버지는 아들에게 보내 줄 돈도 없었습니다.
또, 다른 사람 치료만 하시다가 정작 자신이 위암 말기인 줄은 몰랐는데
의료봉사를 천직으로 생각한 분이라,
이제 자식은 아버지가 모두 이해 된다는 것입니다.
돌아가시기 전 두 달 동안 아버지 병 수발을 하면서
부자父子는 서로 많은 대화를 나눴고,
‘이제는 더욱 아버지를 존경한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드린 목적은
<사람은 죽어도 주변 사람들의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있는
그런 감동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김중만 씨의 아버지 의사 선생님은 그런 점에서 성공적인 인생을 사셨습니다.
자기 아들의 마음과 정신속에, 그는 여전히 영원히 살아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도르가가 그랬다는 것입니다.
◑선행의 시작은 '기도'
▲도움 받아야 될 처지의 사람이, 도우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성경학자들은 도르가를 과부로 봅니다
젊어서 남편을 잃고 많은 날들을 눈물로 한탄도 하며 기도했을 것입니다.
‘하나님, 왜 저에게 이런 삶의 고통을 주십니까?
남들은 사랑하는 남편도 있고, 의지하는 자식도 있는데
왜 제게는 이런 행복을 다 뺏어가셨습니까? 주님 왜 공평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기도를 드리던 어느 날,
문득 자기 주위에, 자기보다 더 나이든 과부들이 눈에 보였습니다.
'내가 이렇게 고통스럽다면, 저들은 말은 안 해도 더한 고통 속에 살아왔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하게 되자 그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러면서 저들을 위해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도르가는 자신의 바느질 솜씨를 동원해
과부들을 위해 옷을 지어 도움을 준 것입니다
(아마 유산이든지 자기 재산이 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기도는 행동을 유발합니다.
<더글라스 스티어>는 이런 말을 합니다.
“남을 위한 중보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바꾸거나
다른 사람들의 삶에 어떤 마술적인 힘이나 주문을 불어넣는 것이 아니다.
당신이 한 친구의 삶의 어떤 부분이 해결되기를 기도하면
오히려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의 삶에서
그 친구에게 막힘이 되었던 문제를 도와주라고 하신다.
또 당신이 곤경을 당하고 있는 친구를 위해
그것을 이겨낼 수 있는 용기를 갖게 해달라고 기도하다 보면
당신이 직접 필요한 짐을 꾸려 그 친구에게로 가서
함께 고통을 나누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될 수도 있다
이렇게 기도는 행동을 유발하게 된다.”
▲설교자도 필요하지만, 도르가도 필요합니다!
오늘날도, 주님의 향기를 전하는 교회에는
도르가와 같은 교인들이 몇 명씩 숨어 있습니다.
성경에는 욥바 교회의 목사가 누구인지, 장로가 누구인지 기록은 없지만
과부들의 옷을 지어 입혔던 도르가의 이름은 똑똑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는 위대한 설교자, 위대한 지도자도 필요하지만
자기에게 주어진 작은 은사로
최선을 다해 변함없이 섬기는 '도르가'도 필요합니다.
◑자기 삶을 통해 전도하는 사람
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도르가를 일으켰습니다.
사람들을 불러서 도르가가 살아난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온 욥바 사람이 이 소문을 듣게 되었고 살아난 도르가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주를 믿게 되었습니다. 행9:41~43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이 주를 믿더라
한 사람을 주님께로 인도해도 축복인데,
온 욥바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했으니
도르가는 참으로 큰 축복을 받은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도르가가 단순히 죽었다가 살아났기 때문에
온 욥바 사람들이 주님을 믿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눅16:31절에,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찌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라고 주님께서 말씀했기 때문입니다.
도르가가 살았을 때 선행과 구제가 심히 많았기 때문에
그가 죽었다가 살아났을 때에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알고 믿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녀는 살았을 때에도 주님을 증거 했고,
죽었을 때에도 주님을 증거했고,
그리고 다시 살아났을 때에도 주님을 증거 했습니다.
자기 삶을 통해 주님을 전도한 것입니다.
도르가는 '무명한 자' 같았지마는
사도행전의 한 페이지를 아름답게 수놓고 있는 찬란한 별이 되었고
주님의 사랑을 가장 생생하고 진하게 나타내 보여준 '유명한 자'가 되었습니다.
무명한 자같으나 유명한 자요... 고후4:9
▲도르가는 주님이 일으키십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오늘날도 도르가와 같은 선행과 구제를 하는 성도가 있다면
다시 살아나는, 다시 일어서는 역사가 있을 것입니다.
아니 만약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 할지라도
제2, 제3의 도르가들이 일어나 그 일을 계속 해나갈 것입니다.
구제와 선행을 행할 때, 너무 사진 많이 찍지 마십시오.
그런 구제는 하나님이 기억하지 않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기억하는 구제를 하십시오. 하나님만이 아시는 구제!
때로는 교회도 모르고, 남편도 모르는 그런 구제를 한다면
우리 교회 안에도 도르가가 다시 사는 그런 기적이 일어날 줄 믿습니다.
▲다시 살아날 가치가 있는 사람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도르가의 기적은
다시 살아나야할 가치가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다시 살아나야할 가치가 있습니까?
주변 사람들이 나를 그렇게 인정해 줍니까?
▲하나님이 받으시는 구제
고넬료의 기도와 구제를 주님이 받으셨듯이 행10:4
도르가의 선행과 구제에도 하나님께서 감동을 받으셨다고 생각합니다.
고넬료에게 사도 베드로를 보내신 분이 하나님이셨듯이
죽은 도르가에게 사도 베드로를 보내신 분도 하나님이셨습니다.
베드로는 다락에 뉘여 있는 도르가의 시체를 보자마자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시체를 향하여 ‘일어나라’라고 말을 했습니다.
베드로가 하나님의 특별한 인도하심과 성령의 생생한 감동하심을
그곳에서 느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끌어당김의 법칙
선행은 결코 내게서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선행은 끌어당기는 힘이 있습니다.
론다 번의《시크릿, The secret》책에서 ‘끌어당김의 법칙’을 강조합니다.
그렇습니다. 선행과 구제는 '끌어당기는 힘'이 있습니다.
주변 사람들의 존경과 매력을 자기에게로 끌어당깁니다.
다른 사람들도 구제에 동참하도록 끌어당깁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축복을 끌어당깁니다.
무언가를 늘 끌어당기는 힘을 가진 사람이 있고,
그 반대로 모든 것을 늘 밀어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을 끌어당기고, 사랑을 끌어당기고, 행복을 끌어당기는 힘의 비결,
그것은 내가 먼저 베푸는 것입니다. <2005. 인터넷 설교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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