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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기쁨의 우선순위는?

LNCK 2008. 2. 2. 10:58

 

◈내 기쁨의 우선순위는?               시16:11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시16:11

  

 

◑즐거움의 우선순위

 

갑은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오래 해 왔지만,

예민하지 않을 때는 괜찮은데,

그런데 ‘예민해지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종종 있었다.

‘웬만한 것은 다 죄네!’

 

그러니까 해외여행을 가더라도,

(제 돈 주고 제가 여행가는 게 무슨 죄인가?)

그러나 세상에 못 먹고, 못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자기는, 비록 짧은 기간이라도, 퍼지도록 먹고 쓰는 게,

양심이 그리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리고 한시라도 더 일을 해야 할 사람이,

그렇게 놀러만 다닌다는 것도... 뭔가 개운하지 않다.

 

쇼핑을 좀 많이 해도... 양심은 ‘사치와 낭비’라고 고발할 수 있고,

그런 식으로 따지면... 웬만한 모든 것이 죄니까

신앙이라는 것이 무슨 24시간 채워진 족쇄처럼 느껴진다. ‘예민’할 때는!

 

그렇다고 반대로 즐기고, 먹고, 놀고 - 이런 것 하나도 하지 않고 살려니

그것도 지루하고 따분한 것이다.

아니 그런 삶은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다.

 

 

그런데 얼마 전에 만난 갑甲은,

자기 즐거움의 우선순위가 바뀌었다고 한다.

 

과거에는 직업이나 교회사역이 그야말로 ‘일’이었다.

그래서 열심히 땀 흘리며 ‘일’을 하면서도, 꾹 참고 기다린 것은

‘일’이 끝나고 즐거운 휴식이 있다는 것을 소망하며 참았다.

 

‘일’이 끝나면, 자기가 즐기는 ‘휴식과 즐거움’의 보상이 있기 때문이었다.

멋진 식당에서 상전처럼 써빙을 받으며 식사를 즐긴다든지,

극장에 가서 재미있는 눈요기를 실컷 한다든지,

커피숍에서 친한 친구와 만나 잡담을 원 없이 한다든지,

자기가 잘 하는 스포츠 종목으로 땀을 흠뻑 흘리는 것이... 삶의 ‘재미’였다.

 

 

다시 말해서 ‘일과 사역’은 몰입에서 오는 성취감은 있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근본적으로 ‘일, 의무’ 였고,

어서 빨리 ‘일과 사역’을 끝내버리고, 벗어버리고 나면,

뭔가 진짜 즐길 수 있는 ‘주말과 휴일과 거기에 필요한 자금’을

늘 머리에 그리면서, 그것 때문에 고된 '일과 사역'을 꾹 참고 살았다.

 

 

그런데 이제 자기에게 우선순위가 바뀌었다는 것이다.

‘일과 사역’에서 진짜 재미와 즐거움을 느끼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일과 일의 연속 - 삶이란 게 그렇다.

그러면 짜증스럽고, 귀찮고, 짓눌려야 하는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라 생각하고 즐거워하고,

‘하나님 나라를 위한 사역’이라 생각하고 거기에서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고 한다.

 

'일과 사역'이 첫째 즐거움과 기쁨이니... 오래 몰두하더라도 별로 피곤하지 않다.

그러나 한 가지 일에만 너무 몰두하면, ‘정신이상’이 되니까

외식, 영화구경, 쇼핑, 여행도 간간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 일을 하면서 쉬기도 하고, 자꾸 일에 집착하는 마음을 버리기도 하는 것이다.

 

 

▶갑과 대화하면서,

나 자신의 즐거움과 기쁨의 근원을, 그 우선순위를 한 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리고 다윗의 고백이 퍼뜩 생각났다.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시16:11

 

다윗이 이렇게 노래한 것은,

취미활동, 식사, 문화활동, 관광, 전쟁의 정복 - 이런 즐거움들보다,

주님과 함께 교제하고,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것이

자기에게는 <더 즐겁다>는 표현이다. 우선순위가 거기에 있었다.

충만한 기쁨이요, 영원한 즐거움이라고 했다.

 

내가 만약 ‘일과 사역’은 두 번째 즐거움이고,

그 일을 빨리 끝내놓고, 내가 진짜 첫 번째로 즐거워하는 일, 취미활동 등을 찾는다면,

나는 아직 더욱 <성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서두에 ‘웬만한 모든 것이 죄’라는 느낌을 갖는 것도

우선순위를 세상 것에 먼저 두고 사니까, 그런 것이다.

 

먼저 자신의 사명과 주님의 사역에 대해 즐거움을 느끼고, 최선을 다해 일하고

(너무 쉬지 않고 일해서 또라이 되면 안 되니까)

억지로라도 시간을 내서 여행을 가고, 쇼핑을 하고, 외식을 한다면

그게 뭐가 자기에게 가책이 되겠는가!

 

 

◑감탄의 우선순위

 

을乙은 요즘 이런 훈련을 스스로 한다고 한다.

창세기에 천지창조 기사에 보면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씀이 7번이나 나온다.

 

첫째날 - 빛, 낮과 밤을 창조하신 후에 ‘보시기에 좋았더라’

2째날 - 궁창(공중 공간)을 창조하신 후에는 없음

3째날 - 땅, 채소, 열매 맺는 나무 만드신 후에 ‘보시기에 좋았더라’

4째날 - 큰, 작은 광명, 아마 해와 달 만드신 후에 ‘보시기에 좋았더라’

5째날 - 새, 물고기 창조하신 후에 ‘보시기에 좋았더라’

6째날 - 육축과 짐승, 사람을 창조하신 후에 ‘보시기에 좋았더라’

 

오늘날 사람들이 감탄하는 것이 뭔가?

위에서 살펴본 이런 ‘하나님의 창조’에 대해서는... 아무 감탄을 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보시기에 좋았더라’며 감탄하시는데,

사람들은 거의 감탄하지 않는다.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그런데 ‘인간의 창조물’에 대해서는 (창조라는 말보다 '제조'가 더 적절하지만)

사람들이 대단히 감탄하고, 안달하고, 난리를 친다.

 

새로 나온 컴퓨터, TV, 냉장고, 신형 자동차

여자들 같으면 명품 의상, 핸드백, 액세서리...

이런 것 가지면 크게 감탄하고,

또한 못 가지면 크게 안달하고...

 

그런데 그런 것 가져봐야 처음에는 잠시 감탄하는데,

얼마 시간이 지나면 금방 녹슬고 고물 된다. 더 이상 감탄 안 하고, 

새로운 신제품을 갈급하게 찾게 된다. 

 

반면에 하나님의 창조물은, 해마다 새로운 감탄이요, 철마다 변함없는 감탄이다.

봄에 피는 꽃과 아지랑이, 여름의 과일, 가을의 단풍과 결실, 겨울의 백설천지는

정말 그 솜씨에 감탄에 감탄을 자아낸다.

 

 

▶오늘도 방안과 창밖에는 빛이 있는데.., 나는 별로 감탄하지 않는다.

나무를 보고도, 새소리를 들어도... 꿈쩍하지 않는다.

 

그 대신에 무슨 새로운 전자제품, 비싼 명품을 보게 되면

“햐~!” 하는 탄성이 절로 나온다면,

나의 잘못된 감탄의 우선순위를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 물질에 대한 과도한 탐욕과 욕심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은 주말이다.

을乙이 통찰력을 나누어 주신데 감사드리며,

우리는 세상의 신제품, 명품을 보고도 감탄할 수 있지만,

우선적으로,

주님이 창조하신 대자연과 우리에게 제공하신 모든 환경을,

즉 공기, 물, 들짐승, 나무와 화초 등을 바라보면서 

감탄하고, 음미하고, 찬양하고, 감사드리는...

앞으로는 세상 욕심을 버리고, 그렇게 살고 싶다.

 

무슨 작정기도, 철야, 새벽기도 하는 것도 꼭 필요하고 좋지만,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운행해 주신 것에 대해서는 거의 감사, 감탄치 않고,

'사람의 제조품'을 달라고 생떼 쓰고 수시로 매달리고 기도하는 것은...

'기도의 본질'을 깊이 돌아봐야 할 문제이다. <김지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