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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2008

1101 ‘가난’이란 ‘자유하는 것’

LNCK 2008. 2. 4. 11:50
 

◈‘가난’이란 ‘자유하는 것’                     마5:3


(이하 모두 펀 글. 가톨릭 자료) 

산상수훈의 서두에 예수님은, ‘참 행복’(팔복)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참 행복이 어떻게 ‘가난’에 있는 것인지요?

어찌하여 ‘슬픔’에 있고, ‘박해’ 속에 있는 것인지요? 알아듣기 힘든 말씀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생각합니다.

그런데도 성경은 계속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는지요?



◑성경적 ‘가난’은 무소유가 아니라 자유


성경의 가난은 무소유가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가난은 자유로움에 있습니다.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는지, 얼마나 적게 가지고 있는지가

가난을 판가름하는 기준은 아닙니다.

얼마를 가졌건 가진 것에서 자유로운 이가 성경이 말하는 가난한 사람입니다.


가진 것이 많건 적건 물질의 노예로 살아간다면, 그는 가난한 사람이 아닙니다.

물질을 섬기는 사람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기준으로 부자라도.. 성경의 가난한 사람일 수 있습니다.

세속 판단으로는 가난한 사람일지라도.. 성경의 관점에서는 아닐 수도 있습니다.


물론 가난은 적극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모습으로 사셨습니다. 그러기에 더욱 힘이 있었습니다.

자유롭게 살면 주님께서 힘과 행복을 주신다는 암시입니다.



◑훌륭한 설교도 필요하지만, 훌륭한 모범이 더 필요하다.


2005년 12월, 소록도의 마가렛 수녀님과 마리안나 수녀님이

40여 년의 생활을 접고 한 통의 편지만 남긴 채 고국 오스트리아로 떠났습니다.

 

마가렛 수녀님은 1959년 12월에,

마리안나 수녀님은 1962년 2월에 한국에 오셔서,

40여년을, 온 청춘과 인생을 송두리채 

가난하고 소외된 나병환자들의 벗으로 봉사하며 살다가

노년의 삶이 병자들과 주민들에게 짐이 될까 남모르게 떠나셨던 것입니다.


문득 한 성인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훌륭한 설교는 감동을 주지만, 훌륭한 표양은 사람의 삶을 변화시킨다.”


지금은 청량리뿐만 아니라, 여러 곳에서  ‘무료 급식 사역’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아마 청량리의 ‘밥 퍼’ 최일도 목사님의 영향을 받아서 생긴 여파라고 생각됩니다.


꼭 ‘밥 퍼 사역’이 아니더라도,

오늘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다른 사람에게 파장을 미치며,

‘나도 저렇게 섬기며 살고 싶다!’는 소원을 심어주며,

그들로 하여금 나를 따라 나서게 한다면,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가르치신 ‘복음에 합당한 삶’이라 생각 듭니다.


내가 복음의 좁은 길을 묵묵히 가고 있다면,

반드시 어디선가 내 뒤를 따라오는 사람이 생길 것입니다.



◑가난의 또 다른 해석 - ‘나누는 마음’


프랑스인들에게 가장 존경을 받았던 세계적인 휴머니스트, 박애주의자이셨던

‘아베 피에르(1912~2007)’ 신부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그것은 프란치스코 성인처럼 자신이 가진 모든 재산을 나누어 준다는 의미보다는,

내가 국가 원수이건, 회사의 우두머리이건, 교사이건

‘나의 능력과 특권과 재능과 학식을 가지고

약자들과 가난한 이들을 위해 무엇을 했는가?’

라고 매일 저녁 스스로 묻는 자가 마음이 가난한 자인 것이다.”


그렇습니다. 뭐든지 자기 것을 나누면 자연히 가난해 지니까요...

그런데 그런 가난한 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고 합니다. 마5:3



◑천국을 누리는 삶의 비결 - 앎이 아니다. 


어떤 사람이 당대 최고의 부자를 찾아가서 이러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부자가 되는 비결을 좀 가르쳐 주십시오.”


그의 부탁에 이 부자는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습니다.

“나는 이 세 가지 규칙을 지키고 있지요. 첫째는 술을 마시지 않는 것,

둘째는 고생을 두려워하지 않고 일하는 것,

셋째는 하나님을 믿고 의심하지 않은 것이랍니다.”


이 말에 질문을 던진 사람은 매우 실망하면서 말했지요.

“그런 것은 모두 알고 있는 사실 아닙니까?

좀 더 확실하고 구체적인 방법은 없습니까?”


이에 부자는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지요.

그런데 당신은 아직도 그것을 실천하지 못했기 때문에 부자가 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쩌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방법 역시도 이와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즉,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방법을 이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실천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늘 삶의 불만족은 '천국'을 누리는 지름길이 될 수 있습니다.

 

팔복은 그들이 직면한 현실 곧, ‘가난·슬픔·박해’ 등이

앞으로 그들이 누리게 될 ‘하나님 나라’를 보장하는 지름길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들이 버거워하며 짊어지고 살아온 위태위태한 삶의 방식이

바로 천국의 행복이었다고 말입니다.


세상의 가치를 뒤집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는

우리의 고달픈 현실에 그 씨앗이 있었습니다.


그분을 따르는 이들에게 주어질 기쁜 소식은

바로, 비록 지금은 그들이 예수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으며

사람들로부터 거짓된 사악한 말을 듣지만(5:11)

하늘에서 그들에게 돌아갈 상은 크다는 약속입니다(5:12).

오늘의 불만스런 현실이, 천국의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임을 새삼 깨달아야 합니다.


▶내가 만들어 보는 팔복

행복하여라, 능력 있는 사람들!

   하는 일마다 척척 이루어져 만인의 부러움을 살 것이다.

행복하여라, 씩씩하고 당당한 사람들!

   남들 눈치 보는 일 없이 자존심 상하지 않고 살 것이다.

행복하여라, 결단력 있는 사람들!

   만사가 그의 뜻대로 될 것이다.

행복하여라, 먹고살 걱정 없는 사람들!

   굳이 아등바등 경쟁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행복하여라, 시간이 많은 사람들!

   놀고 싶을 때 놀고 쉬고 싶을 때 쉴 수 있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건강한 사람들!

   나처럼 위장병·목 디스크·알레르기로 고생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행복하여라…. (더 이상 만들기 어려워 7째, 8째는 포기)

행복하여라….’


내가 만약 이렇게 살다가는, 오래 가지 못할 것입니다.

자기도 타락하고, 주변 사람들에게도 많은 폐를 끼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나는, ‘주님이 가르쳐 주신 팔복’은 짐처럼 무겁게 느끼고 

‘내가 스스로 만든 팔복’을 만약 애원하고 있다면, 또 그렇게 가르친다면, 

성경과 세상을 보는 눈이 좀 더 바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조건 없다, 무소유, 고난 이런 것을 즐기는 ‘고행주의자’로 살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며, 주님만으로 만족하며,

나머지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혹시 삶의 고난이 따르더라도, (애통, 핍박, 의에 주리고 목마름 등,

늘 고난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천국 길에 고난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천국을 더욱 누리는 기회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주제별 분류] 성경적인 참 성공 http://blog.daum.net/bible3/139819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