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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2 가시 속에서 뜨거움이 분출된다

LNCK 2008. 5. 27. 23:26
 

◈가시 속에서 '뜨거움'이 분출된다                          느1:4



◑밸러스트, 용골이 하는 일


*밸러스트에 관한 지식 보기  

*용골 : 배의 앞머리에서 뒤쪽까지 선체의 긴 세로선의 무게 중심 축, keel

 

 

배의 ‘밸러스트’나 ‘용골’(용의 뼈)이 하는 일은,

배의 밑바닥에 물이나 쇠를 많이 집어넣어서,

배의 무게중심을 낮추고, 배가 잘 전복되지 않도록 하는 장치이다.


큰 배일수록 밸러스트나 용골이 크고 무거워야 한다.

먼 바다에 나가서 높은 풍랑을 만났을 때,

큰 파도와 비바람이 배를 사정없이 때릴 때, 배는 기우뚱거리기 마련이다.


그때 밸러스트와 용골이 무게중심을 잘 잡아주어야

배가 기우뚱거리지만 오뚝이처럼 제자리로 바로 돌아온다.

그래서 큰 배일수록 밸러스트 용량이 크고, 용골이 무거워야 한다는 것이다.

배는 무지하게 큰데, 밸러스트와 용골이 작으면... 작은 풍랑에도 금방 전복된다.


▲밸러스트, 용골의 모순

여러분, 우리 생각에는 배를 가급적 가볍게 만들면 좋을 것 같다.

그래야 짐도 많이 싣고, 몸체가 가벼워야 운항 속도가 빠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배는 스스로 제 몸을 무겁게 만들어야 한다.

밸러스트와 용골 부분을 무겁게 해 줘야, 배가 안전하게 다닐 수 있기 때문이다.


‘배는 가벼우면서도 무거워야 한다’는 이 상반된 두 요소의 모순성

한 배에 다 적용해서 배를 만든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밸러스트와 용골은

배의 속도를 방해하는 장애물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오히려 배의 속도를 내게 하는 필수품이 된다.


그런데 밸러스트나 용골이 없는 배들도 있다.

나룻배에는 용골이 없다.

모터보트에도 용골이 거의 없다.

이런 배들은 오로지 빨리 가기 위해서 가볍게 만들지만

풍랑이 한 번 치면 속수무책이다.


그래서 이런 배들은 깊은 바다에 나가지 않는다. 대양을 항해하지 않는다.

해안가를 왔다 갔다 하거나, 강을 건너는 정도로만 쓴다.


▲가시=용골의 역설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만들어주시는 용골이 각자 있다.

바울이 말한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했던 육체의 가시’이다.


이 용골이 바울을 무겁게 짓누르는 것 같지만,

그것이 눌러주니까 그의 인생 항해에 흔들림이 없게 만들고,

오히려 ‘대항 항해’를 가능하게 해 주었다.


내 생각에는, 내가 사역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는

‘가시’가 없어야 될 것처럼 보인다.

배가 빨리 가기 위해서는 용골 부분이 없어야 될 것처럼 보이는 것과 같다.

 

그런데 빨리만 간다고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니다.

도전을 이길 수 있는 묵직한 힘은 ‘용골’에서 나온다.

즉, 먼 항해를 떠나지만 안전하게 끝까지 갈 수 있는 힘은 ‘가시’에서 나온다.

가시(용골)은 불필요할 것 같지만, 역설적으로 꼭 필요한 역할을 한다.


우리 각자에게도 ‘가시’가 있을 것이다.

내가 도저히 내 힘으로 극복 안 되는, 내 인생의 한계인 ‘용골’도 있을 것이다.

그게 결코 장애가 아니라는 것이다.

도리어 내 사역을 가능하게 만드는 뚝심으로 작용한다.


▲사도 바울은 처음에 이 가시(용골)가 자기에게 장애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하나님께 없애달라고 세 번이나 간절히 기도했다.

그러나 주님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하셨는데,

다른 말로 ‘네게 필요하니까 내가 준 것이다’는 뜻이다.

‘네가 온전하게 되고, 내 능력이 네게 머무르기 위해서는

가시(용골)가 네게 필요해!’  고전12:9


▲그래서 바울이 도리어 크게 기뻐했단다. 

그 ‘가시’가 뭐가 그리 기쁘겠는가?

그런데 바울은 가시로 인해 자기가 온전하게 됨을 깨닫고서

그 ‘자기 연약함의 가시’를 오히려 기뻐하고 자랑한다고 했으니,

바울이 위대한 믿음의 사람임에 틀림없다.  고전12:9



◑가시, 즉 용골이 하는 일이 무엇인가?


▲1. 먼저 나를 진실 되게 만든다.

보통 사람들은 자기가 거짓된 인생을 살면서도, 그것을 잘 깨닫지 못한다.

그래서 그런 삶을 계속해 나가는데,

가시가 있는 사람은, 가시가 자기 가슴을 팍팍 찌를 때마다

늘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하게 된다. 그래서 더욱 더 진실해 진다.


사실 ‘회개’란 성령의 특별한 역사가 아니고는 어렵다.

그런데 가시가 있는 사람은, 가시로 인해 늘 회개하게 되니... 더욱 진실해 진다.

※관련 글 : 찰스 콜슨의 변화  


 

 

▲2. 가시는 나를 ‘기도의 사람, 겸손의 사람’으로 변화시켜 준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고후12:7


여러분, 겸손한 사람이 기도한다.

그가 기도의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겸손의 사람이 되었다는 증거다.


여러분, 지금 당신에게 무슨 ‘인생의 짐’이 있는가?

무엇이 당신은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가?

그것이 당신의 용골, 밸러스트이다.

그것 때문에 지금 당신이 영적으로 깨어있고, 살아있는 것이다.


왜 어떤 사람은 새벽에 일찍 깨서 간절히 기도하는가?

그 놈의 쇠뭉치(용골) 때문이다.


여러분, 혹시 다른 사람은 평탄하게 잘 사는 것 같은데,

빠르고 순탄하게 항해해 나가는 것 같은데,

왜 내 인생은 이렇게 괴롭냐고 한탄하지 마시기 바란다.

용골과 밸러스트 용량이 큰 배가, 많은 짐을 싣고 먼 항해를 안전하게 떠난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처럼, 자기 가시로 인해 오히려 감사하시기 바란다.


▲3. 특별히 용골은 우리에게 성령의 감동을 준다.

고난의 심연, 광야의 괴로움을 통과한 사람들에게 독특하게 나타나는 공통점은

<하나님이 주시는 영감>이 그에게 흐른다는 점이다.

그 영감에서 스며 나오는 지도력이나 능력은 매우 값진 것인데..,

  

그들은 자기를 기꺼이 비울 줄 안다.

그리고 중요한 일을 ‘선택, 집중’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그들이 일을 추진할 때는,

자기 속에서 울컥하고 솟아올라오는 어떤 힘을 사용할 줄 안다.

다시 말해서 ‘성령의 감동’이다.


물론 우리가 일상에서는 맨 정신으로 일을 조리 있게 처리해 나가야 하지만,

어떤 결정적인 순간에 있어서는

‘속에서 울컥 하고 치밀어 올라오는 힘’이 꼭 필요할 때가 있다.

다른 말로 ‘성령의 영감’이다.

 

이런 능력은, 반드시 고난과 가시를 통과한 사람에게만 나타나는데... (↙)



◑가시 속에서 뜨거움이 분출된다.


▲느헤미야의 울컥함

느헤미야는 바벨론에서 예루살렘 성이 불탔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가 예루살렘의 비참한 소식을 듣고는

그 때 그의 가슴에는 울컥하고 뜨거운 것이 솟아올라왔다.

‘내가 이 말을 듣고 몇 일 동안 울고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께 금식하고 기도하며’ 느1:4


그 뜨거운 울컥함이 느헤미야를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루살렘으로 떠나게 만든다.

그리고 단 52일 만에 예루살렘 성벽을 완공하는 무시무시한 괴력을 보여준다.


느헤미야는 포로로 잡혀간 중에, 왕의 술 맡은 환관장 자리까지 오르면서

삶의 우여곡절과 환난과 가시를 많이 겪었고, 통과했을 것이다.

거기서 ‘울컥함’(성령의 감동)이 나온다.

특별히 지도자에게는 이런 능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반대로 물렁물렁한 인생들도 있다.

그들의 삶이 평탄해서 좋긴 하다.

그러나 고난의 밑바닥에서 뭔가 부딪히며 연단 받은 것이 없으므로

속에서 솟구쳐 올라오는 뜨거움도 그만큼 작다.


이런 사람이 고난과 가시의 광야 길을 진하게 통과하고 나면,

자기 불순물이 제거되면서 영혼이 더욱더 맑아진다.

그 때, 늘 24시간, 매일을 불덩어리로 사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결정적인 순간이 찾아왔을 때,

그는 자기 속에서 솟구쳐 올라오는 성령의 능력을 작열시킨다.

그래서 보통 사람이 도저히 이루지 못하는 일들을... 용기 있게 추진해 나간다.


때에 따라서는, 비장하게 기도하고 난 후에, 목숨 걸고 나아간다. (에스더처럼!)

이런 사람들이 역사의 흐름을 바꿔버린다.

이것은 학교에서 배우는 능력이 아니다.

자기의 용골과 가시를 통해서, 하나님과 일대일로 대면할 때 터득하는 능력이다.


▲선한 사마리아 인의 울컥함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에서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

왜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냥 자기 길을 바삐 갔고,

선한 사마리아 인은 그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와주었는가?


‘속에서 올라오는 울컥함’의 차이다.

앞서 두 사람은 그런 것이 없었는데,

선한 사마리아 인에게는, 그 결정적인 순간에, 그 ‘울컥함’이 솟구친 것이다.

그 사람을 바라볼 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든 것이다.


그에게도 자기의 바쁜 일정이 있었을 것이고,

강도 만난 사람을 데리고 가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 줄 알았을 것이고,

거기에다 자기 돈까지 써야 하는 일인 줄... 순간적으로 계산이 척척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불쌍히 여기는 그 뜨거운 마음’이... 그 모든 난관을 극복하게 했고,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와주는 ‘참된 지도자의 길’을 가게 했다.


▲내 인생의 울컥함

저도 20대 때, 교회의 청년회들이 속수무책으로 와해되어가는 현실을 보고

속에서 울컥함이 올라왔을 때가 있었다.

또한 ‘예배의 감격’을 회복해야 한다는 그런 마음의 울컥함이

나를 내내 떠나지 않았던 시절이 있었다.


그 때 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내 인생을 바쳐서 이것만은 뒤집어야지!’

결심했었고, 물론 지금 그런 일들이 어느 정도 다 이루어졌다.


저는 그 울컥함을 가지고 열심히 뛰었는데,

멋도 모르는 사람은 옆에서 쳐다보면서 나를 이렇게 평가했다.

‘저 목사님은 타고난 체력이 있어서 그래!’


웃기는 소리 하지 마시라! 체력으로 일을 한다고?

주님의 사역이 체력 갖고, 결심 갖고, 의지 갖고 되는 일은 절대 아니다.

나의 진짜 근원적인 힘은 ‘속에서 울컥 올라오는 뜨거움’이었다.


▲마치는 말

여러분 인생의 짐, 가시에 한 없이 눌려서 살지 마시라.

그것으로 인해 간절히 주님께 매달려 기도할 때,

그것은 당신을 바로 잡아주는 용골과 밸러스트가 될 것이다.


그렇게 기도로 몸부림치다 보면,

‘성령의 감동이 울컥하고 올라오는 사람'으로 변모된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분야에서

한 시대의 흐름을 바꾸어 놓는, 믿음의 청년들이 되시기 바란다.

<08.05.16. 인터넷 설교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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