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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2008

1302 마음이 아름다운 사람

LNCK 2008. 6. 3. 05:49
 

◈마음이 아름다운 사람 (펀 글 모음)



◑사람이 가장 순수해 보일 때


비 온 뒤 거리를 좋아한다. 

이미 생명을 잃은 잘려나간 나무토막조차도 물기가 베어

진한 원색을 회복하며 생기를 되찾는 시간.

물에 촉촉이 젖은 채 뛰노는 아이들 마냥,

비 맞은 나무며 풀은 그 천진함을 짙푸르게 드러내는 시간.

아직 햇살은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어도,

도리어 회색 구름이 빠르게 움직이는 그 시간을 좋아한다.

사진을 찍고픈 충동이 가장 큰 시간이다.


인생도 그런 것 같다.

시련 앞에서 막 빠져나온 듯한 그 사람.

아직 그를 향한 축복의 햇살이 비추지는 않아도.

시련의 소나기를 통과한 그의 모습은 참 인간의 모습이다.


허세나 독기 따위는 그에게서 볼 수 없다.

그저 눈앞의 빗줄기 앞에 어떻게든 버텨내기 위해 한발 한발 걸어온 그의 모습은

가장 때 묻지 않은 사람의 모습이다.

욕심도 어떤 엄살도 없는 순결한 그의 모습. 군살이라곤 찾아 볼 수 없다.


이제 구태여 득도한 사람을 절간이나 수도원 앞에서 찾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한 몸 가득 베인 소나기가 지나간 뒤,

한숨을 돌리고 있는 그를 찾아가면 될 터이니...



◑더 쇼킹한 것을 바라지 않는 마음


2007년 가을, 신정아 스캔들이 신정아 게이트로 변해서 누가 엮여져 나올까?

온 나라의 세간의 관심이 거기에 쏠려 있습니다.

그래서 뉴스를 대할 때 마다

좀 더 쇼킹한 사건이 터져 나오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깨닫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자꾸 우리 마음은, 뭔가 더 쇼킹한 것이 터져 나오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마음은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 아닙니다.

이것은 마귀가 주는 마음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검은 것이 좀 더 검기를 바라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마음이 우리를 지배하게 되면

나중에는 흰 것도 검게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만 옳고 세상은 다 틀려 보이는 증오에 싸이게 되는 것입니다...



◑‘봉사의 철학’을 가진 마음


1978년 겨울 한가운데의 어느 토요일 오후라고 기억된다.

어느 성당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큰 마스크를 쓰고 작업복 차림을 한 어떤 분이

성당 바닥을 열심히 닦고 있었다.

가뜩이나 추운 실내 공기에 유리창까지 열려 있어

단 몇 분도 기도하지 못하고 성당을 나오면서,

직장이 없어 성당 청소를 해야만 하는 왜소한 체구의 그 아저씨의 처지가

안타깝고 측은하였다.

그런데 그분이 본당신부님이라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았다.


1980년 겨울, 꾸르실료 교육을 받고 하느님의 사랑이 고마워서

무엇인가를 하고 싶었지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우선 본당 청소를 해볼까 하여 어느 토요일에 성당에 갔더니

그 아저씨, 아니 본당 신부님께서 여전히 혼자서 성당 청소를 하고 계셨다.


나는 눈물이 핑 돌았다. 아무도 없는 텅 빈 성당에서 그 일에 몰두하고 계신

그 모습은 예수님께서 홀로 기도하시는 모습을 연상하게 하였다.


(청소를 어쩌다 한 번은 할 수 있겠지만,

몇 년을 계속하신다는 것은... 무슨 철학을 가지고 계신 것이 틀림없습니다.)


신부님께서는 당신이 쉬시는 월요일이면

농사짓는 교우 집을 방문하시어 땀 흘리시며 일손을 빌려 주셨고,

소독저가 방안 가득 쌓여있는 교우 집에서 소독저 포장을 척척 해내시며

교우들과 어울려 국수도 삶아먹고, 김치 한 가지의 조촐한 식사를 즐겨 드셨다.

된장 뚝배기에 수저를 점벙점벙 담그시며 소탈하게 식사하시는 모습이

마음 편한 이웃 아저씨 같았다.” (조두이, ‘내가 만난 그리스도인’)



◑조연의 자리를 찾아갈 줄 아는 마음


사제로 살아가면서 가장 커다란 착각이 무엇이냐 하면...

제 경우에 한정 될 수 있겠지만,

자신을 주연으로 느끼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잘못 살지만 않으면(잘 살지는 못한다 해도)

주위에서 ’신부님, 신부님’ 하면서 신자분들이 따릅니다.

그러다가 보면 극단적으로는 ’교회’ 또는 '본당’이라고 하는

나라의 왕이나 된 것처럼 착각하기도 하지요.


입으로는 ‘주님’을 말하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몸으로는 ‘자신’을 드러내곤 합니다.

주님을 드러내는 조연으로서의 빛나는 의미와 가치를 져버리고,

주님의 자리에 박차고 들어앉아서 ’하느님 나라와 복음 선포’ 라는 멋진 드라마를

완전히 망쳐 놓는 수도 있습니다. 참으로 추한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부끄러운 자화상이기도 하구요.



◑칼을 내려놓고, 대신 수건을 붙잡는 마음


내려놓음은 지혜 중의 지혜다.

인생의 승리는 꼭 붙잡음으로가 아니라 내려놓을 때 찾아온다.

내려놓음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결단이 필요하다.

영원의 안목이 필요하다. 내려놓음은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목적 지향적인 삶을 사는 것이다. 사명 중심의 삶을 사는 것이다.

그 일을 위해 다른 것들을 내려놓는 것이다.

얽매이기 쉬운 죄를 내려놓고, 내것이 아닌 것들을 내려놓는 것이다.

비본질적인 것을 내려놓는 것이다.


내려놓음이란 우리가 원하는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붙잡는 것이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 순간 우리는 참된 자유를 경험하게 된다.

우리는 내려놓는 것만큼 자유로워진다. 내려놓는 것만큼 유연해진다.

내려놓는 것만큼 풍요로워진다. 내려놓는 것만큼 여유를 갖게 된다.

내려놓는 것만큼 평강을 누리게 된다.


예수님은 손에 주어진 칼을 내려놓으시고, 그 손에 (발 닦는) 수건을 드셨다.

하나님은 칼을 내려놓을 줄 아는 사람의 손에 수건을 선물로 주신다.

칼은 사람을 다스리고 위협하고 조정한다.

그러나 수건은 사람을 섬기고 화평케 한다.


우리를 참으로 위대하게 만드는 것은 칼이 아니라 수건이다.

칼을 내려놓고 수건을 붙잡는 순간

예수님이 말씀하신 참된 위대함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수건을 들고 섬기는 것이다.

날카로운 것을 부드럽게 하고, 딱딱한 것을 유연하게 만드는 것이다.

<강준민 목사님의 글


[주제별 분류] 리더십, 목회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