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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6 관 심

LNCK 2008. 7. 19. 22:42
 

◈관심                          행3:1-10                          -출처보기-



▲같은 말도 다른 느낌

어떤 목사님이 (미국) 교회에서 설교를 하실 때면

"여러분의 그런 미지근한 믿음으로는 지옥에 갈 수밖에 없습니다"고

자주 책망하셨습니다.

얼마 후 이 목사님은 그 교회를 떠나게 되었고, 새 목사님이 오셨는데,

이분 역시 항상 되풀이하며 강조하시는 말씀이

여러분 같이 미지근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지옥에 갈 수밖에 없다고 설교했습니다.


어느 날 노회장이 그 교회를 방문하여 교인들의 여론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교인들이 이전 목사는 싫어했는데

새로 부임하신 목사님은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를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두 목사님 다 우리의 신앙이 미지근하여 지옥에 갈 수밖에 없다고 하셨는데

이전 목사님은 그것을 아주 당연한 듯이 말씀하셨지만,

지금 목사님은 몹시 괴로워하시면서 우리들의 고민과 고통을 함께 나누는 것 같이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같은 이야기라 할지라도 고통을 함께 나누려고 하는 사람은

남에게 신뢰를 얻습니다만, 아끼는 마음도 없이 하는 책망이나 비난은

아무런 효과를 거둘 수가 없는 것입니다.


대인관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삶을 함께 나누려고 하는 자세입니다.

다른 사람의 어려운 처지를 해결해 줄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따뜻한 애정을 가지고 함께 애통하며 위로하게 될 때

당사자는 큰 용기와 힘을 얻고 새로운 출발을 시작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진실한 사랑만이 사람들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살아가는 세상이 너무나 삭막하고 외로운 것은

서로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결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너는 너고 나는 나’일뿐이라는 자기중심적인 생각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한

참다운 관계와 기쁨을 기대 할 수 없습니다.


오늘의 우리나 사도들이나 다 같은 사람들이라면,

베드로와 요한이 행한 능력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온 것이었을까요?


◑1. 두 사도는 매일 정해진 시간에 <기도>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이 기적의 사건은

베드로와 요한이 제 구시 기도시간에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갈 때 일어난 것입니다.


다니엘은 하루에 세 번씩 하나님께 기도 드렸다고 했습니다. 단6:10, 13

다윗도 하루에 세 번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내가 근심하여 탄식하리니 여호와께서 내 소리를 들으시리로다.

시55:17

이런 ‘하루 3번 기도 전통’에 따라 베드로와 요한도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했습니다.

제 구시 기도시간은, 오후 3시인데, 아마 하루의 세 번째 기도시간으로 추측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정한 기도시간이 있어야 합니다.

매일같이 시간을 정하고 하나님께 철저히 기도드릴 때

영적인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나에게는, 매일 정해진 기도시간이, 기도의 장소가 있습니까?

(혹자는,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능력'은 하루 5번 기도에서 나온다고 합니다.)


◑2. 두 사도는 불쌍한 사람에게 <관심>을 가졌습니다.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는 사도들을 보더니 돈 좀 달라고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는 날마다 습관적으로 성전 미문 앞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했습니다.

이런 모습이 보통 사람들의 눈에는 곱게만 보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그냥 지나쳐버리는 사람들이 허다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은 그런 것을 탓하지 않고 그를 불쌍히 여기며

"우리를 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거지는 "무엇을 얻을까" 해서 사도들을 바라보았습니다.


사도들이 "우리를 보라"고 한 것은

자신들의 품위 있는 모습을 보라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나면서 앉은뱅이가 된 거지,

그는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고

다른 사람들의 동정심을 유발하여 푼돈이라도 긁어모으지 않으면

생계의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는 죽지 못해 살아가는 비참한 인생이었습니다.


그의 이러한 처지를, 사도들은 불쌍히 여기며,

그의 눈동자에 서려 있는 슬픔과 고통을 위로하고 확인하기 위해서

"우리를 보라"고 말한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자기의 이기심에 사로잡혀

남에게 무엇인가 도움을 받으려고 하지, 남을 도와주려는 마음이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모두가 영적인 앉은뱅이요, 거지입니다.

본문의 앉은뱅이 거지는 어쩌면 바로 ‘나’의 모습입니다.


늘 받기만 바라고, 달라고 구걸만 하는 이들을 보면 얄밉기가 짝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연민의 정을 느끼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는 이렇게 영적인 귀머거리와 소경과 앉은뱅이들을

불쌍히 여기는 연민의 눈을 가진 사람이 필요합니다.


오늘 우리들도 불쌍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우리를 보라"고 하면서

그 앉은뱅이 거지에게 사랑의 <관심>을 나타내므로 그에게 희망을 안겨주었습니다.

이 세상이 아무리 악하고 혼탁하여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사람들의 영혼을 불쌍히 여길 줄 아는 연민의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연민과 사랑만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 희망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가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3. 두 사도는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가졌습니다.


"우리를 보라"는 사도들의 말에 그 앉은뱅이는 귀가 솔깃하여 무엇을 얻을까

기대에 찬 눈초리로 그들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때 사도들은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6절)고 하면서 오른손을 잡아 일으켜 세웠습니다.


여기서 은과 금이 없다는 말은 아주 의미심장한 말입니다.

당시 초대교회는 크게 부흥하고 있었고, 베드로와 요한은 그 지도자였기 때문에

어쩌면 운용할 수 있는 재정이 꽤 많았을 것입니다.

그가 거지에게 동냥 몇 푼을 하지 못할 정도로 가난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들은 거지에게 동냥할 돈조차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던 모든 재산을 나누어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뿐만 아니라 초대교회의 모든 성도들은 자기들의 가진 것을 모아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렇게 주님을 위해서 자기의 것을 내놓고 남에게 베푸는 사람,

그 사람에게 주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가질 것은 다 갖고 주님을 위해서 살겠다고 하는 것은

헛된 욕망일 뿐 주님의 능력을 의지하고 사는 생활이 아닙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그 모든 것을 다 나눠주고 주님을 좇았기 때문에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라고 자신 있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세상의 재물은 없어졌지만

그들은 대신에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예수의 이름에서 나오는 하늘의 능력을 얻게 된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도 만약 거지의 기대를 충족시켜 줄 몇 푼의 돈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것을 주면서 만족해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랬더라면 그 앉은뱅이 거지는 평생 구걸을 하는 비참한 삶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은과 금은 다 나눠주고 없을지언정

나사렛 예수의 이름이 있어야 합니다.

돈으로 하는 일은 한계가 있입니다.

우리는 베드로와 요한처럼, 은과 금이 아니라,

예수의 이름과 능력으로 주님의 일을 하겠다는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

은과 금은 부차적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는 대단한 권세가 있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명령할 때 그 앉은뱅이는 벌떡 일어났습니다.

우리도 주님을 위해서 나를 헌신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그래야 능력 있는 신앙생활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물질이 없고 시간이 없어서 주의 일을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버려야 할 것을 버리지 못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능력이 없어서 문제입니다.

주님의 이름만 있으면 우리의 가정과 사회는 변화될 것입니다.

그 어떤 일도 못할 것이 없습니다. 오늘 우리도 은과 금은 없을 지라도

예수의 이름을 소유하는 성도들이 되어야겠습니다.

<2000.09.08. 인터넷 설교에서 발췌 



▲로마 바티칸 광장에 가면, 성 베드로 광장이 있고, 거기에 바티칸 본부가 있는데,

그 2층에 교황께서 행사 때마다 나와서 강복을 내리는 발코니가 있습니다.


하루는 그 발코니에 교황 인노센트 4세와 토마스 아퀴나스 두 분이 딱 섰습니다.

두 분은 서서 대화를 나눕니다. 성 베드로 광장을 내려다 봤더니

성 베드로 광장을 통해서 들어오는 마차가 굉장히 많았습니다.

마차에 뭘 싣고 오느냐? 외지에서 보내오던 금과 은을 가득히 싣고

교황청으로 가지고 오는 것입니다.


그러자 교황 인노센트 4세가 말했습니다.

“아시다시피 사도행전 3장에,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하러 성전으로 들어갔더니,

성전 문 앞에서 앉은뱅이 하나가 구걸했습니다.

베드로가 말하기를 '나한테는 금과 은은 없으나, 내가 가진 것을 주겠으니

지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내가 줄 것은 이것밖에 없다고 하지 않았소?


보시오, 아퀴나스 선생!

이제는 교회가 은과 금은 내게 없나니... 하는 시대는 지나간 것 같습니다!”


그러자 아퀴나스가 받아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교황님! 맞습니다. 이제 우리의 교회는 앉은뱅이더러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라! 라고 말할 수 있는 자격도 이미 지난 것 같습니다!”

 

[주제별 분류] 사회적 책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