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가 다스린다 롬5:21 인터넷설교 편집
▲은혜가 왕노릇함 grace reign.
주님은 마귀들에 대해서는 쇠몽둥이iron rod로 다스리십니다.
그러나 성도들에 대해서는 은혜로 우리를 다스립니다. ↙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여 grace reign through righteousness..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롬5:21
종종 감독이 누구냐에 따라서, 그 팀이나 선수의 기량이 확 달라지는 것을 봅니다.
배우들은 유능한 연출자를 원합니다. 학생들은 유능한 스승을 원합니다.
이와 같이 누가 우리를 다스리는가에 따라서 우리의 인생이 바뀝니다.
주님은 우리의 선한 목자가 되십니다. 선한 목자는 은혜로 양떼를 다스리십니다.
▲자연인은 <죄의 다스림> 아래 있습니다.
유대인들조차도 주님께 우리는 아브라함의 씨라. 결코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이라고 말합니다. 요8:33
그 때 주님은 그들을 향해 ...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죄를 짓는 자는 죄의 종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8:34
사람은 모두 <죄의 다스림>을 받는 죄의 종입니다.
<죄가 사람들을 다스립니다.> 우리의 육신은 죄의 몸입니다.
주님께서 자신의 몸으로 십자가를 지시고,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신 것은
‘죄의 몸’을 멸하여 우리를 자유케 하기 위해서입니다. 롬6:6
우리 속에는 죄의 법이 있습니다. 롬7:23 그래서 죄는 우리 안에서 일합니다.
마음은 원하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죄에게 이끌림을 받고,
죄에게 순종하는 자신을 발견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성령충만 하지 못하면, 죄의 법이 나를 사로잡아 오고, 마음대로 <다스립니다.>
마치 고삐를 잡은 사람이 길들인 짐승을 마음대로 끌고 다니듯이
죄는 우리를 마음대로 이끕니다.
▲성도는 법적으로 <은혜의 다스림> 아래 있습니다.
‘법적으로’라는 말뜻은, 예수님의 십자가 승리로 그렇게 이루어졌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성도가 성령충만 하지 못하면, ‘법적으로는’ 은혜의 지배reign를 받지만,
‘실제 삶에서는’ 율법의 지배, 육신의 지배, 죄의 지배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법적으로 자유인이지만, 실제로는 속박된 자로 사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나라는 ‘의와 희락과 평강’의 나라입니다. 롬14:17
하나님의 왕국의 통치자는 주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마음이 주님의 통치를 받아들이면, 마귀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죄의 지배도 받지 않습니다.
너희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므로
죄가 너희를 지배하지 못하리라. 롬6:14
▲은혜의 다스림(통치)을 받은 사람들
주님의 은혜의 통치 아래 있으면 사람들은 은혜의 말씀, 은혜의 영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열렬한 유대교 신자로서 교회를 핍박하고 성도들을 잡아 죽이던 살인자 바울을
위대한 사도로 변모시킨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갈릴리의 어부들을 주님의 순교자로 만든 것도 주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노예 상인이었던 존 뉴턴을 위대한 목사로 만든 것도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주님의 은혜가 나를 다스리기 시작하고, 그 다스림을 받을 때
그 사람은 진정한 변화를 경험합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베푸신 그분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그들 모두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다. 고전15:10
주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종일 주께 부르짖나이다! 시86:3
◑은혜를 보여주는 사람이 필요한 세상
예수님이 창녀와 세리들과 함께 식사하시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비난하고 나섰습니다.
분리와 멸시의 문제는 우리 가운데 항상 유혹으로 다가옵니다.
내가 은혜 아래 있으면,
사람(의 연약함)이 보이지 않고,
오직 십자가(의 용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은혜 아래 있는 사람은,
오직 내가 죄인 된 것이 보이고,
나를 구속하신 십자가의 은혜가 나를 지배하기 때문에
그가 보는 눈은 달라지게 됩니다.
주님은 준엄하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심판하셨습니다.
그들이 은혜아래서 말하고, 생각하고, 행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은혜의 가장 큰 클라이맥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없이는 설명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속에 깊이 녹아 있습니다.
성도는 그것을 믿는 사람들이고,
또한 그 은혜 속에 들어가 있습니다.
▲무기력한 탕자의 아버지... <은혜>를 보여줌
유대 문화도 엄격한 가부장적 문화입니다.
그런 문화에서 재산의 절반을 나누어달라는, 그것도 아버지가 돌아가시기도 전에
이런 ‘탕자의 요구’는 사실 받아들여지기 어렵습니다.
성경 밖의 다른 유대 문헌에도, 이런 아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진 예가 없습니다.
눅15장에서만 유일하게,
아버지가 아들의 요구에 대해 응하고 받아들이는 무기력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바로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이 본문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아들들’의 죄를 위해서
힘없이 무기력하게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를 오르시는 모습입니다.
탕자 같은 ‘아들’을 위해서, 모든 수치와 부끄러움을 말없이 묵묵히 감당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가져야 할 ‘아버지 상’도 바로 이런 것입니다.
자식을 위해서, 수치와 부끄러움과 고통을, 묵묵히 당하는 그런 모습입니다.
바로 ‘은혜의 아버지 상’입니다.
그런데 김병후 정신과의사는,
우리나라에서는 ‘탕자의 비유’와 같은 사건이 일어나지 않을뿐더러,
상상도 할 수 없는 사건이라고 어느 책에서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요즘 아버지의 모습을 ‘은혜 없는 아버지’라고 말했습니다.
유대문화처럼 한국문화에서도 보통
자녀가 아버지에게 무엇을 요구하면,
아버지는 자녀에게 ‘일방적인 복종’을 요구합니다.
우리나라의 아버지는 대부분 자녀들의 반항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자녀가 아버지께 반항하는 것은, 천인공노할 사건입니다.
아버지들은, 도저히 자녀의 반항, 거역을 용납할 수 없는
어떤 전통적 자존심을 갖고 있습니다. 심한 경우 집에서 내 쫓아 버립니다.
전통이 다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은혜 없는 아버지 상>입니다.
우리는 어릴 적부터 이런 말을 많이 듣고 자라났습니다.
‘버르장머리 없는 녀석’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이..’
전통적 아버지들은 ‘엄격한 규제’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아버지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녀의 잘못을 교정하려고 합니다.
물론 아버지는 교정해야 하고, 자녀는 그 교정을 받아야 합니다.
그렇지만 교정하는 아버지가, 자기 주관과 자기 방식으로 행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교정이 종종 더 부정적인 결과(반항 등)를 낳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눅15장 탕자의 비유를 읽을 때면,
자녀 앞에서 아버지의 모든 권위를 스스로 내려놓았던
‘아버지의 은혜’를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베드로, 바울을 변화시킨 것은 <은혜>이지, 강압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은혜>만.. 죄인을 회개시키고, 심령의 변화를 통해 새사람을 만듭니다.
▲은혜를 보여주어야 할 사명
한국사회는 값싼 기독교, 값싼 은혜를 믿는 사람들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과 그 은혜의 본질이 가리워져 버렸습니다.
은혜는, 말로 되는 것이 아니고,
그런 주님의 고귀한 은혜를 오늘 우리가 세상에 직접 보여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한국 사회에
은혜의 역사가 나타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은혜 아래 거하십시오!
얼마 전에 모 방송국에서 ‘신의 길, 인간의 길’을 방영하면서
<이슬람교를 관용의 종교, 형제애의 종교>로
<기독교를 편협한 종교>라는 식으로 왜곡해서 보도했는데,
기독교가 ‘은혜’를 상실한다면
앞으로 실제로 진짜 그런 비판을 사회로부터 듣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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