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분적인 것, 완전한 것 고전13:9~10 08.09.14.하용조 목사님 설교중 일부녹취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완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없어지리라 고전13:9~10
여기서 '완전한 것'이란 사랑을 뜻합니다.
'부분적인 것'은 사랑 이외의 모든 것을 뜻합니다.
부분적으로 알던 것은, 완전한 것이 올 때는.. 다 사라지게 됩니다.
나는 설교를 준비하면서,
목회에 있어서 완전한 것과 부분적인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부분적인 것'은
의자, 건물, 숫자, 조직, 시스템
이런 것들 우리가 열심히 하지만, 사실은 다 부분적인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들,
즉 큐티, 일대일 양육, 공동체, 순cell 모임 등도
이런 것들도 다 부분적인 것들입니다.
좀 더 깊이 생각해 보면
우리가 지금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Acts29, 비전교회, 러브 소나타, CGN TV 들도
이 말씀에 비추어 보면, 다 부분적인 것들입니다.
이 부분적인 것들은 틀린 것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것들을 해야 합니다.
주님 오시는 날까지 우리는 그 일들을 계속 해 나갈 것입니다.
▲그러면, 이 부분적인 것들이 완전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랑의 아교풀이 들어가야 합니다.
예를 들면, 큐티를 할 때도,
거기에 주님과 이웃을 생각하며 눈물 어린 사랑이 있고,
그 날의 말씀을 적용할 때,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사랑의 겸손이 있고,
사랑의 기다림(오래 참고)이 있고,
사랑의 작은 친절(친절하며)이 있고,
사랑의 예의(무례히 행치 아니하고)가 있어야 합니다.
사랑이 없는 큐티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고전13:2
우리가 일본에 가서 ‘러브 소나타’(초청전도 집회)를 하지만,
그 지나간 자리에, 사랑의 향기가 남아있어야 합니다.
‘와! 한국 사람들이 자기 돈 들여서 비행기타고 와서, 죽도록 고생하고 가는 구나’
그래서 일본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감동 받아) 눈물 흘립니다.
크리스천의 사랑을, 일본인들에 대한 사랑을... 그들이 느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중대하게 수행하고 있는 일들을 한 번 정직하게 들여다봅시다.
그 일에 ‘옳은 것’은 있지만,
‘사랑’이 묻어있느냐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부분적인 것들입니다.
‘사랑’이 아교풀처럼, 모든 것을 완전하게 만들어줍니다.
▲우리 가정이 완전해 지려면, ‘사랑’이 필요합니다.
좋은 집도 필요하고, 좋은 차도 필요하고,
자녀들 공부 잘 하는 것도 중요하고, 건강도 중요하지만,
다 부분적인 것들입니다.
‘사랑’이 있을 때, 비로소 가정이 완전해 집니다.
▲우리 사회에서도 지금 꼭 필요한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우리나라의 GDP가 올라가고, 선진국이 된다고 해서
정말 살기 좋은 완전한 나라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국가나 경제단체, 사회단체에서 해야 될 일이고,
우리 교회와 성도들이 해야 할 일은
‘사랑’이 강물처럼 흐르는 사회로 만들어가는 일입니다.
‘사랑’의 아교풀로 접착될 때, 비로소 이 사회가 온전해지기 때문입니다.
정치에도 사랑을,
교육에도 사랑을,
직장에도 사랑이 흐르도록 하는 일이
우리 각 개인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해야 할 빛과 소금의 사명입니다.
본문은 그래야 '완전해진다'고 가르칩니다.
....................................... 관련글 .......................................
◑교회의 믿음이 식어질 때, 사랑도 식어진다.
토스토에프스키가 쓴「죄와 벌」을 보십시오.
'고리대금업자 같은 인간쓰레기는 이 사회에서 반드시 없어져야 한다'는 신념으로,
도끼로 그 노파를 찍어 죽였던 라스꼴리니꼬프가 누구를 통해서 거듭났습니까?
목사를 통해서 입니까? 교인을 통해서 입니까?
러시아 정교회 사제를 통해서 입니까? 창녀 쏘냐를 통해서 거듭났습니다.
톨스토이의「부활」속에 등장하는 네플류도프는 또 어떠합니까?
그 역시 창녀 카츄사에게서 속죄를 구하고 있습니다.
라스꼴리니꼬프와 네플류도프가 창녀에게서 위로를 얻고, 평안을 얻고,
속죄의 동기를 얻던 그 시대에, 기독교는 제정 러시아의 국교였습니다.
도처에 십자가요, 그리스도인들 천지였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교회와 교인은 창녀보다도 더 못했다는 것을
토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는 자기 작품을 통해서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신자들이 창녀에게서 참된 위로와 평화를 얻고
창녀로부터 참회의 동기를 부여받는 시대라면,
그것은 <기독교의 위기>를 의미합니다.
만약 창녀가 그리스도인보다 더 참된 영향을 미치고 있다면,
그것은 크리스천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지 않고 있음을 의미한 것일 뿐이기에,
기독교의 위기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단락 펀 글 96.12.22.
(아마도, 창녀는 산전수전 다 겪어서
어쩌면 인생과 삶을 깊이 이해하는 훌륭한 상담자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매매춘은 잘못이지만, 위 소설의 이야기는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라 봅니다.)
◑십만원짜리 목욕
(지난 설 무렵 저는 신문 컬럼을 읽다가는 가슴 찡한 감동을 맛보았습니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말이 실감났습니다.)
상호씨는 말 그대로 효자입니다. 중풍을 앓는 어머니를 요양병원에 모시면서
그는 퇴근 후 매일 밤 어머니 곁에서 잠을 잤습니다.
가벼운 치매 증상까지 보이는 어머니를, 그는 정말 소중히 보살폈습니다.
그는, 어머니가 가끔 휴지를 둘둘 말아 김밥이라고 내밀어도 “아이구, 이거 맛있겠네” 했고,
어머니를 부축해 복도를 걷던 중, 어머니가 선 채로 실례를 하셔도
“아이구 울 엄마 시원하겠네” 하며, 환한 웃음을 짓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빼빼 말라가면서도 밤에 어머니 곁을 지키는 이유는
간병인이 없으면, 주무시는 어머니의 팔다리를 붕대로 침대에 고정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설 전날 상호씨는 간병인 아주머니께 간곡한 부탁을 드렸습니다.
“아주머니, 저, 제가 십 만원을 따로 드릴 테니
다른 아주머니 한 분하고 같이 설 전에 우리 어머니 목욕 좀 시켜 주세요.”
간호사들이 가끔 소독 거즈로 닦아드리고,
자신이 주말마다 병원 샤워실에서 어머니 목욕을 시켜 드리긴 하지만
마음에 걸렸던 모양입니다.
그날 간병인 두 분이 큰 대야에 따뜻한 물을 받아 목욕시켜 드렸습니다.
오랜만에 편안하고 고운 모습으로 침대에 누우신 어머니의 표정이
그렇게 밝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날 밤 상호씨는 준비해 온 한복을 어머니 머리맡에 두고, 머리를 빗겨드리면서
오랜만에 맑은 정신을 찾은 어머니와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울 엄마, 올해도 병원에서 세배 받게 생겼네.
이제 얼른 나아서 내년에는 세배도 집에서 하고, 차례도 집에서 모십시다.”
다음 날 아침 상호씨는 어머니께 한복을 입혀드리려다가
어머니가 다시는 깨지 못할 깊은 잠에 드셨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한겨레신문, 2008.02.16.
▣ 사 랑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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