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분류 없음/2008

1515 예수 이름 부르면 산다

LNCK 2008. 10. 3. 21:03
 

◈'예수' 이름 부르면 산다            눅9:37~43          인터넷설교 녹취



▲지푸라기라도 붙잡을 희망이 사라진 사람들

우리나라는 OECD국가들 중에 자살률이 1위이며

특히 요즘 20대와 30대의 사망 원인 1위가 자살이라고 한다.

암, 질병, 교통사고 보다.. 자살로 인해 더 많은 젊은이들이 죽고 있다.


2007년 우리나라 보건복지가족부의 조사에 의하면

매일 34명이 자살했다고 한다. (자살 기도를 포함하면 3배 이상이 자살 시도)

2006년보다 11% 증가했다고 한다. (2006년은 하루 30명)

그렇다면 2009년과 2010년은 어떻게 될지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얼마나 절망했으면, 스스로 목숨을 끊겠습니까마는

무엇 때문에 그들이 죽음에 이르는 자살을 감행한 것일까?

아마도 살아야 하겠다는 ‘살 희망의 끈’이 깡그리 다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그런지 자살하는 사람들의 마지막 메시지가

‘살고 싶다’는 것이라고 한다.

만일 살아날 수 있는 길만 있었다면,

누군가 내 손을 잡아주기만 한다면,

지푸라기 같은 희망만 있다면, 내가 죽지 않고 살 터인데...


그래서 자살 직전 마지막 순간까지 그들은 갈등한다고 한다.

‘목숨을 끊을까, 말까?’

신발을 벗어두고도 최후의 순간까지 그들은 갈등한다고 한다.

‘뛰어내릴까, 말까?’


자살을 물리치고 살아나려면, 절망을 끊어버릴 희망이 있어야 한다.

우리 인생에 죽음까지 내 몰려도, 붙잡을 <실낱같은 희망의 끈> 하나만 있으면

그 막다른 골목에서 되돌아 올 터인데...


▲본문 설명 : 절망의 막다른 골목에서 예수님을 찾아 나온 사람

오늘 본문에 외아들을 둔 한 부모의 이야기가 나온다.

문제는, 그 자녀가 귀신에 사로잡혀 미친 사람으로 살고 있다.

때때로 발작하면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져서 경련을 일으키곤 했다.


온갖 방도를 다 찾아보았을 것이고,

귀신을 쫓아낸다는 사람들을 다 찾아보았을 것이다.

그런 끝이 안 보이는 절망 가운데... 예수님을 찾아오게 되었던 것이다.



◑ ‘예수’를 소리쳐 부르면 산다


오늘 성경은 생명을 건져낼 수 있는 중요한 비결 하나를 가르쳐 준다.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소리질러 가로되

선생님 청컨대 내 아들을 돌아보아 주옵소서 이는 내 외아들이니이다  눅9:38


절망의 순간에, 생명을 살리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예수를 찾아 소리치는 것이다.


너무 당연한 말 같지만

크리스천들도 마찬가지로, 절망의 순간에

너무 당연하게도 엉뚱한 것을 찾는다. 붙잡는다.


그러다가 못 찾고, 못 붙잡으면...

절망 가운데,

최악의 선택을 내려버린다. 예를 들면,


가정의 불화 때문에 목숨을 끊겠다고 생각한 사람이

그 죽음의 순간에 다다랐을 때에

<예수의 이름을 불러야 살아날 터인데>

가정의 불화를 생각하니까... 목숨을 끊어버린다.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죽음의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린 사람이

그 생의 마지막 순간에 다다랐을 때에

경제적인 문제를 한 번 더 곱씹으면... 자살해 버린다.

<예수의 이름을 불러야 살아날 터인데...>


남편 때문에 목숨을 끊겠다고 생각한 사람이

그 마지막 순간에.. 남편을 한 번 더 생각해 보면

도저히 답이 안 나오니까.. 자기 생명을 끊는다.

<만일 그 때, 예수께 손을 내 밀고, 잡아달라고 부르짖으면

예수님이 그 손을 붙잡으셔서, 그 절망의 순간에서 건져내실 터인데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죽음의 순간

자기가 죽음의 막다른 골목에 내몰린 원인을 깊이 한 번 더 생각한다.

왜 자기가 이 지경까지 오게 되었는지, 그 과정과 이유를 깊이 생각한다.

그 때는 도저히 답이 안 나오니까... 결국 목숨을 끊어버린다.


만일 그 순간에, 오늘 본문의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처럼

“예수님, 나를 살려 주십시오!”

“주님, 우리 가정을 살려 주십시오!”

“하나님, 우리 외아들 살려 주십시오!” 라고 부르짖었더라면

그러면 살게 되어있다. (성도들: 아멘)



◑예수 말고, 잘못된 방향을 쫓는 사람들


▲1. 경제를 쫓아가서는 안 된다.

여러분, 경제적인 것이 여러분을 건져줄 것이라고요?

미국의 경제계(월 스트리트)를 쥐락펴락했던

5대 금융기관 중에 절반이 최근 망해 버렸다.


150년 동안이나 전통과 명성을 자랑하던 금융회사(베어스턴스)가

어느 누구도 그 회사가 망할 것이라고 상상조차 하지 못했는데

그만 최근에 도산하고 말았다.


이런 뉴스를 접할 때, 우리는 교훈을 받아야 한다.

우리 가정을 <경제>가 지켜 줄 것이라고 여기고, 경제를 의지해서는 안 된다.


성경은, <경제>를 소리 내어 부르짖으라고 말하지 않고

<예수 그 이름>을 소리 내어 부르짖으라고 말하고 있다. (아멘)


1992년 노벨 경제학 수상자인 게리 벡커 박사가 최근 이렇게 말했다.

“경제는 늘 불안하다. 어떻게 그런 경제에 우리의 안전을 담보할 수 있겠는가?”

경제학의 노벨상 수상자가, 경제가 늘 불안하다고 말하는데도

우리는 경제가 나의 안전한 피난처가 되는 줄 알고, 너도나도 그 쪽으로 달려간다.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죽고 싶다고요?

경제 문제만 해결되면 살 것 같다고요?

이것은 사탄이 주는 생각이다.

‘경제’를 넘어서 ‘예수’를 바라보셔야 한다.


작년 봄~가을에 올림픽 특수를 내다보며 중국 증시가 막 뛰어올랐다.

그래서 너도나도 중국 펀드에 가입했는데,

모든 해외 펀드가 울상이지만, 그 중에도 중국 펀드가 지금 가장 많이 내렸다.

경제는 그만큼 불확실한 것이다. 이런 일은 언제든지 또 재발할 수 있다.


(경제 없이는 못 살지만) 경제에 내 삶의 소망을 걸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예수는 뒷전이고, 경제에 목숨 걸고, 그 길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2. 사람을 쫓아가서도 안 된다.


당신의 제자들에게 내쫓아 주기를 원했습니다만 그들이 내쫓지 못했습니다. 눅9:40


「그 모든 낯선 시간들」이란 책을 쓴 어느 인류학자는

그 책에서 <인간은 돌보다 더 약한 존재다> 라고 결론 내렸다고 한다.

일면 맞는 말이다.

인간을 절대 의지해서는 안 되고, 의지할 수도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리석은 것인지, 그렇게 하고 싶은 것인지,

<남편>을 의지하고 산다. 늙으면 <자식>을 의지하고 산다.

여러분, 예수만 의지하시기 바란다.


예수의 제자들도, 예수 의지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처음에 제자들을 찾아갔던 주인공 아버지는... 허탕만 치고 말았다.


오직 ‘예수’ 이름만 부르는 사람만,

절망의 먹구름에서.. 희망의 햇살을 발견한다.


▲관심 총량의 법칙

「관심의 경제학」이란 책에는

인간 개개인에게 ‘관심’은 언제나 그 총량이 한정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그 관심의 총량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인간이 새로운 관심을 얻기 위해서는,

기존의 관심대상을 없애버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쉽게 말하면, 북경올림픽 때 한국야구 결승전이 최고의 관심을 끌었다.

같은 시간에 태권도에서 금메달을 땄는데,

국민들은 야구에 관심을 쏟았기 때문에, 태권도가 금메달을 따든지 말든지

별로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다. 차동민 선수가 땄다고 한다. (생소한 이름이죠?)


예수 믿는 사람들은, 절망의 순간에 관심의 총량이 정해져 있다.

즉, 나를 절망시키는 문제에 집중하게 되면.., 예수에 대한 관심이 적어지고,

반대로 예수에 대해 내 관심을 온통 집중하게 되면... 문제에 대한 관심이 사라진다.


자살 직전에,

예수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며, 예수님께 관심을 돌리면

남편, 경제, 애인, 질병 등 기타 자기를 죽음의 절망으로 몰고 간 문제에 대한

자기의 관심이 적어진다는 것이다.


성경적 원리와 ‘관심 총량의 법칙’이 우연하게 일치한다.

그래서 신자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예수 이름을 불러야 한다. 그래야 산다.

이 찬송을 부르시면서, 예수의 이름을 불러보시기 바란다.


♬슬픈 마음 있는 사람 예수 이름 믿으면

영원토록 변함없는 기쁜 마음 얻으리

예수의 이름은 세상의 소망이요

예수의 이름은 천국의 기쁨일세♪ (옛91장)


예수 믿는 사람이 절망을 이길 수 있는 길은

예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그 쉬운 ‘예수’ 이름을 못 부르는 이유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눅9:41


그런데 교회를 다니는 신자라 할지라도

‘예수 이름 부르고, 예수께 가면, 내 인생 살 수 있다’믿음이 없을 수 있다.

그래서 그 쉬운 ‘예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자기에게는 너무 어려운 것이다.

믿음의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패역한’이란 말은 ‘완고한 stubborn’ 이란 뜻이다.

‘되기는 뭐가 돼? 내가 10년 동안 기도 했는데도 안 되던데...’


그럴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11년 기도했으면 되었을 것을, 10년만 하니까 안 될 수도 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예수님 말씀을 믿어야 한다.

예수님은 ‘예수 이름을 부르면 된다’고 하신다.

그런데 ‘되기는 뭐가 돼?’ 하는 것은... 나의 불신이며 완고함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믿음’을 가져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그 절망의 순간에

‘예수 이름 부르면 산다,

예수께서 내 손 잡아 주시면 나는 절벽에서 미끄러져도 다시 기어나온다’고 믿고,


믿음이 없는 사람은

그 절망의 순간에

‘예수 이름 불러도 소용없더라. 나는 최후의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평소에 신앙생활을 성실히 해야 한다.

평소에 믿음의 기본기는 닦아놓고 살아야 한다.

<08.09.28. 인터넷설교 녹취  *원제목 : 절망을 희망으로


[주제별 분류] 크리스천의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