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목자는 풍성한 삶을 얻게 하신다 요10:7~18 설교 스크랩
◑1. 선택의 기로에서
▲영화 ‘우리 생애 최고의 해’
‘우리 생애 최고의 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2차 대전시, 헤럴드 러셀은 공수부대원으로 전투에 나갔다가 포탄에 맞아서
두 팔을 모두 잃어버린 불구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좌절에 빠졌습니다.
“나는 이제 쓸모없는 고기 덩어리가 되었구나!”
그런 절망의 세월을 보내는 가운데 예수님을 만나
자기를 다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잃은 것보다 가진 것이 자기에게 더 많다고 자각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의사가 그에게 의수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는 피나는 노력을 하였습니다.
그는 의수로 글을 쓰고 타이프도 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영화화되어 직접 불구자의 모습으로 출연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정성을 다해 연기를 하였습니다.
그 해 그는 이 영화로 아카데미 주연상을 탔습니다.
그 상금은 상이용사를 위해 기부하였습니다.
어떤 기자가 찾아와 물었습니다.
“당신의 신체적인 조건이 당신을 절망케 하지 않았습니까?”
“아닙니다. 나의 육체적인 장애는 나에게 도리어 가장 큰 축복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언제나 잃어버린 것을 계산할 것이 아니라 남아있는 것을 생각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남은 것을 사용할 때 잃은 것의 열배를 보상받습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에만 눈을 돌릴 때 그곳에는 오직 절망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들 가운데 아직도 남아 있는 것들을 세어보면
풍성한 인생이 아직도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문제가 본질이 아닙니다.
키엘케골의 책 가운데 “이것이냐 저것이냐?” 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연애를 해보라. 후회할 것이요, 연애를 하지 말라. 그러면 또한 후회하리라.”
이해가 잘 되십니까? 약간 헷갈리지요?
그런데 지금은 키엘케골과 비슷한 이야기를, 내가 하는 것을 발견합니다.
제가 미국에서 목회할 때, 유학와서 박사 학위 받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저를 찾아와서 예언기도를 부탁했습니다.
“미국에 남는 것이 하나님 뜻입니까? 한국에 돌아가는 것이 하나님 뜻입니까?”
저는 그들에게 키엘케골처럼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미국에 남아보십시오. 후회할 것이요,
또한 한국으로 돌아가 보십시오. 그러면 후회할 것입니다.”
우리의 선택은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선택이 아닙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선택은,
조건이나 환경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행복이 조건이나 환경에 좌우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 생애 최고의 해’는 나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헤럴드 러셀은 두 팔을 잃은 장애인이었습니다.
조건 면에서 어찌 두 팔이 없는 사람과 두 팔 있는 사람을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언제나 하나님 편, 신앙 편을 택하십시오
우리의 선택은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선택이 아닙니다.
우리의 선택은 ‘하나님을 택할 것인가/ 아닌가?’입니다.
여러분, 아브라함과 롯의 선택을 기억하시죠?
아브라함이 가나안에서, 그들은 하나님께 복을 받아서 거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롯을 불러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복을 받아서 양떼가 많아졌다.
그렇기 때문에 너의 양을 지키는 목자들과 나의 양을 지키는 목자들이
더 좋은 목초지를 차지하려고 서로 싸우고 있는데
이것 때문에 우리의 사이가 나빠질 수 있다. 그러니 우리 서로 갈라서자.
네가 좌하면 내가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겠다. 먼저 선택하라.”
롯은 요단 들판을 바라다보았습니다.
그곳은 온 들판에 물이 넉넉하고 애굽과 같고 ‘여호와의 동산’ 같았습니다.
사는데 아주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롯은 요단 들판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롯의 결말을 아시지요?
그는 거기서 점점 남방으로 내려가 소돔성에 거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소돔 고모라 성이 멸망할 때에 아내를 잃고 겨우겨우 목숨을 건졌습니다.
반면에 아브라함은 가나안 산지로 갔습니다.
그곳은 황량하고 메마른 들판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사실 하나님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먼저 선택하였기 때문에, 조건이 좋지 않는 가나안 산지로 갔으나
하나님의 복을 받아 복의 근원이 될 수 있었습니다.
‘한국이냐? 미국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 사람과 함께 할 것이냐/ 아니냐?’ 하는 것이 행복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선택하고 순종하기로 작정하면 이 사람과 결혼해도 행복할 것이요,
하나님을 선택하고 순종하기로 작정하면 한국에서 살아도 행복할 것이요,
미국에서 살아도 행복할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선택의 기로에 서 있습니까? 먼저 하나님 편을 선택하십시오.
그리고 무엇이든지 마음에 드는 것을 시작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생애 최고의 해를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 서로 함께 나눕시다. “하나님 편을 선택합시다.”
◑2. 예수님은 풍성한 삶을 주십니다.
▲죄에서 구원 + 풍성한 삶
예수님이 오신 목적을 단순히 우리들의 죄를 씻어주고
우리를 죄악 가운데서 건져내기 위한 것이라고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만은 아닙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요1:14절은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은, 예수님을 만나는 사람들마다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을 받고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게 하려는 것’ 이라고 선포합니다.
요4:14절은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샘물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7:37~38절은,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예수님은 우리의 내면에서 생수의 강이 터져 나오게 하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사랑의 생수, 기쁨과 감격의 생수, 은혜의 생수가 터져 나오게 하는 것이
예수님이 오신 목적입니다.
위 구절들은 한결같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풍성한 삶>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왜? or 무엇을, 어떻게?
몇 년 전, 로마 교황이 미국을 방문한 일이 있습니다.
교황을 환영하는 모임에서 두 팔이 없는 젊은이가
두 발로 기타를 연주하며 찬양했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젊은이의 목소리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찬양이 끝나자 교황은 연단에서 내려와 이 청년의 뺨에 키스를 하며
축복해 주었습니다. 이 청년의 이름은 토니 멜렌데즈였습니다.
찬양이 끝난 후에 사회자가 청년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께, 왜 나는 두 팔이 없어야 하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습니까?”
그러자 토니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을 내게서 하시고자 하십니다.”
동문서답같이 들리지요?
토니의 대답은 ‘왜’의 질문을 가지고 사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어떻게?’의 질문을 가지고 산다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 왜 나는 두 팔이 없는 인생을 살아야 합니까?
왜 나는 저주받은 장애인이 되었습니까?” 하는 질문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런 질문을 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 나는 두 팔이 없는 장애인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나는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 수 있겠습니까?”
하는 질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통하여 하시고자 하는 그 일을 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는 것이 - 진정한 행복
진정으로 행복한 인생이 무엇입니까? 생수의 강이 넘치는 인생이 무엇입니까?
풍성한 생명이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우리의 몸으로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바로 그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 땅에 평화를 만드는 일이요,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요,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일입니다.
우리 교회도, 하나님이 하시기 원하시는 일을 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이 교회가 이 땅에 평화를 만들고,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고,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일을 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3. 예수님은 선한 목자가 되십니다
▲천주교와 개신교 예배의 컨셉의 차이
천주교는 성직자가 제사장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목사라고 부릅니다.
기독교는 성직자만 제사장이 아니라, 모든 성도들이 다 제사장이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을 우리는 ‘만인 제사장직’ 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천주교와 기독교의 예배는 컨셉의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유월절 양이 되셔서 십자가에서 속죄의 제물이 되셨습니다.
천주교는 예배를 통하여 예수님이 드린 속죄의 제사를 재현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주교의 예배는 언제나 성찬식이 주가 됩니다.
천주교 예배는 제사입니다.
예배를 집례하는 성직자는, 예복을 입은 제사장priest 성격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다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단 번에 제사를 드리셔서
우리의 속죄와 구원을 완성했다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더 이상 속죄의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제사를 통하여 완성하신 열매들을 나눕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들의 용서를 이루셨습니다.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우리의 평화를 이루셨습니다. 우리의 치료와 건강을 이루셨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기적을 이루셨습니다.
기독교 예배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용서와 구원과 평화와 치료와 건강과 생명의 기적을 나눕니다.(누립니다)
▲목자의 사명
예배를 집례하는 자는 예수님께서 이루신 열매들을 나누어주는 사람입니다.
선한 목자가 되어서 양들에게 꼴을 먹이듯이, 성도들에게 용서와 구원을 나누어 주고,
평화와 사랑을 전달하고, 치료와 건강을 나누고, 생명의 기적을 전달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제사장이라고 부르지 않고 목사(=목자, 양 먹이는 자)라고 부릅니다.
저는 목사가 되어서,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풍성한 생명을 나누어주는 사람입니다.
목자는 양들이 먼저입니다. 양들의 사정에 따라서 목자의 할 일이 달라집니다.
양들이 배고프면 먹을 것을 주어야 하고,
양들이 목마르면 잔잔한 시내로 인도하여야 하고,
양들이 상처를 입었으면 치료해 주어야 하고,
양들이 잠이 필요하면 잠을 잘 수 있게 해 주어야 합니다.
목자의 일은 언제나 양들의 사정에 따라 달라집니다.
목자는 양들의 필요를 채우는 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는 선한 목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필요를 먼저 살피시고,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는 분입니다.
여러분, 오늘 여러분들에게 꼭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갈급한 심령을 채우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들의 갈급한 심령을 채우려고 여기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의 갈망을 아시는 분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은 무엇이 필요합니까?
마음의 평화를 원하십니까?
죄를 씻음 받기 원하십니까?
병 고침을 원하십니까?
하늘의 양식을 원하십니까?
여러분의 마음에는 어떤 갈망이 있습니까?
우리 예수님은 우리들의 선한 목자이십니다.
우리의 필요와 갈망을 채우시려고 찾아오신 분입니다.
그분께서 여러분들을 채워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라.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은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눅11:10~13
지금 선한 목자께 구하십시오. 그러면 선한 목자께서 나의 필요를 채우실 것입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립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요10:14~15
한 이민교회의 성도는 오늘의 시대를 이런 말로 표현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목자가 양들을 찾아다니고, 목자가 양들을 위해 생명을 버렸지만,
오늘의 시대에는 양들이 목자를 찾아다니고
양들이 목자를 기쁘게 하기 위하여, 온갖 아양을 다 떨어야 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그의 이야기 속에는 과장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어쩐 일인지 오래 전에 들은 그의 말이
나의 머리에서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생생하게 남아있습니다.
이 말은 목자로 부름을 받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예언의 음성 같았습니다.
에스겔이 받은 하나님의 말씀은
바로 이 교회의 목자로 부름을 받은 나를 향하여 내리시는 하나님의 경고는 아닐까요?
주 여호와의 말씀에, 자기만 먹이는 이스라엘 목자들은 화 있을진저.
목자들이 양의 무리를 먹이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냐?
너희가 살찐 양을 잡아 그 기름을 먹으며 그 털을 입되
양의 무리는 먹이지 아니하는 도다...
목자가 없으므로 그것들이 흩어지며 흩어져서 모든 들짐승의 밥이 되었도다. 겔34:2-6
▲심프슨 여사의 고백
영국의 윈저 공 에드워드 7세는 1936년에 대영제국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대관식을 한지 8개월 후에 그는 왕위에서 물러나 세계를 놀라게 했습니다.
심프슨 여사를 사랑하여, 그녀와 결혼하기 위하여 왕위를 버린 것입니다.
심프슨 여사는 회고록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참으로 행복한 여자다. 나는 잠시라도 슬픔을 가질 자격조차 없다고 생각되었다.
왕관보다 나를 더 사랑하고, 왕국보다 나를 더 귀중히 여겨주고,
그 막대한 권력과 부(재물) 보다 나를 더 사랑해 주는 남자를.. 가진 여자가 또 있을까?”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대영제국의 권세가 하늘나라의 권세만할까?
대영제국의 왕관이 하늘나라의 영광에 비교할 수 있을까?’
예수님은 하늘의 권세와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에게 풍성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우리의 목자 예수님은, 심프슨 여사처럼 매력도 없는 우리를,
하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시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늘 왕관을 버리시고, 나의 선한 목자가 되셨습니다.
그 예수님은 우리에게 반드시 풍성한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
하늘의 양식으로 여러분들의 잔이 넘치시기를 바랍니다.
<2006년 인터넷 설교에서 발췌, [주제별 분류] 복음 관련
'분류 없음 > 2006'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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