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의 고향 시84:1-12 2008.09.28. 스크랩, 축약
사람이, 아무리 지치고 피곤해도,
고향이 있고, 밤에 편히 쉴 곳이 있으면... 새 힘을 얻습니다.
혹시 나는 '영적인 노숙자'는 아닌지요?
▲84:1절,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아무나 주의 장막, 즉 교회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만이 교회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은혜를 입고 복을 받은 자는 반드시 고백이 나옵니다.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왜 교회가 그렇게 사랑스럽습니까?
교회는 하나님 백성에게 마음의 고향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 어거스틴은 ‘교회는 어머니 품과 같다’고 했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순교하시기 바로 직전에
사모님이 면회를 갔는데 그랬다지요. “엄마 얼굴 보고 싶다”고 하시더랍니다.
저도 이 말이 실감이 나요.
공주 요양소에서 결핵투병생활 할 때였는데, 어느 날은 ‘이제 죽는구나’ 싶어요.
그런데 이상하게 엄마가 보고 싶은 것 있지요. 엄마 얼굴이 너무 보고 싶어요.
이게 바로 사람에게는 회귀본능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고 싶은 본능이지요.
사실은 그 본능은 엄마 품이 아니고, 하나님의 품입니다.
이 지상에서 하나님의 품과 가장 닮은 곳은 교회 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은, 교회를 사랑하고, 나아가 사모합니다.
▲2절,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얼마나 사모했으면.. 영혼이 쇠약할 정도로 사모하겠습니까?
작년(2007) 가을, 대한민국에 펀드 열풍이 불어서, 너도 나도 펀드를 사모했습니다.
그러나 증권은 ‘영원한 마음의 고향’이 아니었습니다.
1년 만에 그것은 ‘마음의 근심’거리로 돌변했습니다.
어디 증권만 그렇습니까? 세상이 다 그렇습니다.
주님 말고는, 그 어느 것이라도, 쇠약할 정도로 사모하면... 우상이 됩니다.
그러나 주님 품을 고향으로 삼고, 쇠약할 정도로 사모하면... 큰 은혜를 받습니다.
시122:6, 예루살렘의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그 행사가 형통하리로다.
여기서 ‘예루살렘’은, 바로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말합니다.
오늘날로 치면 교회를 말합니다.
교회의 평안을 구하고 교회를 사랑하면, 그 행사가 형통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3절,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나이다.
참새와 제비는, 세계 어디를 가든지 보게 되는 가장 평범한 새입니다.
몸집도 작고, 떼를 지어 다니는 겁이 많은 새입니다.
공작처럼 우아함도 없고, 독수리처럼 용맹함도 없습니다.
참새와 제비는 별로 가치가 없는 새들입니다.
그런데 참새와 제비같이 별로 보잘 것 없는 새들도
주의 전에서 보금자리를 얻어 사는데
하물며 하나님 백성들이 어찌 주의 전에서 보금자리를 얻을 수 없단 말입니까?
시인의 눈으로 볼 때에 주의 성전 곳곳에 참새나 제비들이 집을 짓고 사는데,
하물며 새보다 귀한 하나님 자녀인 내가, 여기서 위로를 받을 수 없단 말인가?
당연히 고향, 보금자리, 위로를 받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도 공중의 새를 보라, 들의 백합화를 보라,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말씀하시며
하나님의 돌보심을 믿으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당연히 제비보다 귀하고, 참새보다 귀합니다.
▲4절, 주의 집에 거하는 자가 복이 있나이다. 저희가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셀라)
누가 복이 있다고요?
항상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를 마음의 고향으로 삼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또한 항상 주님의 임재를 사모하고, 동행하는 사람입니다.
사람이 일생동안 가장 많이 사는 곳이 집입니다.
우리는 일생 동안 집에서 살다가 집에서 그 인생을 마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집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집의 중요성을 잊어버리고 살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집을 건물로 생각하고 살지만, 사실은 건물이 집이 아닙니다.
어렸을 때는 ‘부모의 품’이 나의 집이 됩니다.
그래서 학교 갔다가 집에 돌아오면, 엄마가 없으면 집이 텅 빈 것 같습니다.
나이가 들면 집의 변화를 경험합니다.
결혼 후에는 ‘남편’이 집이 되고, ‘아내’가 집이 됩니다.
그래서 남편들이 아내를 ‘집사람’이라고 소개합니다.
남편이 아무리 능력이 있다할지라도
‘의지할 수 있는 품’이 되어 주지 못하면.. 아내의 마음은 떠납니다.
아내가 아무리 미모가 뛰어나더라도
그가 남편에게 ‘편안한 집’이 되어 주시 못하면.. 남편이 떠납니다.
그런데 세상 집은 변합니다. 부모도 떠납니다. 남편도 아내도 언젠가 떠납니다.
내 인생에 있어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나의 집이 되고 안식처가 되시는 분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편 기자는
주의 집에 거하는 자가 복이 있나이다(:4) 라고 고백합니다.
▲5절,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교회 왔다고 해서 다 하나님 앞에 나아온 것은 아닙니다.
교회 왔다고 해서 다 하나님 만나는 것은 아닙니다.
<주께 힘을 얻어야>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긍휼을 입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 와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자가
교회를 마음의 고향으로 삼고 거기서 복된 삶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나아가는 <시온의 대로>는 누가 열수 있습니까?
<주께 힘을 얻은 자> 곧, 은혜 받은 자가 열 수 있습니다.
시집 간 딸이 친정에 오면, 시집살이의 고달픈 이야기들을 늘어놓습니다.
시어머니 구박 이야기, 시누이 미운 이야기, 시동생 말썽 피우는 이야기,
미주알고주알 밤새도록 친정 엄마에게 일러바칩니다.
그러면 엄마가 딸을 위로합니다. “시집살이 다 그런 거야, 참고 살아야지!”
딸은 다시는 시집에 안 갈 것 같이 흉을 보고는,
그 다음날 채소 보따리, 음식 보따리 챙겨서 헤헤 하며 시집으로 떠나갑니다.
그래요, 교회는 ‘신앙의 친정집’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살이 가정생활 고달팠던 것 다 주님께 일러바치세요.
그리고 이 보따리 저 보따리 많은 은혜의 보따리 담아 웃으며 일어서세요.
교회 와서 은혜의 보따리 잔뜩 담아 일어서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당당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6절, 저희는 눈물 골짜기로 통행할 때에 그곳으로 많은 샘의 곳이 되게 하며
이른 비도 은택을 입히나이다
시84편은 가만히 앉아서 아니면 누워서 떠오른 시상이 아니라
신앙생활의 생생한 체험에서 나온 시입니다.
눈물 골짜기는 ‘바카 골짜기’라 하는데,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려고 하면
지형적으로 이 메마르고 건조한 골짜기를 거쳐야 했다고 합니다.
이 바카 골자기 지나야 성전에 올라가 하나님 뵈올 수 있듯이
성도들도 이 눈물의 골짜기 거쳐야만, 시온의 대로가 활짝 열려
하나님이 주시는 넘치는 복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눈물 골짜기>를 지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어떤 때는 사업과 시험의 실패의 골짜기를 지날 때가 있고
어떨 때는 질병의 골짜기를 지나면서
병상에서 누워서 눈물을 흘릴 때가 있습니다.
어떨 때는 자식이 속을 썩여 눈물 골짜기가 되는 때도 있습니다.
오늘 시편기자가 말하는 눈물 골짜기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기도의 눈물>을 말합니다.
우리가 기도의 눈물 골짜기를 지날 때,
그 곳이 많은 샘의 곳이 되게 하고 이른 비도 은택을 입게 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깊은 영적 의미를 담고 있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백성이 고난 가운데서도 눈물로 기도하면
도리어 그 고난 때문에 더 큰 은혜를 체험하게 되고
이른비의 은택을 입게 됩니다.
‘이른 비의 은택’이란,
팔레스틴 지방에 10-11월에 내리는 비로써 파종하게 하는 비입니다.
이 비가 내려야 땅이 촉촉해 지고, 결실을 위한 씨를 뿌릴 수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 가운데
고난당하여, 신앙생활 하기 힘들다고 여기시는 분 있습니까?
눈물 골짜기 즉 눈물의 기도를 하세요.
그러면 그 고난이 도리어 내게 축복이 되고
많은 것을 심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이른비의 은택을 내려 주실 것입니다.
▲7~8절, 그들은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소서. 야곱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이소서(셀라)
<눈물의 기도의 골짜기>를 통과한 자는
힘을 더 얻고, 영적인 부익부 현상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시온의 대로가 더 활짝 열려질 줄 믿습니다.
▲9절, 우리 방패이신 하나님이여 주의 기름 부으신 자의 얼굴을 살펴보옵소서.
‘얼굴을 살펴보옵소서’란 말은
자기 사정을 세밀히 살펴봐 주시고, 긍휼을 베풀어 달라는 간구입니다.
하나님의 깊은 임재 속에 들어간 자의 친밀한 고백입니다.
▲10절,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감리교 광림교회 김 선도 원로 목사의 간증입니다.
공군 군목으로 계실 때 그 부대 제일 높은 지휘관을 전도했습니다... (클릭)
대상26:8절에 보면, 오벧에돔의 자손 62명이 하나님 전의 문지기로서
그 직무를 잘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많은 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 전의 문지기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히 받은 사람만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의 천 날 보다 낫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다고 여깁니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의 문지기 정신’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문지기 정신은 바로 봉사하는 삶을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 받은 증거가 무엇이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지배하고 섬김을 받는 삶이 최고의 복이지만,
크리스천의 삶은 바로 섬김의 삶이요, 봉사하는 삶인 것입니다.
오늘 교회 안에 하나님 문지기 정신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전인 교회를 지키려고 하는 문지기가 없습니다.
하나님 백성이 은혜를 받아 하나님 전의 문지기가 되어서라도
그 은혜에 보답하고자 하는, 진정한 은혜 받은 자가 희박해져 갑니다.
한국교회 안에 사람도 많고 돈도 많은데, 하나님의 역사는 희미해져 갑니다.
왜일까요? 문지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한국초대 교회는 새벽마다 교회 종을 치는 종지기 장로가 있었습니다.
새벽마다 재단 뿔 붙들고 눈물 흘리며 기도하는
기도의 청지기 권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러한 문지기 정신이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골1:24절에 바울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교회를 위하여 자기 몸이라도 바치겠다, 어떤 고난도 달게 받겠다는 바울의 고백!
바로 하나님 문지기 정신이 아니겠습니까?
▲11~12절,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이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히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주님을, 자기 해와 방패로 믿는 사람은, 어떤 난관이 닥쳐도 두려움이 없습니다.
종교 개혁자 루터는 밤이 되면 이렇게 기도하곤 했습니다.
“하나님 이게 제 세상입니까? 하나님 세상입니까?
제 교회입니까? 하나님 교회입니까?
하나님 세상이고 하나님 교회라면 하나님이 돌보십시오.
저는 피곤해 자야겠습니다. 내일 아침에 다시 뵐게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해요 나의 방패가 되십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께 맡기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불확실한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방황하지 않습니다. 당황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마음의 고향이 분명하고, 우리의 안식처가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08.09.28. 인터넷설교 스크랩, 축약. *원제목 : 마음의 고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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