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성애적 리더십 요10:14 설교 스크랩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요10:14
만약 내 경제적/건강의 형편이 어려워지면
‘이웃의 신음소리를 듣고 살아라’는 주님의 뜻으로 이해하면...
거의 정확하고 또한 감사할 일입니다.
그런 신음소리를 못 듣는 사람은, 참된 지도자가 아니니까요!
◑1. 이웃의 아픔에 참여하는 <모성애적 리더십>이 됩시다.
▲가부장적 vs 모성애적 가치관의 갈등
대한민국은 전통적인 문화에서 새로운 문화로 이전되는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전통적인 가부장적 가치관과 모성애적 가치관의 갈등입니다.
가부장적인 문화는 카리스마, 힘과 능력을 가진 아버지가
독단적으로 계획을 세우고, 자기의 뜻을 실현하기 위하여
강제, 권세, 그리고 폭력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지배하는 문화입니다.
가정에서 아버지는 절대권력, 지배, 힘, 폭력으로 상징될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뜻이 가정에서도 순조롭게 이루어져야 가정은 평화합니다.
기업도 마찬가지입니다. 돈과 권력을 가진 사장이 회사를 지배하려고 합니다.
사장의 뜻이 ‘사장의 마음에서 이루어진 것과 같이 회사에도 이루어져야’
회사는 평안합니다.
그리고 국가도 그렇습니다. 힘을 가진 권력자들이 자기들의 뜻을 세우고
여러 가지 방법과 힘과 권력을 동원하여 그 뜻을 관철시키려고 합니다.
지도자의 문제도 (참여정부 시절 2006년 설교)
가부장적인 가치관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닐까요?
지도자는 자기의 계획과 뜻을 세웁니다.
그리고 그 뜻이 이루어져야 나라가 평안하고 부강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모든 수단과 방법, 권력을 다 동원하여 그 뜻을 이루려고 합니다.
그래서 언론과 많이 부딪혔습니다.
전교조나 대학생들까지도 가부장적인 생각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계획과 뜻을 세우면서,
반드시 그것이 이루어져야 세상이 아름답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무슨 방법을 쓰든지 그 뜻과 계획을 관철시키려고 투쟁합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불법과 폭력과 음모와 술수를 동원합니다.
이렇게 자기의 뜻과 계획을 실현하기 위하여
상대를 강제하고 지배하려는 것들은.. 가부장적인 문화의 유산입니다.
▲가부장에서 → 모성애적인 문화로 바뀌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대는 바뀌고 있습니다.
‘모성애적 문화’는
그 연민, 감동, 아픔을 함께 느끼는 따뜻한 감정이입적 태도를 취합니다.
어머니들 가운데 가부장적인 의식을 버리지 못하여
자식들을 지배하고 강제하는 분들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어머니들은, 자기의 뜻을 자식들에게 고집하지 않고
먼저 자식들의 마음속에 들어가 자식들과 함께 느끼고
자식들의 필요, 욕구, 기대, 희망, 아픔과 슬픔과 갈망들을
채워주고, 돌보아주고, 치료하고자 합니다.
▲모성애적 기업 리더십
기업들 중에 소위 뜨고 있는 기업들은
가부장적인 가치를 포기하고 모성애적인 가치를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어떤 상품을 개발할 것이냐?’ 하는 문제에 있어서도
먼저 고객들의 마음에 들어가서
그들의 필요와, 욕망과, 기대와, 갈망 등을 파악하고
그에 맞는 상품을 개발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노사관계에서도 사원들의 필요와 기대와 갈망 등을 먼저 살피고
사원들을 돌보고 섬기고 사원들의 행복을 먼저 생각하는 기업들이
요즘 히트하고 있습니다.
▲모성애적 정치 리더십
오늘 정치의 문제를 푸는 해법도 여기에 있습니다.
권세자들은, 국민들의 기대와 희망과 필요와 욕구들을 먼저 파악하고
진정으로 국민들을 행복하게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고
그것을 채워주려고 하여야 합니다.
자기의 뜻을 세우는 것도 중요하고, 국가의 백년대계를 생각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국민들의 마음으로 국민들과 함께 생각하며
국민들을 위하는 정치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혹시 많은 저항을 받게 될지도 모릅니다.
▲모성애적 목회 리더십
이것은 목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목회를 단지 교인들을 가르치고, 교훈하고, 어떤 도움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가부장적인 가치관’에 가깝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이런 가부장적 의식을 가지고 목회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는 날 초등학교에 다니던 아들이 교회 앞길에서 놀다가
교통사고로 죽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목사님은 너무 부끄럽고 가슴이 아파서 목회를 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목사가 재앙을 당하고 벌(?)을 받았으니 교인들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 목사님은 좌절하고 의기소침해 있었습니다.
저는 그분을 만나서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런 불행을 당하니 정말 부끄럽고 수치스럽고 아프고 힘이 들지요?”
그 목사님은 그 말만 듣고도 눈물을 글썽였습니다.
저는 그분의 손을 잡고
“이제 교인들의 명부를 가져다가 한분, 한분 살펴보세요.
그 가운데는 목사님과 같은 사고나 불행을 당한 가정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 가정을 찾아가서 그분들의 손을 잡고
‘이전에는 잘 몰랐습니다.
그런데 아들을 불의의 사고로 잃고 보니, 너무 가슴 아프고 부끄럽고 힘이 듭니다.
성도님도 그렇게 아플 거라는 것을 이전에는 잘 알지 못했네요. 죄송합니다.
제가 기도해 드리고 싶어서 왔습니다.’
하고 간절하게 기도하며 그 아픔을 치료해 달라고 기도하세요.” 하고 말했습니다.
그는 이제 모성애적인 목회로 다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가부장적인 지도력이 필요합니다. 분명한 목표를 정하고, 계획을 세우고,
프로그램을 만들어 진행할 수 있는 지도력이 꼭 필요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사람들의 가슴 속으로 들어가 그들을 이해하고, 공감하며,
돌보고, 치료하며, 사랑하고, 섬기는 것도 필요합니다.
우리는 어느 것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도 버리지 말고 저것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2. 모성애적 리더십, 예수님
▲가부장적인 하나님
어떤 분들은 ‘가부장적인 하나님’만 보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기도할 때마다,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시고 높은 보좌 위에 앉아서
낮고 천한 우리들을 불꽃같은 눈으로 살피시는 하나님 아버지!” 하며 기도합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가부장적인 하나님이십니다.
▲동시에 모성애적인 하나님
그러나 동시에 우리의 하나님은 자비와 긍휼의 하나님이십니다.
모성애적으로 우리의 필요와 욕구를 살피시고, 상처와 아픔을 발견하시고,
채우시고, 돌보시며, 치료하시며, 인도하시며, 지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시편 23편을 한 목소리로 읽어봅시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도다...
양은 자기들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양들은 자기들의 힘으로는 먹을 것도 찾지 못하고, 마실 물도 찾지 못하고,
자기의 집을 찾아가지도 못하고, 이리와 싸울 힘도 없습니다.
양들이 생존하려고 한다면 목자가 있어야 합니다. 목자 없는 양은 죽을 목숨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나약함을 아십니다.
우리들이 얼마나 죄에 약하고 마귀의 시험에 허망하게 무너지는가를 아십니다.
‘목자’는 모성애적인 하나님의 이미지를 잘 보여줍니다.
▲긍휼의 하나님
하나님께서 우주를 창조하시기 직전에 먼저 천사들을 창조하시고
그 천사들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①하나님께서는 ‘의의 천사’를 불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세상을 창조하고, 가장 으뜸 되는 피조물로 인간을 창조하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 의의 천사는 대답했습니다.
“하나님, 인간을 창조하지 마십시오.
그 인간들은 온갖 불의로 이 세상을 먹칠해버릴 것입니다.”
②하나님께서 두 번째 천사인 ‘거룩의 천사’에게 똑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거룩의 천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하나님, 인간을 창조하셔서는 안 됩니다.
그 인간들은 이 세상을 죄와 정욕으로 더럽게 만들어
이 세상을 쓰레기통과 같이 만들고 말 것입니다.”
③하나님께서는 세 번째 천사인 ‘빛의 천사’를 불러 또다시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빛의 천사는 “하나님, 절대로 인간을 창조하셔서는 안 됩니다.
인간들은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지은 이 세상을 어두움으로 만들고야 말 것입니다.”
④네 번째 천사인 ‘긍휼의 천사’를 불러서 또 다시 질문을 했습니다.
“내가 인간을 창조하려고 하는데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긍휼의 천사는 다른 천사와는 전혀 다르게 대답했습니다.
“하나님, 인간을 창조하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면
이 세상은 불의하고 더러워지고 어두움에 잠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 이 불의와 더러움과 어두움 속에 있는 인간들에게
저는 기어이 그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유대인의 내려오는 이야기인데,
긍휼의 눈은, 다른 어떤 올바른 사람보다 한 차원 더 높게 보고 판단한다는 의미입니다.
▲사랑의 이웃을 만나면, 죽을 사람도 살아납니다.
일본 작가 가와바다 야스나리는 동양 사람으로 드물게 노벨 문학상을 받았습니다.
그는 남들이 부러워하는 상도 받고, 뛰어난 명성을 얻었습니다.
그러한 그가 뜻밖에 자살을 하였습니다. 가스관을 물고서 자살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의아해 하였습니다. 야스나리가 자살한 이유는
자신의 몸이 늙고 병든 것을 견디지 못하였습니다.
일이 제대로 되지 않는 것도 그를 한탄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고민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는 크게 약하여 졌습니다.
그는 자기의 나약함을 견디지 못하여 자살하고 만 것입니다.
자기의 나약함을 바라보며 그것을 슬퍼하는 자는 거기에 빠집니다.
자기의 불행을 바라보며 그것을 바라보는 자는 불행의 잔을 마십니다.
자기의 약점을 한없이 바라보는 자는 그 약점에 치어 죽고 맙니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라도 ‘사랑의 이웃’을 만나면 변합니다.
오늘 우리는, 자기 연약함 때문에 죽음에 이르게 된 병든 사람들을 찾아 가서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어주고 하나님의 생명을 전달하는 천사가 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것이 우리 교회를 세우신 목적입니다. <2006년 인터넷설교에서 발췌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은, 당신이 <작은 자>로서 세상에 빛으로 사는 것입니다.
당신이 크고 위대한 인물이 되는 것은 나중의 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과 빛을, 우리 존재의 중심에 갖고 살도록 초대된 사람들이다.
중심이 견고한 사람들은 공동체에서 매우 단순하고 일상적인 일을 하고 있으나
참으로 빛을 내는 선함과 힘을 가진 사람들이다.
가장 캄캄한 밤에는 아주 <작은 빛> 하나가.. 전체를 바꾸어 놓는다.
보통은 숨겨져 있고 알려지지 않은 <작은 영혼들의 이야기>가
실제로 세상에서 고통받는 사람에게 도움을 준다.
그들은 그들의 <작음 속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부르심을 보여준다.
(실제로 나를 도와주는 사람은, 유명하고 위대한 성자가 아니라,
내 주위에 있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작은 빛'입니다.)
그들은 아이들의 가치를 알아보는 교사이거나
환자에게서 하나님의 얼굴을 알아보는 간호사일 수 있다.
그들은 매일 매일 세상을 먹이고 돌아가게 하는 농민들이나 노동자일 수도 있다.
또 그들은 나이 많은 사람들일 수도 있다.
더 이상 소용이 없게 밀려 난 상황 속에서
인생의 황혼기의 풍요로움을 잃어버리기 쉽고, 자기연민에 빠질 수 있지만,
따뜻한 미소, 방문, 꽃이나 선한 행위를 다른 이들과 나누며 살아가는 노인들이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근심과 고통, 두려움, 외로움, 피로 한 가운데서
-다시 말하자면 그들 삶의 십자가로부터-
기도와 간구로 우주의 하나님께 사랑을 드린다.
숨겨진 사람들, 작고 평범한 사람들,
그렇지만 그들 삶의 단순한 선함은
어두운 밤에 작은 빛처럼 빛나고 있다.
그리고 잘 보이지는 않지만.. 주변을 변화시킨다.
하나님 형상은 바로 이런 사람들 속에 보존되어 있으며, 아이들에게 전달이 된다.
작고 충실한 사람들은, 세상의 시선을 끌 가치가 없는 것처럼 보이나,
실제로는 인간의 무한한 인격적 가치를 간직하고, 빛을 내는 사람들이다.
성경, 교회사, 그리고 우리 자신의 관찰에 의하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지대한 공헌은
과부들이나, 독신으로 사는 <작은 사람>에 의해 이루어져 왔다.
이러한 여성들이 발하는 아름다움과 선함을 보기 위하여
먼 곳을 바라볼 필요가 없다. 우리 주변에 늘려있다.
보통 사람들은.. 그들의 아름다움을 쉽게 알아볼 수 없으며,
아마도 그들 자신도.. 자기의 아름다움을 알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보석과 귀중한 돌들은 표면에서 찾을 수 없다.
그것들의 가치는, 더 숨겨지고, 더 작게 존재할 때에.. 더 빛나는 법이다.
나 자신도 그처럼 작은 영혼이 되고 싶지만
불행하게도 아직 나는 너무나 크고 볼품이 없다. (저자의 겸손)
그리고 돌아다니며 사람들과 부딪히고 그들을 두드린다.
예수는 우리에게 작고 겸손해지기를 원하신다...
'어린아이들처럼 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당신은 이 모든 것들을 학식있고 영리한 사람들로부터 감추시고
작은 이들에게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세상은 우리가 커져야 한다고 끊임없이 말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생각에 빠져버리고, 불안하게 된다.
평화를 잃어버리고 소유물, 프로그램, 우리의 이름을 세우기 위한
갈등과 경쟁에 나서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작은 영혼'들만이 참으로 평화를 이룩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들의 작음과 무력함 속에서 권력과 힘 때문에
고통 받고 흔들리는 세상을 위한 기둥이 되어야 한다.
나 자신도 힘이 없는 작은 영혼이 되고 싶다.
캄캄한 어둠 속의 작은 불빛이 되기 위하여.
우리 모두는 그렇게 되기 위해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은 열명의 착한 영혼들만 발견해도 그 도시 전체를 구하시는 분이시다.
그 착한 열명이 있다면, 아마 작고 숨겨진 사람들일 것이다.
(이런 사람일수록, 외식이 적고, 순수하고 아름답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가 나아가야할 목표가, 내 주변을 비추는 '작은 빛'이 되어야 한다.
온 세상을 비추는 '큰 빛'은 차제의 일이다. <86.05.18 앤드루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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