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한 분만 늘 생각했던 다윗 삼상26:11 큐티 자료
*요셉이 총리가 된 후에, 과거에 형들의 비행을 기꺼이 용서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히브리 민족을 구원하시려고, 자기를 애굽에 먼저 보내셨다는 창45:7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늘 하나님만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사울왕을 피해 어렵게, 어렵게 다니는데,
하루는 사울이 깊이 잠든 곳까지 접근해 갔습니다.
아비새가 나서서, 사울을 단번에 창으로 찌르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늘 하나님만 생각>했습니다.
내가 직접 손을 들어 여호와께서 기름 부은 사람을 해칠 수는 없소.
자, 사울의 머리 가까이에 있는 창과 물병을 집어 여기서 나갑시다. 삼상26:11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을, 감히 자기 손으로 무너뜨리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평소에 <늘 하나님만 생각>하지 않았더라면,
혹시 전 중앙정보부장 김재규 씨처럼 될 뻔 했습니다. (유족들께는 죄송합니다)
*그러다가 사울 왕이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전사했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그러자 다윗은 즉시 큰 슬픔에 휩싸여 자기 옷을 찢었습니다. 삼하1:11
‘아니, 옷도 귀한 시절에, 그 아까운 옷을 왜 찢나?
더욱이 죽은 사람은, 원수 사울이 아닌가! 도리어 기뻐해야할 일 아닌가!’
우리는 다윗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열쇠는 이것입니다. 그는 <늘 하나님 한 분>만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자가 죽었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지금 하나님 편에서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택하신 자가, 자기 사명을 잘 감당하지 못하고 죽을 때,
그 때 하나님의 슬픔을 표시하고 있습니다. 진실로 그는 그리스도의 예표였습니다.
다윗이, 사울의 왕관을 벗겨 온 아말렉 사람을 죽일 때 했던 말입니다.
다윗은 하나님 편에서, 그 사람을 심판하고 있습니다.
너를 죽이는 사람에게는 책임이 없다. 왜냐하면 네 스스로가
‘내가 여호와께서 기름 부으신 사람을 죽였습니다’라고 말을 했기 때문이다. 삼하1:16
다윗 편에서 보면.. 어쩌면 ‘경사났네!' 할 것을
하나님 편에서 보았으므로.. 슬퍼하고, 옷을 찢고, ‘활노래’(애도詩)까지 지었습니다.
*하나님 편에서 생각하는 사람은, 사람을 의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사람을 의식한 사람이었습니다. 삼상13:8
저도 이런 칼럼을 편집해서 인터넷에 올릴 때, 자꾸 사람이 의식됩니다.
몇 명 보는지 궁금해 지기도 합니다. 그런 미숙한 마음, 오늘 아침에 내려놓기 원합니다.
섬김은 <오직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입니다. <편집자
▲“지구는 사람으로 가득 찬 무인도!”
‘고독’은 인간의 한계상황(절대 극복 못 한다)입니다.
만약 당신이 지금 '고독'을 느끼지 못한다면,
환경이 좋아서가 아니라,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딴 데 정신 팔려 있는 것입니다.
원래 고독한 우리는
늘 <하나님 한 분만 생각>하면서 그것을 이기며 사는 것을
수 년 동안 훈련해서 자기 몸에 습관처럼 배이도록 해야 합니다.
(안 그러면 늙어서 억울해서 못 삽니다.)
“세상에는 그대 이름 지워져도,
하늘에는 그대 이름 남아있으리...”
▲김용기 장로님의 고독
홍정길 목사님이 신학생 시절에, 신학교 친구들과 함께
한 번은 김용기 장로님 말씀을 듣고자
가나안 농군학교를 일부러 찾아가서 뵌 적이 있었습니다.
“장로님, 어려우셨을 때가 언제였습니까?”
“큰 아들은 군대 가 버리고,
둘째 아들은 이렇게 두더지처럼 땅만 파면서 사는 일을
평생 할 수 없다며 도망가 버리고
그처럼 말이 없던 아내마저도 하루는 이렇게 따지고 나왔습니다.
‘당신은 왜 이렇게만 하고 사는가?
땅을 개간하면 또 다른 사람에게 줘 버리고,
또 가장 조악한 땅을 골라서 농토로 만들고
우리가 무슨 두더지인가?
아들도 도망가 버리지 않았는가?’
그래서 너무 아프고 기가 막혀 하나님께 한 참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를 농사꾼으로 불러 주셨습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가족들도 저는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저를 여기로 부르셨기에, 제가 여기를 떠날 수는 없습니다.
제가 괭이질 하는 그 자리에서 제 목숨을 거두어 가 주시옵소서!’”
주께서 나를 향하신 부르심이 무엇입니까?
그 부르심의 길을 가는 것은... 고독한 길입니다.
그러나 자기를 부르신 그 길로 계속 가는 것은... 참으로 성공적인 인생입니다.
‘사람들이 부르는 길’로 달려가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남들이 알아주는 길’로 갈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는 ‘단 한 분의 청중’이신 그리스도만 생각하며,
사람들이 많든지/적든지
오직 그 길로만 달려가는 고독한 외길 인생입니다. <이 단락 설교 녹취
오늘 아침에 찾아서 다시 읽어보았습니다만, ↖
성령의 영감이 서린 매우 훌륭한 스크랩 글입니다.
그동안 까먹고 있었는데, 다시 한 번 이 기도제목으로 매일 기도하려고 합니다.
◑단 한 분의 청중 (번역 글) 요21:22 -출처보기-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찌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요21:22
몇 주간 동안 나는 뭔가에 무겁게 짓눌려 살고 있었다.
아무리 성경을 읽고 기도해도, 나는 그 눌림에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밤, 내가 Os Guinness의 책을 읽던 중,
내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게 되었는데...
그의 책은 요한복음 21장을 설명하고 있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러면 내 양을 먹이라’며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명을 주셨고,
특별히 ‘그(요한)가 너와 무슨 상관이냐?’며
<남의 사명에 신경 쓰지 말고, 오직 자기 사명에만 충실할 것을>
책망조로 베드로에게 당부하셨다.
사실 내가 지난 몇 주간 눌려있었던 문제는, 바로 그 문제(비교, 질투)였다.
나이가 들다 보니, 내 친구들 중에, 어떤 이는 사업으로 크게 성공한 자도 있었고,
그 친구와 내가 비교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결과는 침울depression이었고, 그것은 지난 몇 주간이나 계속되었다.
성경읽기, 기도하기도 귀찮을 정도로, 내 마음이 어지러웠다.
그날 밤, 나는 예수님께 용서를 구했다.
그리고 내가 다시는 주변사람을 의식하지 않고,
<단 한 분의 청중Jesus만을> 의식하며 살기로... 나를 재헌신했다.
다음날 아침, 나는 컴퓨터를 켜서, 이메일로 배달되는 큐티자료를 읽어보았다.
나는 깜짝 놀랐다. 우연의 일치일까?
어제 밤 내가 재헌신했던 요21:22절 똑같은 말씀이
‘그 날의 큐티’로 내게 보내진 것이다.
‘하나님, 알겠습니다. 어젯밤의 결단, 제가 꼭 기억하겠습니다!’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었다.
그날 나는 친구와 점심을 함께 먹고, 운전 중에 차에서 라디오를 틀었는데,
마침 내가 어젯밤에 읽었던 책의 저자인 Os Guinness와 인터뷰를 방송하고 있었다.
우연의 일치일까?
더욱이 그 대담에서 할 말이 여러 가지로 많았을 터인데,
특별히 인터뷰 내용이, 어젯밤에 내가 그의 책에서 읽은 그 내용,
즉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그와 네가 무슨 상관이야?’ 말씀하신 것을 다루고 있었다.
"Okay, God, I get the message!" (하나님, 다 알아들었다니까요!)
이 문제가 얼마나 심각하면
(사실이다. 나는 몇 주간 동안이나 헤매고 있었다.)
하나님은 연거푸 세 번이나 연속적으로 내게 말씀하신 것일까?
물론 우연의 일치일수도 있겠지만,
그런 우연의 일치가 매일 일어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나는 그날 이후로 다시금 내 마음에 굳게 결심하며
매일 기도하게 되었다.
‘그가 네게 무슨 상관이냐?’
‘나는 오직 <단 한 분의 청중>을 위해 살기로!’ (번역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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