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의지하고 성벽을 뛰어 넘으라 삼하22:29~35 설교 스크랩
▲두 분을 기억하기 원합니다.
지난 2008. 10. 31. 금. 오전 10시 30분에 벽제화장터에서
배형규 목사님과 심성민 형제의 시신을 화장했습니다.
1년 반 전에 두 분의 장례가 끝나고, 서울대병원에 두 분 시신이 기증되었습니다.
그동안 병원에서 이 시신을 잘 활용하였고, 이제 시신을 돌려받았던 것입니다.
가족들끼리 조용히 화장을 하겠다는 뜻을 밝혀 와서
교회에 광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들과 청년들이 참석해 주셔서
조촐하게 예배를 잘 드렸습니다.
오늘 제가 이 두 분의 화장 얘기를 꺼낸 것은,
1년 반 전의 고통을 다시 기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두 분이 경험했던 경험을 다시 기억하기 위해서입니다.
두 사람이 만났던 그 기가 막힌 상황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어떻게 잘 극복했는지를 다시 기억하기를 원합니다.
배형규 목사님은 함께 인질로 붙잡힌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씀을 남기고
당당하게 복음을 위해 순교하셨다고 합니다.
‘나는 죽겠지만 여러분은 무사할 것이다.
전 세계의 교회가 우리를 위해서 기도할 것이다.
금식하지 말고 먹을 것 있으면 잘 챙겨 먹고,
잘 수 있을 때는 자고 몸을 잘 보호하라.
나는 여기에서 죽을 때 복음을 선포하고 당당히 죽겠다.’
심성민 형제님은, 처음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는데,
심성민 형제가 가지고 있던 MP3를 다행이 탈레반이 뺐지 않아,
그 MP3로 찬송을 들으며 마음을 추슬렀다고 합니다.
찬송을 통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해갔던 것 같습니다.
여러분, 이 두 사람이 하나님의 선한일 때문에 그 땅에 갔다가,
기가 막힌 죽음의 공포를 만나고 마침내 죽음으로 이끌려 갔습니다.
그러나 그 두려움 앞에서, 그 죽음 앞에서,
혹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있을 수도 있는 상황 앞에서
자신들 앞에 버티고 서 있는 높은 성벽 같은 장애물,
<그 죽음의 벽/순교의 벽을 잘 뛰어넘은> 두 사람의 모습을
다시 한 번 기억하고자 합니다.
▲성벽을 뛰어넘은 다윗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 속에서 실패하는 자가 되는 것을.. 하나님은 원치 않으십니다.
좌절하는 자가 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불행한 자가 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격려하기 원하십니다.
사무엘하 22장은 다윗의 승전가입니다.
그 중에서 30절이 제일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여호와를 의지함으로,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내가 적의 성벽을 뛰어 넘습니다.’
성벽은 뛰어 넘을 수 있는 데가 아닙니다.
성벽은 적이 뛰어 넘지 말라고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성벽을 뛰어넘는 것은, 우리 앞에 있는 장애물을 뛰어넘는다는 말입니다.
우리 앞에 있는 문제를 돌파해 낸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 힘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압니다.
‘뛰어 넘기는 뭘 넘어? 내 앞에 태산이 있어서.. 오늘 내가 예배에 나오긴 했지만,
안 나올 수는 없고, 뭐 또 성벽을 넘는다느니/어쩌느니 하지만
현실에서 그건 너무 힘들어...’
아직도 이런 좌절감이 자기 마음에 있으신 분은.. 마음을 추스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기대하는 자에게 반드시 은혜를 베푸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문제가 너무 크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아니, 크다고 말해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문제 보다 더 크신 분이라고만 말하시면 됩니다.
여러분, 지금 다윗처럼 한 번 고백해 보십시오!
‘지금 내 앞에 있는 성벽이 아무리 높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그 성벽을 뛰어넘게 하신다고 말씀하셨으니... 내가 그 벽을 넘을 것이다.’
이런 기대를 마음에 품고 오늘 말씀을 한번 생각해 보시기를 원합니다.
먼저 다윗이 만난 벽이 어떤 벽이었는가를, 다시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윗은 참 기가 막힌 벽을 많이 만났던 사람입니다.
▲1. 분노의 성벽
다윗이 나발 때문에 분노를 견디지 못해 일을 저지를 뻔했습니다.
다윗이 이 <분노의 성벽> 앞에서 무너질 뻔했습니다.
다윗이 사울에 대한 분노는 아주 잘 이기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 나발, 촌뜨기, 시골 유지가 다윗을 무시하는 상황이 벌어지니까
다윗은 시쳇말로 뚜껑이 열린 것입니다.
다윗의 마음도 이해가 됩니다. 잘난 자가 자기를 무시하면 받아들이기가 좀 쉬운데,
하찮게 보이는 사람이 무시하면... 참기 어렵지 않습니까?
다윗은 그동안 잘 견디다가, 하찮은 나발이 무시하니까... 완전히 무너져 버립니다.
다윗이 자기 부하를 거느리고
나발 집의 남자를 다 죽여 버리겠다며 달려가지 않았습니까?
만약 다윗이 그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나발 집에 쳐들어갔다면,
다윗의 생애가 얼마나 곤두박질 쳤을 것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마 그 소문이 온 이스라엘에 삽시간에 퍼져나갔을 것입니다.
차기 왕으로 지목된 사람이, 자기를 모욕하고 자기에게 실례를 범했다고 해서,
상대 집안의 모든 남자를 죽이고 멸문시킨다는 것은
다윗에게 아주 치명적인 사건이 되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다윗을 포기할 수도 있는 사건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 분노의 성벽을 도저히 뛰어넘지 못하고, 혈기로 달려오던 다윗이,
어떻게 그 벽을 넘어서게 됩니까?
아비가일이라고 하는 현명한 여성을 통해서,
그 여성의 입에서 나오는 현명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 여성이 보여주는 아주 지혜로운 태도를 통해서,
다윗은 그 벽을 넘어서는 결정적인 도움을 받게 됩니다.
아비가일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참 기가 막힌 사람입니다.
남편인 나발과 마찬가지로, 촌구석이긴 하지만 굉장한 부잣집의 마나님입니다.
그런데 다윗 앞에서 땅바닥에 엎드려 무릎을 꿇었다는 것은 참 놀라운 사건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여러분, 이런 아비가일과 같은 사람이 여러분 곁에 있습니까?
내가 분노해서 씩씩거릴 때, 그 분노를 부추기거나 좌절케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나의 분노를 잠재울 수 있는 동역자가 여러분 곁에 있습니까?
여러분의 배우자가 그런 사람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남편/아내라는 사람이, 배우자의 분노를 잠재워주기는커녕
없던 분노까지 불러일으키는...’ 자칫 잘못하면 그렇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서로 돕는 배필이 되라, 서로 섬겨라.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라!’
라고 말씀하시는데, 오히려 서로 분노를 자극하고, 상처를 자극해서
우리의 가정이 힘들게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여러분, 배우자가 서로 아비가일이 되기를 바랍니다.
목장에서도 아비가일과 같은 동역자를 얻으시기 바랍니다.
▲2. 유혹의 성벽
다윗이 만났던 또 다른 중요한 성벽은 <유혹의 성벽>이었습니다.
분노보다 어쩌면 더 큰 성벽이었습니다. 밧세바를 만났을 때, 다윗은 넘어졌습니다.
더 나쁜 것은 밧세바의 남편까지 죽이게 됩니다.
상황이 점점 악화되고, 그 상황에서 다윗은 살아날 길이 없었습니다.
다윗은 죽어야 마땅했습니다. 그러고도 어떻게 살기를 바랍니까?
남의 아내를 뺏고, 그 남편을 비열한 방법으로 죽인 다윗은,, 죽어야할 자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 성벽도 넘어섰습니다. 어떻게 넘어섰습니까?
회개하고 하나님의 자비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자에게 약합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엎드리면
하나님은 자비를 베풀 수밖에 없는 분이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죽을 수밖에 없는 그런 <죄의 벽> 앞에 자주 서게 될 것입니다.
우리를 좌절하게 만들고, 우리를 절망하게 만들고,
내 삶이 송두리째 황폐해질 수밖에 없는 그런 벽 앞에 내가 섰을 때에도,
하나님 앞에 우리의 죄를 인정하고 고백하면, 하나님은 자비를 베풀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성벽을 넘어서게 하실 것 입니다.
▲3. 자식의 거대한 성벽
다윗에게 또 하나의 큰 벽은 <자식의 벽>이었습니다.
다윗이 겪었던 자식의 벽은 엉망진창이었습니다.
우리 가운데 다윗처럼 심한 문제아 자식을 가진 부모는 없을 것입니다.
부모를 죽이겠다고 덤벼드는 자식 압살롬이 있었습니다.
다윗은 완전히 실패한 사람입니다. 왕이 되면 뭐합니까?
장남이 이복 여동생을 강간했습니다. 집안이 엉망진창입니다.
다윗이 경험했던 환난 중에서, 자식 때문에 겪는 고통이
가장 힘든 고통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평생 이 고통이 이어져 갔습니다.
게다가 온 나라가 쑥대밭이 되었습니다.
큰 아들 암논은 좀 시원찮고 배포가 작은 아들이라
사고를 쳐도 작은 사고 하나 치고 말았지만,
압살롬은 잘난 놈이라 똑똑하고 리더십도 있어서
온 나라를 한번 들었다 놓는 바람에 수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아버지 다윗은 자식의 벽 앞에서, 죽는 길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왕위도 내려놓고 죽어야했습니다.
백성들 앞에서 미안해서, 사람들 앞에서 부끄러워서,
그런 애비가 어디 나가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시편에는 다윗이 이 일 때문에 겪었던 고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도망가서 광야에 있으면서, 물소리와 짐승 소리를 들으면서
그가 겪었던 고통과 아픔을 하나님 앞에 토로해 놓은 얘기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 앞에 자기 문제를 가지고 나아갔을 때
하나님은 다윗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야 이놈아, 너 모르겠다’ 하며 그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놀랍게도 그를 다시 왕위에까지 앉혔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성벽을 뛰어넘게 하신 것입니다.
▲4. 환경의 성벽
지금부터 3천년 전, 부족국가가 세워 지고,
그 부족국가가 국가의 형태로 발전되는 과정에서
나라와 나라사이에 끊임없이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다윗은, 지도자로 살아야 했으며, 장군으로서 살아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길을 그렇게 인도하셨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한국 사람으로 태어나게 했습니다.
그것도 고려시대도 아니고, 이조시대도 아니고, 이 시대에 태어나게 했습니다.
바로 그 부모의 자식으로 태어나게 했습니다.
내 의지하고는 아무 상관없이.. 부모로부터 상처를 받기도 하고,
도움을 받기도 하면서, 그리고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우리는 그 환경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다윗이 자신의 환경을 벗어나기 위해서
‘아이쿠, 이런 지긋지긋한 삶은 싫다. 사람들 꼴도 보기 싫고, 전쟁터도 싫고,
난 어디 조용한 호숫가에 집이나 한 채 짓고 살겠다.’
이런 다윗의 모습을 하나님은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이 땅에는 쉴만한 호숫가 집, 숲 속의 집은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런 것 찾지 마십시오.
우리가 꿈꾸는 그 조용한 호숫가 집,
모든 세상의 번잡함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곳, 그 곳은 죽음 건너편에 있습니다.
여기서 그런 것 찾는다고 괜한 힘 빼지 마십시오.
다윗이 자기가 처한 환경에서, 끊임없이 전쟁하고, 왕 노릇도 하고,
실패도 하고, 다시 일어서기도 하는 것처럼.., 그런 현실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자식도 피할 수 없고, 부부간의 삶도 피할 수 없고,
그리스도인의 삶도 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런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살기는 살되, 지지 말고 성벽을 뛰어넘어야 합니다.
◑다윗이 성벽을 뛰어넘을 수 있었던 비결
다윗은 이런 삶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성경은 몇 가지 비결이라고 할 수 있는 다윗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1. 다윗이 자기 눈에 띄는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을 매개로
<하나님과 아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특별히 본문 삼하22:1~7절에 많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나의 반석이시다, 바위시다, 요새시다, 방패시다, 산성이시다, 파도시다, 덫이다.’
이것들은 다윗이 사는 곳에서 눈에 보이는 흔한 것들입니다.
여러분, 우리 주변에 있는 것들을 볼 때, 하나님이 얼마나 연상이 되십니까?
우리가 바위를 보고, 하늘을 볼때, 뭐가 연상이 됩니까?
요즘처럼 근사한 하늘이 우리 머리 위에 있는데, 하늘을 보시기는 하십니까?
그냥 한번 힐끗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1분 이상 하늘을 유심히 쳐다본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표정을 보니 ‘그런 거 보고 언제 살아?’ 이런 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저도 사실은 못 봤습니다. 제 얘기를 하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런 아름다운 하늘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연상하게 된다면,
우리는 벽을 뛰어넘을 수 있는 믿음의 사람,
하나님과 친밀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나는 예배에 꼬박 꼬박 온다.’ ‘나는 큐티도 열심히 하고 기도도 매일 한다.’
여러분, 그것 가지고는 부족합니다. 그것 다 해봐야 시간이 얼마나 걸립니까?
그것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세상을 바라보고, 자연을 바라보고, 사람을 바라보고,
텔레비전을 보고, 뉴스를 보고, 이런 것 다 보고 살지 않습니까?
예배드리는 시간 잠깐, 성경 읽는 시간 잠깐, 그런 짧은 시간에 주님을 기억했다가
나머지 시간에 주님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살아서는
우리 앞의 성벽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다윗처럼 우리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통해서.. 하나님을 느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보시기를 바랍니다. 불평꺼리를 찾지 마시기 바랍니다.
좀 못된 사람을 보면, ‘저런 게 다 있어? 누가 저거 안 잡아가나?’ 그러지 마시고,
‘저 사람에게야말로 하나님이 필요한데...!’ 라고 생각하십시오.
우리가 바위를 바라볼 때,
‘저 듬직한 바위, 아무리 바람이 불어도 끄떡하지 않는 바위,
하나님이 나를 바위처럼 내 삶에서 듬직하게 서있도록 하시구나.’ 하며,
바위를 볼 때 하나님이 생각나고, 아름다 운 하늘을 볼 때 하나님이 생각나고,
내 뺨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결에도 하나님 이 느껴지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우리가 전방위로 24시간 하나님을 느끼는 삶을 산다면
우리가 좀 더 하나님을 잘 의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성벽을 뛰어넘는 일을 좀 더 효과적으로 감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2. 과거의 상처를 뛰어넘은 사람
오늘 본문에서, 다윗이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말하기는 하지만,
다윗이 자연환경이나 눈에 보이는 것을 통해서뿐만 아니라,
얼마나 굳건한 믿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했는가 보여주는 단서가 또 하나 있습니다.
21~28절을 보면, 얼핏 읽으면 다윗이 좀 웃긴다는 느낌이 들 수 있는 내용입니다.
‘진실로 나는 주께서 가라고 하는 길 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다윗이 살인과 간음, 자식교육 실패에다가, 분노해서 남을 죽일 뻔한 일도 있었고,
하나님 앞에서 잘못했다고 그렇게 울었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데,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있는데)
‘주께서 가라고 하는 길에서 자기가 벗어나지 않았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잘 이해해야 할 것은,
다윗이 자기가 죄를 짓지 않았다고 말한(죄를 부인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다윗은 자기 인생의 1막을 얘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2막을 얘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실패했던 이야기들, 좌절했던 이야기들,
고통 받았던 이야기들은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고통이 있을 때에도, 다윗은 하나님이 가라고 한 길을 걸어갔으며,
그 길을 걸어갔더니 적의 성벽도 넘을 수가 있었고,
인생의 모든 문제를 넘을 수 있었다는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자기 인생의 결론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전에 어떤 죄를 지었든지 간에
오늘 우리도 다윗처럼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계시지요?
우리가 남을 미워함으로써 사람을 죽이는 것 못지않은 고통을 주기도 하고,
마음과 몸으로 간음하기도 하고, 도적질하기도 하고,
자식 잘못 키워서 고통 받기도 하고,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수많은 문제가 우리에게 다 있지 않습니까?
이런 많은 문제를/과거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의 길을 계속 걸어가는 것이야말로.. 용기요, 믿음입니다.
다윗이 그 벽을 뛰어넘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모든 사람은 자기에게 힘든 과거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해서 사명의 길을 걸어가면서
이런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갔더니,
하나님은 그것을 모두 깊은 바다 속에 묻어 놓으시고
거기에 팻말을 하나 써 붙여 놓으셨습니다.
‘낚시 절대 금지!’
‘너희의 죄가 주홍같이 붉을지라도 내가 양털같이 희게 씻었다.
동에서 서가 먼 것처럼, 너희의 죄가 이제는 없어진 것이다. 나는 기억도 하지 않겠다.’
다윗이 바로 이런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의 인생 2막 이야기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내가 잘못한 모든 것을 묻어버렸고 기억도 안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이 은혜 베푸시는 길로 걸어갔더니 하나님이 놀라운 축복을 주셨다.
나는 하나님이 가라고 하는 길을 벗어난 적이 없다..’
<08.11.02. 인터넷설교 스크랩 [주제별 분류] 크리스천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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