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 로이드 존스,「부흥」 행10:44 도서 요약
부흥이란... 영광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이고,
그분께 돌아가는 것이며, 그분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저는 최근, 우리나라에 부흥이 다가오고 있다는 ‘손바닥만한 구름조각’을 봅니다. 작년까지만 해도, <신년예배> 이런 시기는 특별히 ‘하나님 자신’ 보다는 ‘하나님이 주시는 사은품’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금년부터는 분위기가 달라지고 있습니다. ‘사은품’보다는 ‘하나님 자신’을 갈망하고 있음을 느낍니다. 그래서 '손바닥만한 작은 구름'들이 일어나고 있다며 조심스레 기대를 갖습니다.. <편집자 [아굴라와 브리스가]에서 좋은 책을 요약해 주셔서, 스크랩해서 올립니다. ◑부흥의 시기에 나타나는 특징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행10:44
모든 부흥의 시기에 가장 크게 나타나던 특징은 <크고도 깊은 진지함>이었습니다. 경건한 로버트 맥체인이 던디의 강단에 올라 채 입을 열기도 전에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며 무너졌던 이야기를 다시 읽어 보십시오. 왜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자, 그에게는 장중함이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있다가 왔습니다. 그는 가벼운 태도로 강단에 오르지 않았으며, 사람들을 편하게 해 주고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한두 마디 농담을 던지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그에게는 하나님의 광채가 있었습니다. 무서울 정도의 진지함이 있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믿고, 그 하나님이 죄에 진노하신다는 말씀을 믿으면서,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은 지옥에 간다는 사실을 믿으면서 어떻게 실없는 말을 할 수 있으며, 경박하게 익살을 떨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것들을 크고 깊고 심원한 진지함으로 대하는 태도보다 더 큰 부흥의 특징은 없습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 「부흥」p.125. -출처 보기- ◑부흥의 때마다 부각되는 중대한 메시지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것은 절대적인 본질에 해당하는 교리임이 분명합니다. 부흥이 일어나면 어김없이 이 교리가 다시금 크게 강조되곤 했습니다. 이 교리의 의미는, 우리 자신과 우리의 선함, 도덕, 온갖 업적이 더 이상 고려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부흥의 역사를 읽어 보십시오. 모든 사람이 절망에 빠진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선함이 전부 더러운 누더기에 불과하며 자신들의 의 또한 전부 무가치하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렇습니다.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느끼고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외쳐 구합니다. 의롭다 하심은 오직 믿음으로만 얻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만 해 주실 수 있는 일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의롭다 하시지 않으면 우리는 망할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완전히 무력한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서 기다립니다. 자신이 과거에 신앙생활 했던 것이나 교회에 성실히 출석했던 것, 그 밖에도 자신들이 했던 많고 많은 일들에 신경도 쓰지 않고 의미도 두지 않습니다. 그 모든 일이 아무 소용도 없다는 것, 그간의 신앙생활조차 무가치하다는 것, 그 어떤 것도 무가치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이 경건치 않은 자를 의롭다고 해 주셔야 합니다. 이것이 부흥의 때마다 부각되는 중대한 메시지입니다. <위 책 p.106. -출처- ◑부흥의 한복판에 선 사람들의 인식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행2:37 부흥의 한복판에 있었던 사람들이 제일 처음 인식했던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한 가지는 자신이 말할 수 없는 죄로 가득 찬 존재라는 것이다. 부흥이 임할 때 사람들은 자신의 죄를 깨닫고 신음하며 고뇌합니다. 자신의 무기력함과 악함이 얼마나 절실히 느껴지는지 도저히 살 수 없는 것 같은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자기 자신을 대체 어찌하면 좋을지 알 수가 없습니다. 잠도 오지 않습니다. 격렬한 영혼의 고통으로 몸부림칩니다.... **그때 그들이 맞닥뜨리는 것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그 진노가 가장 격렬한 고통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들은 스스로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마땅한 존재라는 사실과 하나님이 하나님 되시려면, 그의 신적인 성품과 존재를 다해 가장 강렬하게 죄를 미워하셔야 한다는 사실을 알며, 그가 실재로 죄를 미워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 내용이 구약과 신약에 다 나오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구약의 대척점에 세우고 있는 예수님도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 가르치셨습니다... <위 책 p.79. -출처-
◑죽은 정통신앙은 옹호에만 몰두한다 이런 (죽은 정통신앙적) 태도가 겉으로 드러나는 또 다른 방식은 교리 옹호에 주된 관심을 기울이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옳은 것을 알기에, 자신들이 옳은 것이 확실하기에 그 입장을 옹호하는 것만 유일한 임무로 여기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상태에 빠진 개인이나 교회가 순전히 옹호/변증하는 일에만 대부분의 시간을 쓰는 모습을 볼 것입니다. 이른바 변증이 큰 우위를 차지합니다. 변증이 주된 관심사가 됩니다. 그들이 읽고 출판하는 책은 거의 어김없이 변증에 관한 것들입니다. 아시다시피 그들은 자신들의 입장을 옹호합니다. 자, 저는 이것이 아주 심각하고도 중요한 문제라고 믿습니다. 누군가 저에게 지난 80년간 복음주의의 상태에 대해 말해 달라고 한다면, 바로 이것을 가장 큰 특징으로 제시하겠습니다. 이를테면 복음주의는 안으로 움츠러진 채 일종의 철의 장막 내지는 방어기제 뒤에 숨어서 옹호하고 변증하는 일에 대부분의 에너지를 써 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입장을 옹호합니다. 그리고 크게 흥분하면서 그 일에 지대한 관심과 에너지를 쏟아 붓습니다. 이것은 방어적이고 소극적인 태도이자 자신의 입장을 고수하는 데에만 만족하는 죽은 정통신앙의 일부분입니다. ◑침체하는 교회에 나타나는 특징들 ▶교회사를 읽으면서 교회가 빈사상태에 빠져 그 존재 의미를 완전히 잃은 듯한 침체시기들을 살펴보면, 교회의 전체적인 입장에 빠져서는 안 될 긴요한 <진리들>이 부인되거나, 가려지거나, 무시당했다는 특징이 그 당시 교회의 삶에 가장 크게 나타났다는 사실입니다. 매 시대마다 거기에 거의 예외가 없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본질적인 <복음의 핵심 진리들>을 부인하거나 무시했는데도 부흥이 일어난 사례는 교회사에 한 번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정통)교회의 이름을 내걸었다 해도 기독교 신앙의 기본적이고 기초적인 항목들을 부인하는 곳에서 부흥이 일어난 경우는 단 한 차례도 없습니다... ▶그런 (부흥 못 한) 교회들이 부흥의 한복판에 있었던 사람들을 항상 반대하고 박해했다는 사실을 교회사에서 아주 명확하게 보게 됩니다. ▶기독교 신앙의 <기본 진리>를 재발견할 때 결국 부흥이 일어난다는 데 전혀 예외가 없다는 것입니다. 부흥에 앞서, 항상 진리의 재발견이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부흥이 갑자기 임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역사를 주의 깊게 살펴볼 때마다 발견하게 되는 사실은 부흥이 실상 그 이전부터 조용히 진행되어 왔다는 것, 눈에 띄지 않는 사람들에 의해 미리 예비 되었다는 것입니다. <위 책 p.66. -출처- ◑일그러진 정통신앙 정통적이기는 하지만 생명력은 전혀 없는 개인과 교회가 많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복음적인 모든 교회에 하나님의 성령이 강림하시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문제가 무엇입니까? 어딘가 잘못된 데가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일그러진 정통 신앙을 구성하는 몇 가지 요소를 제시하고자 합니다. ▶<하나님 자신>보다 <하나님에 대한 사실(교리)들>에 너무 과도한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정통 신앙을 가졌으면서도 죽어있을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교리와 정의定意 그 자체에 매여 하나님을 ‘알고’, 그 분과 교제하는 자리에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치명적인 잘못입니다. 그러나 복음적인 사람들, 정통적인 사람들이 흔하디흔하게 걸려드는 덫이기도 합니다. 교리 그 자체의 측면에서 정통성을 지키려 하지만 진리의 일부 측면들을 과도하게 강조하다가 거기에만 온 관심을 빼앗겨, 본질을 놓쳐버리기 십상입니다. 우리가 항상 조심해야 할 문제가 이것입니다. 이것은 교리에 올바른 관심을 가진 자들에게 마귀가 늘 들이미는 미묘한 시험입니다. 예를 들면, 저는 예언의 (교리적) 문제에 과도한 관심을 가지다가 메마르고 무익해진 이들이 많다고 서슴없이 말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예를 들면, 세례, 그것도 특별한 형식의 세례를 가장 높은 위치에 올려놓은 듯한 사람들도 있지 않습니까?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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