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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천은 남을 무시하지 못합니다. 1686

LNCK 2009. 1. 9. 23:44

 

◈크리스천은 남을 무시하지 못합니다.        

눅5:13            펀 글, 편집

 

 

예수님이 내 마음속에 진짜 살아 계시면

나는 남을 절대 무시하지 못 합니다.

예수님이 결코 그를 무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1. 세상에는 세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언젠가 한 인사가 소년원을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당연히 전체 아이들이 모두 강당에 모였습니다.

오신 김에 마이크를 잡고 아이들에게 한 말씀을 하셨는데,

그분의 말씀을 귀담아 듣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여러분들, 이 세상에는 세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첫째, 이 세상에 없어서는 안 될 꼭 필요한 사람,

둘째, 있으나 마나 한 사람,

셋째, 이 세상에서 사라져야 할 사람. 여러분들께 당부 드립니다.

여러분들, 이 사회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십시오.”

 

 

정말 황당했습니다. 어떻게 그런 심한 말씀을 드러내놓고 하실 수 있는지요.

돈 보스코 성인과는 마인드가 어찌 그리도 다른지요.

성인의 마음은 이랬습니다.

 

 

“여러분들, 이 세상에는 세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첫째, 꼭 필요한 사람,

둘째, 반드시 필요한 사람,

셋째, 정말 필요한 사람 입니다.”

 

아무리 못되먹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완전히 구제불능의 사람은 없습니다.

아무리 막가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무가치한 사람은 없습니다.

다들 존재의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이 세상에 보내실 때.., 그냥 무턱대고 보내지는 않으셨습니다.

 

 

인간이 소중한 이유는.. 그 누구라도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아름다운 이유는..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위대한 이유는.. 회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숨 쉬고 있는 한 우리는.. 하느님께 돌아설 희망이 있습니다.

 

 

생명이 아직 붙어있다는 것.., 이것 보통 일이 아닙니다.

아직도 우리가 하느님의 은총 안에 있다는 표시입니다.

살아있다는 것.., 이것 결코 평범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직도 하느님 사랑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 땅위에 두 발로 서있다는 것은...

우리가 아직도 구원과 영원한 생명의 씨앗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런 사람들 사이에 파견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런 사람들을 위해 전력투구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 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가난한 자, 잡혀간 자, 눈 먼 자, 억압 받는 자>들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복음을 들고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아들 예수님에게 하셨던 똑같은 방식으로

우리를 세상 속으로 파견하십니다...

 

이렇게 사람들에게 다가가려면

먼저 그들을 보는 ‘아름다운 눈’이 내게 있어야 합니다. (펀 글)

 

 

 

 

◑2. 기도의 사명자로 특별히 부름 받은 한센병자

 

한센병자라고, 얏 보아서는 안 됩니다. 당연한 얘기지만,..그가, 자기 병을 통해서,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신상언 선교사)가 결혼하자마자 신혼여행지로 택한 곳은 소록도였습니다.

당시 저와 같은 CCC맨 들은, 소록도로 신혼여행을 가곤 했습니다.

그래서 저도 아내를 꾀어서, 괜한 돈 들여서 신혼여행 가느니

여수 소록도까지 거지전도여행을 가자고 제안했고,

당시 순진했던 아내도 흔쾌히 동의했습니다. (아마 30년 전쯤 이야기)

 

 

우리가 소록도 교회에 도착한 시간은 컴컴한 밤이었습니다.

마중 나오신 할머니가 내 손을 붙잡으시는데, 오 마이 갓!

그 분은 손가락이 없었습니다.

 

 

더욱이 시간이 컴컴한 밤에, 그것도 처음 가보는 생소한 낯선 곳에서

‘음성’이라고 해도, 얼굴이 거의 해골처럼 보였으니.. 소름이 끼칠 만 했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그 분들은 손가락도 없는 손으로, 막 박수를 치면서 찬양을 힘껏 불렀습니다.

♬세상사람 날 부러워 아니하여도, 나도 세상 사람들이 부럽지 않네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시니, 할렐루야 찬송이 저절로 나네♬

 

 

거기에 양재평 장로님이란 분이 계셨는데,

젊었을 때 김준곤 목사님과 동년배 친구였는데,

김 목사님은 세계적인 영적 지도자가 되셨고,

양 장로님은 나환자가 되어서, 소록도에서 교회를 섬기고 계셨습니다.

다 같이 주님을 섬기고 계시지만, (어떤 관점에서 보면) 극과 극이었습니다.

 

 

양 장로님이 소록도에 와서 깨달은 것은

‘하나님이 나를 이 민족의 기도의 파수꾼으로 세우셨구나.

사람이 건강하면 기도 잘 안 하니까,

그냥 나병에 걸리게 해서, 아예 여기 가둬놓고 기도를 시키시는구나!’ 라고 했습니다.

 

양 장로님은 별로 바쁜 일이 없으니까, 개인적인 시간이 무지 많았습니다.

그러니까 하루 종일 주로 하시는 일이

‘나라 위한 기도’ 그 다음에 ‘성경 암송’이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계시록까지 성경 주요 부분을 줄줄이 암송하고 계셨습니다.

 

 

저는 이 분을 만나고서 너무너무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 단락 설교 녹취)

 

그런데 양 장로님 말고도,

소록도에는 <나라를 위해 집중적으로 기도하시는 분들>이 많이 있다고 합니다.

 

 

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사명을 감당하라고

한센병에 걸리게 해서 소록도에 가둬놓고 기도 시키시는 일...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봅니다.

 

 

물론 만약에 그런 자기 삶을 억울하다고 느낀다면,

천국에서 다 곱배기로 갚아주시겠지만,

그러나 억울함이 없을 것입니다.

거기서 늘 기도하면서 성령충만 하게 사는데,

항상 행복하지, 뭐가 억울하겠습니까? (위의 찬송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한센병자라고 만만하게 봤다가는 큰 코 다칩니다.

대한민국 기도대장들은, 주로 그 분들일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관련 글 : 소록도 박권찰 이야기

 

 

 

◑3. 예수님이 내 안에 정말 살아계신다면...

 

예수님이 당시에 한센병자들과 접촉하셨다는 사실은 쇼킹한 일입니다.

돌에 맞아죽을 각오하고, 군중 사이를 뚫고 온 문둥병자들도 대단한 믿음이었지만,

예수님이 그들을 측은히 여기시고, 손을 대서touch 잡아주신 일은 눅5:13

정말 사랑과 긍휼의 극치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의 <육체적 질병>만 치료해 주신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따돌림 받고 내쳐짐을 받아서 생긴 <정신적 질병>까지

그 따뜻한 사랑의 손길과 동정의 눈빛으로.. 다 치료해 주신 것입니다.

 

 

그 후 약 11세기가 지나서, 프란시스가 고향 아시시로 돌아오는 길에

한 문둥병자를 만났습니다. 갑자기 프란시스의 마음이 막 움직였습니다.

그는 말에서 내려, 그 문둥병자에게 입 맞추려고 다가갔습니다.

 

문둥병자는 뭔가 구걸하려고 손을 내밀었는데,

프란시스는 돈을 쥐어주면서, 그 손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프란시스가 왜 그런 괴상한 짓을 했을까요? (죄송한 표현이지만) 튀고 싶었을까요? 물론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 속에서 강하게 역사하시니까,

11세기 전에 팔레스틴에서 그 문둥병자를 터치하신 예수님,

동일하신 예수님이 프란시스 안에서 살아서 꿈틀거리시니까,

예수님과 똑같이, 그 문둥병자를 덥석 터치하고 그 손에 입 맞춘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자기 안에 예수님을 모시고 있다고 하는데,

그 안에서 예수님의 사랑이 나타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세상에서 천대받고 멸시당하는 사람들>을 대할 때,

그 사람의 반응과 태도를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프간 피랍, 신정ㅇ, 무슨 위조, 이런 사건들을 대할 때

내 속에 내가 살아 있는 사람과, 내 속에 예수님이 살아계신 사람...

그 차이가 금방 표가 납니다.

자기 안에 예수님이 살아계신 사람은.. 결코 남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그 누구도!

 

 

The love of God impels us to do as Jesus did...

to love the unlovable,

to touch the untouchable,

and to forgive the unforgiveable.  (이 단락 모두 펀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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