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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신앙생활 방식 1701

LNCK 2009. 1. 19. 20:39

◈다양한 신앙생활 방식             막2:18~22          스크랩출처1, 출처2

 

 

 

‘새 술은 새 부대에’... 전통적으로 ‘새 교훈은 새 시스템에’... 이런 각도로 해석했습니다.

그런데 아래 글은 제가 이전에 듣지 못했던 색다른 각도에서 해석하길래 스크랩 했습니다.

두 각도 모두 아울러 생각해 봐야 하겠습니다. 초점을 약간 다른 곳에 두고 있습니다.

 

 

논리나 입장이 딸리는 예수님 측

세례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은,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고 있습니다.

 

논리 면에서, 여론 면에서

여러모로 보나 예수님 측의 ‘입장’이 수세에 몰리는 것 같습니다.

약간 난감한 상황입니다. 어쩌면 자기 약점이 드러나, 공격받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때 예수님은 '잔칫집 하객들이 금식할 수 있겠느냐?' 하시면서

이어서 두 가지 비유적 말씀으로 설명하십니다.

 

“낡은 옷에 새 천 조각을 대고 깁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하면 낡은 옷이 새 천 조각에 당겨져 더 찢어지게 된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 안 그러면 부대가 터져 버린다...”

 

이 단락을 이런 각도로 볼 수 있는데요...

 

 

1. 금식 등 신앙적 행위/실천의 본질

 

깊은 묵상 가운데 사는 사람은,

신앙의 행위/말씀의 실천이 ‘주님과 연합’에서 나옵니다.

행위/실천은 ‘주님의 은혜’에 감격한 마음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러니까 ‘금식’도 ‘주님과 연합’을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안 그러면 형식적인 ‘율법’이 됩니다.)

 

주님의 거룩한 사랑이 은혜로 내게 부어질 때,

우리는 어떤 실천으로 옮기게 되는데요.

 

이런 바탕을 가진 실천만이 이기적이지 않고, 온전한 행위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말씀을 실천(금식 같은) 하면서도

도리어 외식하는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에 ‘금식’을 강조하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금식하지 않는다는 문제를 예수님께 제기했습니다.

 

그들의 금식은, 외적으로는 경건한 것이었지만

내면적/본질적으로 ‘하나님과 연합, 그분께 나오는 사랑과 은혜’와는

결별되어 있었습니다.

 

(마6장에서 예수님이 지적하신 것처럼, ‘남에게 보이기 위한 금식’이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이 ‘혼인잔치에서 신랑과 함께 있을 때 금식할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은,

신앙적 실천의 본질이 <그리스도와 연합, 사랑>에 있다는 점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무슨 외적 계율을 지키기 이전에,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연합>이며, 즉 ‘신랑과 같이 있는 것’이며

그 신랑과 연합의 결과는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희들은 금식으로 얼굴을 흉하게 보이면서

그것이 경건인줄 알고 착각하고 있구나!’  예수님이 책망하십니다.

 

지금은 우리가 죄와 싸우면서 불완전한 ‘혼인잔치’를 누리고 있지만,

장차 우리가 변화되면, 완전한 혼인잔치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일은, 이 지상에서부터, 그 혼인잔치를 준비/연습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연합(동행, 임재)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기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부가 새신랑과 함께 있을 때와 같습니다.

오늘날에도 신앙이 바리새화 되면, 교회 다니는 것이 큰 짐이 됩니다.

 

옛 포도주가 ‘율법, 외적 실천’이었다면

새 포도주는 ‘신랑과 연합에서 오는 사랑, 그 은혜’요, 그 결과 <기쁨>입니다. 

                                                                          (아래 영문, 대강 번역)

 

In the contemplative life, practice must flow from the reality of divine union. Grace is gift; practice cannot cause grace. Practice must flow from the reality of grace. The state of divine love given to us in grace is the root of practice. Practice then serves grace in the struggle against our own selfishness, against sin which is the denial of grace. The disciples of one particular practice come to Jesus with a question about his disciples' practice of fasting. These particular Pharisees have a practice divorced from the essential core of love and grace. Jesus brings it back to love when he speaks about the Bridegroom. Bridegroom connotes love and union. Bridegroom connotes the joy of the wedding feast and of the first tastes of marital union. In the reality of the divine Presence there is only love. There are only the Bridegroom and the Bride. In the struggle, we wage war against sin until we come through our death to the ultimate transformation, the wedding feast of the Kingdom. "Until death do us part." The discipline of practice serves the state of union with God. In grace the old becomes new—full of promise. We become young at heart. Behold the Bridegroom comes; let us go forth to meet him with the lamps lit with our desire and our love. In Him we have new skins for new wine.

 

 

'신랑을 빼앗긴다'는 뜻도 같은

나중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때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그 보다는 '자기 죄로 인해 신랑/기쁨을 빼앗기는 때'를 의미합니다.

그 때는 마땅히 슬프게 금식해야 할 때입니다.

 

For the disciple there is both a time for rejoicing in the Lord's presence and celebrating his goodness and a time for seeking the Lord with humility and fasting and for mourning over sin. Do you take joy in the Lord's presence with you and do you express sorrow and contrition for your sins?

 

 

2.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모든 상황에 일반화시켜 적용하지 맙시다.

금식은 참 좋은 것입니다.

육체의 욕망을 제어함으로써 영적인 능력을 극대화하게 만듭니다.

성경에 보더라도 ‘금식과 기도’를 자주 함께 사용함으로써

‘금식’이 ‘기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모든 상황에 강요되어져서는 안 됩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금식할 수야 없지 않으냐?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다.

 

혼인잔치에서 금식하는 일은 오히려 잔치에 초대한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닙니다.

초대받았을 땐 왕창 먹어줘야 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신랑이고 당신과 함께 있는 동안에는

금식할 필요가 없음을 일깨워주십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모든 상황에 적용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3.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적재적소에 적용되어야 합니다.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깁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헌 옷에 기워 댄 새 헝겊에 그 옷이 땅겨 더 심하게 찢어진다.

또한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도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내가 따르고 있는 것(헌 옷)들이,

항상 상대방(새 옷)에게도 적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헌옷은 헌옷 조각으로, 새 옷은 새 옷 조각으로 기워야 옷이 상하지 않습니다.

술도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지, 그렇지 않으면 발효하여 터지고 맙니다.

 

내가 하는 것들을 남들에게 강요하지 않도록 합시다.

하느님은 그들을 다른 방법으로 부르고 계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4. 자기 방식이, 이무리 그것이 좋더라도, 남에게 강요하지 맙시다.

사람들은 예수님께 따지듯이 말합니다.

“선생님의 제자들은 왜 금식하지 않습니까?”... 강요입니다.

 

더 나쁜 것은, 그렇게 상대를 무안 주면서,

상대적으로 자기 의를 드러낼 수도 있습니다. ‘보라, 우리는 금식 한다구!’

 

그러나 예수님의 생각은 달랐지요.

지금의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기쁘게 사는 것이야 말로

하느님 아버지의 뜻임을 이어지는 혼인잔치의 비유를 통해서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물론 예수님의 수난을 상징하는 신랑을 빼앗길 때에는

슬퍼하면서 함께 해야 함을 지적하십니다.

즉, 기뻐해야 할 때는 기뻐하고, 슬퍼해야 할 때는 슬퍼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항상 슬픔만을 강조하는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파들은 결코 옳지 않고,

더욱이 자기 의를 남에게 강조하는 것은, 더욱 옳지 않습니다.

 

이 모습을 떠올리면서 지금의 나는 어떠했는지 반성하여 봅시다.

‘나는 새벽기도 하는데, 왜 당신은 새벽기도 안 합니까?’

‘나는 구제에 힘쓰는데, 왜 당신은 구제를 안 합니까?’

 

‘당신은 참 이상하군요, 찬양에는 도무지 관심 없으니...’

‘교회 청소, 식당 봉사 안 하는 사람은 모두 외식하는 자들 같으니...’

‘전도와 선교에 참여 안 하는 신자는 모두 가라지 들입니다.’

‘주일을 철저히 지키지 않는 것들은, 다 가짜야’

 

 

5. 대화를 하면서, 내 생각만 옳다고 우기지 맙시다.

농부가 약간의 땅뙈기를 일구고 암소 몇 마리를 치면서 행복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도시에 사는 직업이 의사인 사촌이 방문하여

왜 이렇게 바보같이 사는지... 좀 더 재산을 불린다면 더 행복하게 살 수 있는데

왜 이렇게 사냐고 따지듯이 말합니다.

 

사촌의 말을 들어보니 정말로 그런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재산을 불릴 수 있는지를 물었지요.

그러자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선 돈이 없으니 은행에서 대출을 받으시게.

그리고 그 대출 받은 돈으로 땅과 가축을 더 사시게.

그렇게 해서 돈을 더 벌면 되는 것이야!

 

그는 자기보다는 의사인 사촌이 더 똑똑할 것 같아서

시키는 대로 은행 대출을 받아 땅과 가축을 사고 죽도록 일을 했습니다.

 

이렇게 30년이 지났습니다. 이 사람은 많은 땅과 가축을 가지게 되었지요.

그런데 온 몸은 쑤시고 안 아픈 곳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의사인 사촌을 찾아가 진찰을 받았습니다.

이에 사촌은 이렇게 경고를 하는 것이 아니겠어요?

 

“쉬지 않으면 넌 오래 못 살아. 이제 시키는 대로 해.

땅을 전부 팔고 암소 몇 마리만 남기게.

손바닥만 한 땅뙈기만 있어도 왕처럼 살 수 있는 거야.

내 말만 믿어. 이래봬도 난 알아주는 의사니까.. 단순한 생활만이 건강의 열쇠라네.”

 

이 말에 농부는 화를 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젠장, 그럼 왜 30년 전에는 그 말을 하지 않았어?

말해줬으면 평생 이 고생을 하지 않았을 거 아냐?”

 

똑똑한 의사는 항상 자신의 말만이 옳다고 생각했지요.

의사 자신의 생각이 30년 사이에 변한 것입니다. 안 변하는 사람.. 없습니다. 

그 순간에는 맞는 것처럼 보이지만, 세월이 지나면,

항상 맞는 말만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습이 지금 우리들의 모습과 너무나 흡사합니다.

자신의 말만이 항상 옳다고 착각하는 모습들,

그래서 남들을 끊임없이 설득시키고 자신의 잣대로 판단하고 단죄하는 모습들….

 

따라서 어떤 순간에도 자기의 뜻을 억지로 관철시키려 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세상에 알리고 울려 퍼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

 

차분한 대처 방식

살다 보면 별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깐죽거리는 사람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짐짓 저 잘났다는 것을 드러내려고 시비를 걸어옵니다.

“…하는데, 왜 …하지 않아요?”

그럴 때 “너나 잘~하세요!” 하며 상대방에게 무안을 주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한 시비조의 논쟁이나

대답조차 하기 싫은 상황에 휘둘리지 않으십니다.

온유하신 그분은 상대방을 부끄럽게 하지 않으시고 차분히 설명해 주십니다.

 

버럭 언성을 높이는 일 없이 상대를 제압하는 그분의 친절한 태도는

한 수 배우고 싶은 그분만의 매력입니다.

 

 

예수님은 심술 사나운 말이나 행동을 대면하시더라도

결코 그의 어리석음을 드러내려 하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자신을 과시하지도 않으십니다.

다만 차분히 그가 가야 할 방향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나는 얼마나 많은 순간 상대를 무시하고 귀찮아하며

대꾸조차 하지 않고 모욕과 멸시와 냉소로 응답해 왔는가요?

차분하게 설명하는 것이 성질 급한 나에겐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돌아보면 지나온 시간이 부끄럽습니다.

 

 

우리 수도 전통 안에서 내려오는 얘기가 있습니다.

수호자(원장)와 관련한 얘기입니다.

수호자가 너무 똑똑해서는 안 된다.

수호자는 너무 건강해서도 안 된다.

수호자는 너무 거룩해서도 안 된다.

 

‘너무’가 들어가면 그 자체로 부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지만

아무튼 수호자가 너무 똑똑하고, 건강하고, 거룩하면

자신 형제들의 바보스러움과 약함과 죄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는

오랜 경험이 배어있는 얘기입니다.

 

바보짓을 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 형제가 바보짓을 해도 이해하고

아픈 경험이 있는 사람이 약한 사람의 그 사정을 이해하고, 배려하며

죄에 떨어진 경험이 있는 사람이

유혹 앞에 허약한 인간의 죄를 이해하고 용서하리라는 얘기이지요.

 

 [주제별 분류] 율법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