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분류 없음/2009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1740

LNCK 2009. 2. 11. 10:14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시105:16~19      설교 녹취, 정리


 

◑모든 종교에 기도의 응답은 똑같다?


「구하지 않는 것까지 응답 받는 기도」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의 저자는 어릴 적부터 교회를 다녔으나,

중학교 때부터 하나님이 믿어지지 않아 고등학교 때 기독교 신앙을 떠났다.

그 때부터 인생의 허무함에 시달려,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여러 종교를 섭렵했고,

특히 10년 동안 불교에 몸담으면서, 어느 사찰 불교회 청년회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지금은 다시 기독교로 돌아와, 목회를 하면서, 이 책을 썼다고 한다.


그 책의 내용 중에 <불교의 기도회>에 관한 내용이 나온다.

그 기도회는, 스님의 설법부터 시작되는데, 그 설법의 내용은

‘열심히 기도하다가 응답 받은 사례’가 주를 이룬다고 한다.


예를 들면, 대웅전 안에서 열심히 기도하던 부인이

거대한 불상이 움직이며 미소 짓는 것을 체험한 후에

자기가 기도한 것이 이루어졌고, 만사가 다 잘 풀렸다는 내용 등이다.


설법 후에는 기도시간이 있는데, ‘관세음보살 나무아비타불’ 같은

간단한 기도문을 계속 반복한다. 이것은 따분하게 여겨질 수도 있으나

거기에 참석한 사람들이 많다보니, 기도소리가 웅장한 합창으로 들린다고 한다.


어떤 절에서는, 북을 치면서 리듬을 맞추기도 하는데,

그런 북소리를 몇 십 분 계속 들으면, 나중에는 그 북소리가

마치 자기 마음속에서 울리는 것처럼 (감동적으로) 들리게 된다고 한다.


불자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절기는, 두말할 필요 없이 사월초파일(석탄일)이다.

그 때는 1년 중에 가장 많은 신자들이 절에 몰려와.. 각자가 등을 사서 단다.

등의 크기에 따라서 가격이 다를 뿐만 아니라, 달리는 위치도 다르다.


가장 큰 등은 법당에서 가장 좋은 자리에 달리는데,

그 등을 산 사람은 스님들에게 환대를 받을 뿐만 아니라

참여한 신도들에게도 조명을 받는다.


처음에 등을 달 때는..

석가의 자비가 불빛처럼 온 세상에 비춰져서 어두운 세상을 환하게 만들고,

또 그 등을 다는 사람들이, 석가처럼 득도해서, 윤회의 업을 끊기를 바라는

순수한 종교적 발원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은 그 의미가 많이 바뀌어서

승진, 시험 합격, 출산, 결혼 등이 주를 이룬다고 한다.


다시 1년이 지나서 사월초파일이 다시 돌아오면

사찰에는, 1년 전에 기원했던 소원이 이뤄진 ‘각종 승전담’이 난무한다고 한다.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제목을 가지고 등을 달았더니

부처님의 은덕으로 그 효력을 받게 되었다고 자랑한다.


입심 좋은 부인 몇 사람의 ‘성공담’은

사람들 사이에 전달되는 과정에서 과장되기도 하고, 왜곡되기도 해서

평상심을 유지하던 불자들까지도 너나 할 것 없이

자기가 예정했던 것보다 더 큰 등을 달게 된다고 한다...

(이 내용은 위 책에 나온 내용으로서, 불교의 고유한 신앙방식을 폄하하는 것은 아님)



◑기독교는 ‘표적’보다, ‘말씀’(계시)의 종교


과거에 사설 기도원 같은 곳에서 보면, 위에서 설명한 불교의 기도회나

기독교의 기도회가.. 크게 그렇게 다르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또한 기도응답도, 기독교에만 있는 것은 아니고,

불교, 힌두교, 이슬람교, 심지어 무속신앙 속에서도.. 기도응답이 있다.


그러나 기독교의 기도응답이나 기적과 같은 초월적인 요소가 있다 할지라도

기독교는 <초월의 종교>가 아니라.. <계시, 즉 말씀의 종교>이다.

*초월적=초자연적


그래서 우리가 매주일 고백하는 사도신경에는

‘기적’에 대한 고백이 없다.


병자를 고치시고, 눈먼 자의 눈을 보게 하시고, 귀신을 내어 쫓고,

풍랑 이는 바다를 잔잔케 하고, 죽은 자를 살리는 일은 얼마나 대단한가?


5병2어로 5천명을 먹이신 놀라운 기적,

그래서 그 사건을 경험했던 사람들이,

그것이 얼마나 자기들에게 크게 충격으로 다가왔으면,

예수님을 억지로 임금 삼으려 했다.


그러나 사도신경에는 그런 내용이 하나도 없다.

왜냐하면 그것이 신앙의 핵심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예수님은 5병2어의 사건 후에,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 말씀하시면서

내게로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않을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니까 5병2어 사건은, 단지 배고픈 사람을 먹이는데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예수님 당신이 ‘생명의 떡’이심을 보여주는데, 주된 목적이 있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크리스천들에게 초월적인 일(기적)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그것 자체가 목적일 수는 없다.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반드시 그 사건을 통해서,

우리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 것이다.


신앙은 기적 사건 자체보다도,

그 기적에 대한 해석이 더 중요하다.



◑베드로는 ‘표적’보다 ‘말씀’ 중심이었다.


베드로가 고넬료 집에 찾아가서 복음을 전하는데,

그들이 서로 처음 만났을 때,

그들 각자에게 찾아왔던 천사와, 자기가 보았던 환상에 대해 자세히 얘기 나누지 않았다.

 

고넬료는 베드로에게, 자기를 찾아왔던 천사가 가브리엘을 닮았는지

미가엘을 닮았는지 말하지 않았다.

그 천사의 날개가 2개인지, 6개인지, 없었는지.. 말하지 않았다.


베드로 역시 고넬료에게, 자기가 보았던 하늘에서 내려온 보자기 환상,

그 보자기의 색깔, 크기, 재질 등에 대해.. 거기에 담긴 짐승의 크기, 종류에 대해..

일절 말하지 않고 있다.


그들에게 그러한 것들은 하나도 중요치 않았고,

중요한 것은.. ‘왜 천사가 그들에게 나타났으며

하나님께서 왜 그에게 그런 환상을 보여주셨는가?’ 하는 점이었다.


그것은 구원받을 복음의 말씀을 들려주는 것이었다.

고넬료 가정이 구원 받은 것은,

표적 때문이 아니라, 베드로가 전한 말씀 때문이었다.


고넬료와 베드로에게 표적이 일어난 것은,

그 말씀을 듣게 하기 위한 일종의 도구였다. 표적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다.


그래서 말씀은 기적보다 중요하다.

내게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기적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그것은 성경의 단 한 줄에도 미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엄청난 <기적>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특정한 개인에게 일회적으로 나타나는 사건일 뿐이지만

<말씀>은.. 모든 세대에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영원한 말씀이기 때문이다.

 


◑요셉, ‘말씀의 단련’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들을 하나님의 자녀다운 자녀로 만들어 가신다. 말씀으로 연단하신다. ←이 단락 주제


요셉의 삶에 대해 시편에 보면,  

그가 또 그 땅에 기근이 들게 하사 그들이 의지하고 있는 양식을 다 끊으셨도다

그가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 105:16~19


요셉은 17살에 애굽으로 종으로 팔려갔다.

30살에 총리가 되었는데, 그 사이 13년의 종살이, 옥살이는 매우 힘든 기간이었다.

만약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네가 13년만 고생하고 견디면, 총리가 될 것이다’고

약속하셨더라면, 그는 아무리 어려워도 그 고난을 견뎠을 것이다.

 

그러나 요셉의 고난은, 기약 없는, 끝이 보이지 않는 고난이었다.

그 고난 끝에 도대체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이 때 사람이, 바르게 살기란 쉽지 않다.

자포자기하고, 되는 대로 살기가 십중팔구이다.


옥살이 할 때 요셉은, 위 시편에,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 라고 했다.

그러니까 인간적으로 아무리 애를 써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하나님이 무능력해서, 형들의 모함에 의해 요셉이 애굽에 종으로 팔려간 것을

보고만 계셨던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이 요셉을 외면했기 때문에, 요셉이 억울하게 옥살이하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다 알고, 다 보고 계시면서도, 요셉을 그렇게 두었던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요셉을 통해서 이루어지기를 원하셨기 때문>이었다.


▶그 말씀은 요셉을 통해 결국 이루어졌다.

그 요셉 때문에 야곱의 가족들이 애굽에 와서 살 수 있게 되었고,

그 가족들이 점점 더 불어나,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출애굽을 이루게 되었다.


또한 4백년 후에 있을 출애굽의 대 역사도

그 시작은 요셉 한 사람 때문에 시작된 것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말씀이 창15:13~14

요셉을 통해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래서 요셉이 ‘여호와의 말씀을 응하게 하기 위해서는’

성경은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 라고 한다.

때로는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 하기까지

그는 ‘말씀의 단련’을 받은 것이다.


꿈의 단련도 아니요, 고난의 단련도 아니요, 말씀의 단련이었다.

그렇다면 요셉은 창15:13~14, 즉 ‘아브라함 언약’을 기억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것을 기억하면서, 연단(단련)을 받으면서, 이기며 나아갔던 것이다.


여러분, 지금 인생의 진창 속을 걷고 계신가?

끝이 보이지 않는 캄캄한 터널 속에서,

‘하나님 이 터널의 끝이 도대체 어디입니까? 하나님 제발 저를 살려주세요!’

이렇게 기도해도, 하나님이 나를 외면하시는 것처럼 느껴지시는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을 통해서 이루어질 때까지

하나님께서 기다리고 계시는 것이다.

우리는 특별한 계시를 받을 필요는 없다. 이미 성경에 다 나와 있다.

그 말씀이 다 우리 삶에 응할 때까지, 우리는 말씀의 단련을 계속 받을 것이다.


그 말씀들이 나를 단련시켜, 나의 원숙한 구원을 만들어 낼 뿐만 아니라

내 가족과 내가 속한 공동체의 출애굽을 만들어 내시는 것이다. 요셉처럼!


그 하나님을 우리 모두가 소망 가운데 기다리자.

하나님께서 그렇게 우리 삶을, 요셉 처럼, 말씀으로 단련하시고, 인도하실 것이다. 


요셉은 이런 삶을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 계속했다.

우리 각자도 마찬가지다.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 요셉처럼 ‘말씀의 단련’은 계속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역사와 그 성취는

(요셉처럼, 예수님처럼) 말씀으로 그 인격이 연단된 사람들에 의해서

반드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씀이 그를 연단하였도다'가 필요한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는, 무슨 큰 기적을 통해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요셉도, 모세도, 그 말씀으로 단련된 인격을 통해 .. 이루어졌다.

그 인격이 단련되지 못했다면.. 그들은 사명감당에 실패했을 것이다.

 


◑바울, ‘말씀이 교회를 든든히 세운다’


사도 바울이 가장 오래 사역했던 곳은 에베소이다. 3년 동안 사역했다.

바울은 에베소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길에

밀레도에서, 에베소 장소들을 불러서 고별설교를 했다.


이제 다시는 쉽게 서로 만나지 못할 사람들이었다.


바울은 자기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고 권면한다. 행20:31

눈물을 흘린다는 것은, 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하나님 앞에 바로 세우기 위해

끝까지 몸부림 쳤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능히 여러분을 든든히 세우사

거룩함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행20:32


바울은 마음놓고 에베소 교회를 떠날 수 있었다.

왜냐하면 <말씀히 능히 그들을 든든히 세울 수 있다>고 믿었기 떄문이다.

결국 신앙생활의 가장 큰 양육은 ‘말씀’을 통해서 온다.


나의 지난 간 세월을 돌이켜 볼 때, 그나마 내 신앙을 이것만큼이라도 세워준 것이

과연 무엇이었는가? ...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표적 등이 아니었다.

내가 받은 구원을 더욱 온전하게 이루어 가는데, 가장 결정적 역할이 무엇이었나?

그것은 말씀이었다.


주일예배, 수요예배, 구역성경공부를 통해 들린 말씀들이

우리를 더욱 하나님의 자녀답게 만들어오지 않았는가!


언제나 우리가 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갈 때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더욱 성숙하고 완전하게 만들어주실 것이다.


<09.01.18. 인터넷설교 녹취, 정리

 

 

◑관련글 : 성령충만은 ‘말씀을 생각나게 하는 것’

 

심령이 뜨거운 것과 피가 뜨거운 것은 다릅니다.

성령충만은 심령이 말씀으로 뜨거워지는 것이지,

말씀이 주시는 은혜 없이, 그저 감정적으로 피가 뜨거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영적 예배

 

로마서12:1절을 보면, 그러므로 형제들아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권하노니

너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물로 예배를 드리라 그것이 영적예배니라

고 했습니다.

우리 삶 전체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산제물이 되어야 한다는 거지요.

 

여기서 ‘영적예배’라 할 때 그리스어를 보면

‘영적’이라는 단어를 <로기코스>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여기서 로고스라는 단어가 나왔어요.

엄격히 보면 논리적인. 영적예배란 논리적인 예배라 하는 말이지요.

 

'영적'이라는 표현이 또 있습니다. ‘푸니마니코스’라는 단어는 영적이라는 말이지요.

푸니마티코스라는 단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로기코스라는 단어를 사용했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진짜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이성을 사용하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는 거예요.

 

▲성령충만하면 ‘기억한다’

 

성령충만하면 눈 뒤집어지고 엑스타시에 빠지는 줄 아는데

성령에 관해 가장 많이 나오는 출발점이 요한복음 이거든요.

성령이 하시는 일은

보혜사 아버지가 너희에게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하는 사역은

‘생각나게 하시리라’ 성령이 하시는 일이 뭐에요 ‘각성하는 일’이에요.

 

예수님 말씀을 기억하게 하고, 각성하는 일을 하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성령충만하면 똑똑해져요.

 

▲성령이 나타난 고넬료의 가정에..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났다’

 

고넬료가 변화된 후에 대화하는 베드로의 모습을 보십시오.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노라”

베드로의 감성을 자극했나요? 이성을 자극한 거예요.

그게 “생각이 났다”는 거예요.

 

‘주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지...’ 하면서

성령이 이성이 깨우쳐 주시더라는 겁니다.

성령이 하시는 일은 이성의 각성이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성령충만한 사람들은

이성적으로 성숙한 신앙인으로 변화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성적 신앙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피가 뜨거워 지려면 북 치고 장구 치고 찬양하고 그러면 되요.

가끔 피도 뜨거워져야 해요. 찬피보다는 낫지요.

그러나 피만 뜨거우면 뭐할 거예요? 심령이 뜨겁다는 게 뭡니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나야 돼요!’    <09.01.18. 설교 스크랩    [주제별 분류] 말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