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분류 없음/2009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기적

LNCK 2009. 6. 1. 11:27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기적                  요5:1-9             -09.04.16.설교스크랩, 정리-


*관련글 미신밀착형 삶에 종지부

 

▲이 비유는 안식일에 관한 것

이 38년 된 병자가 낫다고 하는 사건을

그냥 오래된 병자가 예수님을 만나서 병이 낫다는 기적이야기로 쓰지 않고

안식일 논쟁과 연결을 시킵니다. 안식일 논쟁을 유발시키는 사건으로 봅니다.


안식일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민족의 정체성을 결정짓는 중대한 전통이었습니다.

 

안식일을, 복 받는 공식처럼 외적으로 지키기만 했지,

참 안식의 의미가 뭔지를 몰랐던 사람들에게

요한은 진짜 안식이 무엇인가를

이 사건의 결말을, '안식일'과 결부시켜서 전개합니다.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요5:9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요5:10 ~18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 이렇게 물어보신 이유

38년 된 병자가 아이러니컬하게도 낫기를 원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요?


그러면 이 38년 된 병자는, 사지가 불편한 사람인 것 같은데,

제가 이 병자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해요.


저는, 결혼 후 17년 동안 아이가 없는데, 환산하면 204달을 기다린 거예요.

그러다가 나중에 교인 중에 유산을 한 분이 있다는 얘기를 들으면

제 마음의 소원이 바뀌어서

‘하나님 우리 가문에도 유산이라는 것을 한 번해보게 해달라고’

‘애기 갖는 것은 포기하고라도. 나도 유산한 사람의 남편이 되게 해달라고.’


그 심정을 여러분이 이해를 해요?

하여간 그런 소원으로 바뀌는 거예요. 소원이 점점 하향down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데스다 연못에 물이 동할 때마다 난리를 치면서 연못에 들어가지 못한

경험이 38년 동안 누적되면서 이 사람 마음의 소원이 어떻게 바뀌나하면

'저 물에 한 번 들어가 보기나 했으면 좋겠다'는 소원으로 바뀌어버립니다.

병 낫는 것은 차제의 문제가 되어버립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네가 낫고자하느냐 하고 물어보셨을 때

이 사람이 뭐라고 대답하느냐면 ‘나를 못에 넣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대답해요.

‘예. 원합니다’ 로 명확하게 대답하면 되는데

‘나를 연못에 넣어줄 사람이 없다’는 얘기는 할 필요가 없는 것인데

이 사람 마음의 소원이 이렇게 바뀌어 있었던 거예요.


▲예수님의 치유(복음)보다, 세상이 만든 조건으로 행복하기 원하는 우리들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물어 볼 수 있어요.

‘네가 행복하기를 원하느냐?’ (‘네가 낫고자 하느냐?’에 빗대어)

행복하기를 원치 않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다 행복하기를 원하지요.    *행복= 참된 안식의 의미


그러므로 베데스다 연못에 모여 있는 사람에게도

‘네가 낫고자 하느냐?’는 질문은, 물어볼 필요가 전혀 없는 거예요. 상식적으로.


그런데 주님은 물어보십니다. 왜 물어보시느냐하면

38년 된 환자의 마음속에, <피상적으로/일반적으로 낫기를 원하지만

진실로 낫기를 원하는 마음이 빠져 있었던> 거예요.


그러면 뭘 원하고 있습니까?

그저 물이 동할 때, 먼저 빠지는 것만 원하는데요,


다른 말로 설명하면,

‘이 세상’이라고 하는 베데스다가 만들어 놓은 규칙이 있어요.

(그때 베데스다 연못의 규칙은, 물이 흔들릴 때에 처음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낫는다는 규칙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낫고/ 안 낫고는 둘째 문제고

이 ‘세상이 만든 조건’을 쟁취하려고 소원을 갖게 된 거예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베데스다라고 하는, 혹은 이 세상 사회가 만들어 놓은 원칙이 있어요.

‘물이 동할 때 처음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즉 ‘돈을 벌어야 돼. 결혼을 잘 해야 돼. 자식이 잘 돼야 돼.

건강해야 돼. 예뻐야 돼.’ 세상이 그런 조건을 걸어놨어요.


그래서 이제 예수님이 오셔서 물어보시는 거예요.

‘행복하기를 원하느냐?’


그러면 우리 모두 즉답을 못하고 자꾸 말을 돌립니다.

모두 어떻게 얘기를 하냐면 ‘아휴, 우리 신랑이 돈을 안 갖다 줘서 힘들어요.’

‘우리 아이들이 조금만 열심히 하면 되는데 애들이 누굴 닮았는지 노력을 안 해요.’


주님이 다시 물으십니다. ‘아니, 행복하기를 원하느냐고?’

그러면 우리는 다른 것을 구합니다.

‘주님 늙어가면서 자꾸 주름이 생겨요. 보톡스 성공하게 해주세요.’ 등등

자꾸 다른 얘기를 하거든요.


이 본문에 ‘낫기를 원하느냐?’ 주님이 물으셨는데

‘아, 나를 못까지 나를 데려다줄 사람이 없어서 내가 못 들어갑니다.’

라는 대답과 똑같은 것이지요.


▲물에 들어가야 낫는 것이 아닙니다.

그 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자리를 들고 일어나 가라!’ 이렇게 해버리신 겁니다.


38년 된 병자가, 병자로 산다는 것이 안식이 깨진 것 아닙니까?

그 안식이 다시 회복이 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삶을 누리게 되는 것은

위에서 수직으로 떨어지는 것이지

동한 물에 들어가야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세상 조건 만족이 아니라는 사실을)

지금 요한이 포착을 하고, 예수님의 행동을 말씀화 하고 있는 거예요.


요한 이분 소름이 끼쳐요. 어떻게 예수님의 그런 행동을 보고

그런 메시지를 잡아내는지... 성령의 감동이 있으니까 가능했겠지요.


▲적용 

예수님께서 오셔서 ‘네가 행복(참 안식)을 원하느냐?’ 이렇게 물어보십니다.


그러면 헤밍웨이는 뭐라고 대답했을까요.

‘노벨상을 받을 만한 그런 소설을 한 번 쓰게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복음의 행복’을 원한 게 아니에요.)

그래서 노벨상을 받을 소설을 쓰게 했어요. 그리고 자살합니다.


마릴린 먼로에게 예수님이 오셔서 물어보셔요.

‘마릴린 먼로야, 네가 행복하기를 원하느냐?’

그렇게 물으실 때 그가 뭐라고 얘기했겠습니까.

‘아, 제가 아직 무명이라서 인기가 없어서... 인기를 주세요!’

그래서 인기를 주셨습니다... 나중에 자살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네가 행복하기를 원하느냐?’


‘네, 이번에 고3아이가 대학에만 잘 들어가면...’

‘결혼만 잘 하면...’

‘요번 건만 사업이 잘 성사되면...’


이상하게 아무도... 예수님의 복음으로 행복하기를 원하는 사람이 없는 거예요.

(낫기를 원하지 않는 겁니다.)

피상적으로는 행복을 원하는 것 같지만,

세상이 정해 놓은 기준으로 행복하기를 원하고,

복음이 주는 행복은.. 원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왜 지금 불행해요?

‘연못의 물이 흔들릴 때 처음(1등)으로 들어가지 못해서’


적용하면

‘복권에 1등으로 당첨되지 못해서’

‘공부를 1등 못해서’

‘회사에서 진급 고가 점수 평가에 1등이 못 되어서’


1등이 되면 병이 낫는다/행복해진다는 사실은.. 그건 미신이에요.

그런데 본문의 주인공은 38년 동안이나

이 미신을 계속 붙잡고 살았던 것입니다.


▲마치는 말

지금 여러분의 마음을 불행하게 만드는 이 세상의 모든 이유들은

그게 바로 베데스다의 신화가 만들어낸 미신이에요.

세상 사회가 만들어낸 허구적 미신입니다.


그게 왜 미신이고, 허구인지

헤밍웨이, 마릴린 먼로의 예를 앞서 들어서 설명했습니다.

(죄송하지만) 최진실 씨도 얼마나 괴로웠으면...

(함부로 언급해서 죄송하지만) 재벌총수도 뛰어내리고... 하잖아요.


근데 그 미신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여러분은 불행해하고 있다는 것이에요.

그건 미신이라니까요.

‘남편이 돈을 못 벌기 때문이다’

‘자식이 말썽을 피우기 때문이다.’


이게 바로

‘베데스다에 1등으로 들어가면 낫는다’는 미신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그 미신에서 빠져 나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에는, 참 안식을 주는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38년 동안이나 미신에 붙잡혀 사는 사람을.. 고쳐주는 능력입니다.

 

밀림에서 야생 코끼리를 데려다가, 아주 가는 노끈으로도 코끼리를 제어합니다.

어떻게요? 처음에는 쇠줄로 묶어요.

그러면 코끼리가 반항을 하는데, 도저히 쇠줄을 끊을 수가 없어요.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나면

이제 자기 몸에 어떤 줄이 닿는 감각이 느껴지면

꼼짝 못한다는 것을 스스로 가르쳐요.


‘아 나는 못 움직여. 절대 저 줄을 벗어날 수 없어’

그래서 아주 가는 노끈으로 매놔도, 코끼리가 순종하는 상태가 되는 거예요.

우리가 세상 논리에 이렇게 길들어져서 살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서 살려면, 돈이 없으면 꼼짝 못한다.’

(돈이 있어도 못 하는 것이 아마 백 배로 더 많을 것입니다.

사업자금이 없어서 사업을 못합니까?

사실은 경영능력과 아이디어가 없어서 못 하지요)


‘대학을 안 나오면 아무 것도 못해.’ 라는 미신에 묶여서

아주 패배주의자로 사는 사람들이 의외로 꽤 있습니다.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오셔서

주님이 계속 질문하시는 것은 ‘내가 돈 보태주랴?’가 아니에요.

돈 많은 마릴린 먼로도 자살하고, 노벨상 받아도 자살한다니까요.


주님이 아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정말 낫고자 하느냐, 정말 행복을 원하느냐?’ 물으신 거예요.

‘그 미신을 정말 버릴 준비가 되었느냐?’는 뜻도 됩니다.


▲안식일 논쟁과 결부시켜 살펴보면

이 사건을, 나중에 ‘안식일 논쟁’과 연결시키면서

사도 요한은, 참 안식이란, 

38년된 미신에서 풀려나 자유하는 것,

참 치료/참 자유/참 행복은.. 예수님 말씀(복음)을 믿고

자기 과거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걸어가는 것/걸어가게 해 주는 것이라고

‘안식/안식일’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남편 잘 만나서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싱글 때부터 행복해야 합니다.

아내와 남편이 결혼해서, 서로가 십계명을 잘 지켜 가면 행복해집니까? 아니에요.


남편 만나기 전에 완전히 행복하지 않으면, 남편하고의 좋은 관계가 불가능합니다.

부인 만나기 전에 먼저 완전히 행복하세요.


남편 만나고 나서 행복해지려고 하는 것처럼, 무식한 기독교인이 어디 있어요?

기독교인이 아닌 여자들은 그런 말을 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기독교인 여자 중에서는, 남편 잘 만나서 행복해지겠다고 하는 여인처럼

무지한 여자가 어디 있어요?


결혼 전에, 38년된 고질병을 먼저 처녀 총각이 치유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결혼 하고 나서도 가정이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행복을 기대하고 결혼을 했는데, 생지옥 됩니다.

 

(더 심각한 것은, 그 원인이 미숙한 자기 인격에 있다는 것을 모르고

항상 배우자 탓을 한다는 것입니다...)

결혼 준비, 잘 하고, 또한 준비가 잘 된 배우자를 만나셔야 합니다.

(후략)                                                                                                           ▣ 복음 관련         

'분류 없음 > 2009'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자 디모데 1920  (0) 2009.06.02
매이지 않는 복음  (0) 2009.06.02
온 땅에 영광이 충만 아멘 아멘  (0) 2009.05.30
자녀를 노엽게 마시라  (0) 2009.05.29
네 부모를 즐겁게 하라  (0) 2009.05.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