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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나의 생명’이란 말의 뜻은? 1925

LNCK 2009. 6. 5. 11:12
 

◈‘주님이 나의 생명’이란 말의 뜻은?                   눅7:11-17            -09.05.07.설교 스크랩, 출처- 

                                                                                      *원제목 :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기적

 

◑과부를 통해서 본 ‘생명’의 문제


▲이 기적의 주제 메시지

나인 성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리신 기적이야기를 살펴보며 은혜받기를 원합니다.

이 기적 사건을 통하여 주님이 전달하시려는 메시지의 초점은

기적의 수혜당사자보다는 오히려 그 옆에서 울며 따라가는 어머니가

메시지의 초점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합니다.


죽어서 관에 실려 무덤으로 들려나가던 이 청년이야 뭘 알겠습니까.

나는 죽어 있었고 일어나보니까 다시 살았다 그랬겠지요. 무슨 간증이 있었겠어요.


초점은 어머니에게 맞춰져있다고 생각이 들고

이 기적이야기를 통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전달하려고 하는 메시지는

‘죽어봐라 내(예수)가 다시 살릴게’ 가 아니라

‘생명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시려고 하는 겁니다.


▲자기 <목숨>은 살아있었지만, 자기 <생명>이 꺼져버린 여인

여기서 말하는 <생명>이라는 것은 <목숨>과 비교해서 이해해야 합니다.

즉 우리 속에 갖고 있는 영원한 그 어떤 생명을 뜻하지요.


그러니까 이 여인이 지금 어떤 상태냐면

과부로서 자기 외아들이 죽어서 지금 운구가 공동묘지를 향해 가는 동안에

옆에 따라가면서 우는 여인의 상태,

<목숨>은 살아있으나 <생명>은 꺼진 것이지요.


바로 이 상태에서 주님이 개입하심으로써

주님께서는 <생명>이 무엇인가를,

‘내가 <생명>으로 왔다’는 사실을 알려주시는 것이지요.


외아들 자녀의 죽음을 앞에 놓고.

자기 목숨은 살아있으나 생명이 끊어진 이 미망인의 상태를 통해서

주님이 던져주시려는 메시지는

‘기독교가 말하는 <생명>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이게 이 사건의 주제라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나의 생명이 되신다.’

‘예수님이 나의 생명이 되셔서 그 생명 되신 예수님을 믿으며 산다.’

이게 뭘 말하는 걸까요? - 이것이 이 사건이 주는 메시지입니다.


▲과부에게 ‘아들’은 자기의 ‘생명=자기 인생의 전부’였습니다.

과부에게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남편도, 재산도, 법적 권리도...

그야말로 자기 아들 하나만 바라보는 신세였습니다.

그러니까 과부에겐, ‘아들’이 사실 ‘자기 생명’보다도 더 소중한 존재였지요.


예를 들어 이 과부가 아이를 키울 때,

아이가 놀러나갔다가 한 이틀 소식도 없이 잠적해 버렸어요.

그러면 그때 과부의 마음이 어떻겠어요?


미망인에게 이 ‘외아들이 생명’이라고 하는 것은

지금 당장 외아들이 종적을 감춰버리면.. 숨을 못 쉬는 상태가 돼버리는 거,

이게 바로 이 미망인에게 ‘생명’과도 같은 존재에요.


저도 바로 얼마 전에 그런 경험을 했어요. 우리가 새로 이사를 갔거든요.

거기서 초등학생 우리 아들을 영어학원에 보내려고, 학원 버스를 기다리는데,

눈 깜짝 하는 사이에 아이가 없어진 거예요.


애 엄마가 급해서 학원버스 기사에게 전화를 해봤더니, 버스에는 안 탔대요.

아이가 없어진 거예요. 그래서 저도 집에서 뛰어나와서 아이를 찾으러 다녔어요.

경비 아저씨는 못 봤대요.

나중에 알았는데, 자기가 혼자 걸어서 학원을 간 거예요.

약 15분이었는데, 그 시간 동안은 정말 아찔했습니다.

 

여러분, 주님하고 15분 동안 이렇게 소식이 끊어지면서 숨이 꽉 막혀본 적이 있습니까?

15분은커녕 15일을 주님과 상관없이 소식이 끊어져 살아도, 잘 살잖아요?

주님과 연결된 교제관계가 아닌 것입니다.

‘주님과 생명의 관계’가 될 때... 도저히 끊어지면 못 사는 것입니다.


주님이 내 생명이라는 것은 주님과 이렇게 단절돼버리고 나면

잠시를 숨을 쉴 수가 없는 상태가 되는 것.

이게 바로 주님이 우리의 생명이 되신다는 얘깁니다.

그런데 이렇게 ‘주님이 나의 생명’이 있어 보신 적이 있어요? 아니지 않습니까.


▲주님 말고, 나의 ‘생명’인 것들은?

과부에게 외아들과 같이

우리 자식이 내게 생명이요.

사업하는 아빠들한테는 사업이 생명.

또 시집을 꿈꾸며 몸단장을 하는 아가씨들한테는 피부가 생명.

우리 각자에게 다 생명이 따로 있는 것이에요.


그것과 뭔가 단절이 이루어지면 견딜 수 없어하는

그런 대상(우상)이 우리 각자에게 있는 것입니다.

 

▲‘생명’을 가진 사람에게는 괴력이 나옵니다.

그러면 예를 들어 이렇게 생각을 해봐요. 이 미망인이 아침에 일어났어요.

어제 종일 밖에서 일하는 바람에 몸이 천근만근이에요.

그런데 옆에 누워 자는 아들을 봅니다.

그리고 납덩이같은 몸을 일으켜서 그 아들의 밥을 지어요. 


애가 과부에게 살아갈 힘이 되는 <생명>이에요.

내가 살아갈 이유가 되는 게 생명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그 아들을 보며 웃어요.

사람들이 미망인이라고 업신여김을 받고, 사회적으로 조롱받는 위치에 있으면서도

집안에 들어와서 아들을 보면서 소망을 갖고 힘을 얻습니다.

이게 ‘생명이 주는 힘’이에요.


그래서 누가 뭐라고 해도 천지가 개벽을 해도, 나는 살아야 된다고 믿습니다.

왜요? 이아들 때문에. 이아들 하나를 잘 키우고

제대로 자리 잡는 사람으로 사는 모습을 보기 위해서

모든 고난과 역경을 물리치고 살아가야 될 이유를 확인하는 거

이게 바로 ‘생명의 힘’이라는 것이에요. 괴력이 나옵니다.


여러분 生命이라는 말이 뭡니까? 生을 명령命令하는 힘이 있다는 얘기에요.

하루는, 나인 성 과부가 몸살이 나서 누워 있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엄마 일어나. 나 밥 줘.’ 합니다.

그러면 몸살 난 과부가, 그 힘든 몸을 일으켜.. 아들 식사를 챙겨 줍니다.


생명은, 生을 命하는 거예요. 살아야 될, 움직여야 될 이유를 제공하는 거예요.

이게 생명이라는 거예요.


여러분의 남편이 오늘 아침에 나갔어요. 왜 나갔어요?

집에서 쉬고 싶지만, 처자식 먹여 살리려고 나간 것입니다.

남편에게 처자식이 생명이니까요. 생을 명하는, 살아야 될 이유를 제공하는 존재입니다.


▲<예수님이 진정 나의 생명>이 되실 때

그런데 ‘예수님이 나의 생명’이라는 것은... 어쩐지 내게 힘들어요. 괴로워요.

전부 내 마음에 곤고함만 안겨주는 것 같아요.

아직 ‘예수님이 나의 생명’이 안 된 것입니다. 신앙이 더 성숙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보고 웃는 사람, 예수님 땜에 사는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 땜에 살아야 될 힘과 이유를 찾는 사람이 됩니다.

내가 지금 왜 살아요? 예수님 때문에 산다.

자기 삶의 이유를 예수님 땜에 찾는 사람,

그 사람이 ‘예수님이 자기 생명인 사람’이라는 겁니다.


예수님이 생명으로 오셔서 막 우리가 원하는 것,

돈도 주고, 건강도 주고, 형통도 주고, 이러실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너무너무 찌들고 힘들고 괴로운 이 세상의 삶 가운데서도

내가 살아야 될 이유가 예수님인 경우,


그런 생명이 되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지

우리를 번쩍번쩍하게 로마의 황제와 같은 삶을 살게 하시려고

이 땅에 오신 분이 아니라는 겁니다.


너무 빈약하지요? 너무 궁색하지요?

좀 화려하게 이 세상에서 생각하는 형통을 이루어주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주님이 오신 주목적은 그게 아니라는 것이에요.


나를 믿고 산다고...

잘 살 것도 아니고, 형통할 것도 아니고,

기가 막히게 살 것도 아니고,


단지 내가 온 이유는 ‘네가 나 때문에 살아라’,

‘이 세상에서 얼마를 살든지 간에 나 때문에 살고, 내가 이유가 돼서 살아라.’

이것이 <예수님이 자기 생명>이 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과부의 아들이 죽어버렸습니다.

나인 성 이 미망인이 살아갈 명분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자기 목숨은 있지만, 생명은 끊어진 샘이지요.

이 여자 분에게는 살아야할 이유가 하나도 없어요.


예수님께서 생명이라고 하는 것도 바로 그런 거예요.



◑울지 말라!


▲그런데 <주님이 내 생명>이실 경우에는, <세상이 내 생명>일 때와는 다른 특징이 있어요.

세상을 살려면, 이를 악물고 살아야 된다고들 말하잖아요.

남편이 죽고 난 뒤에 ‘이를 악물고, 자식 잘 키우며 살 거야’ 그러잖아요.


그러나 주님이 생명일 경우에는 이를 악물고 살지 않아요.

이를 악물 일이 없어요. 왜 뭐가 부족해서 이를 악물어요?


예수님과 딱 붙어서, 그쪽이 화가 나면 나도 화가 나고,

그쪽이 잘되면 나도 잘되고.. 완전히 그쪽과 매어 사는 것 이게 바로 생명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이 이를 악 무시지 않는데, 내 쪽에서 왜 이를 꽉 깨뭅니까?

그럴 일이 없어요.


오히려 이를 너무 안 깨물어서 불안하죠. ‘이렇게 쉽게 살아도 되는 건지...’

그래서 생명이 끊어진 과부 앞에서 예수님께서 ‘울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울지 말라  눅7:13

‘울지 말라’는 이 말은

아들이 죽은 미망인에게 와가지고 위로를 해주는 우리의 조문의 말이 아니에요.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산 사람이나 잘 살아야지...’ 이런 위로의 말이 아니에요.


‘울지 말라’는 이 말은.

이제 네가 울지 않아야 될 이유가 생겼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울음이 없는 세상으로 내가 너를 데리고 가겠다는 겁니다.

왜? 내가 지금 네 앞에 서있으니까,


울지 마라. 우리가 왜 울어요? 우는 이유는 하나에요.

내가 생명(우상)으로 여기며 살던 존재가

문제가 생기거나 잘못될 경우에 울지요.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내가 ‘나의 가짜 생명’을 버리고,

‘참 생명’ 예수를 선택하라고 하십니다.


▲<아들이 나의 생명>에서 <예수님을 나의 생명>으로 바꾼 여인

그런 올바른 선택을 하게 하신 후에

예수님은, 죽은 과부의 아들도 다시 살려 주십니다.


자 보세요. 과부가 살아난 아들의 손을 딱 잡아요. 전율이 있었어요.

그리고 아들의 손을 붙잡고

죽음의 행렬이 생명의, 환희의 행렬로 바뀌어버리고

애도의 행렬이 생명의 행렬을 따라서 동네로 들어옵니다.


자 아들의 손을 잡고 뒤에서 예수님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예수님을 쫓아가는 이 과부의 심정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금방 죽어서 공동묘지로 나가던 아들이, 지금 자기 손에 잡고 있고

앞에는 예수님이 걸어갑니다.


잔인하지만 한 번 더 가정해 봅시다. 3년 뒤에 아들이 다시 죽었다고요.

그럼 이제 과부가 어떻게 됐을까요. 울까요. 안 울까요?

울겠지요. 그러나 이울음과 3년 뒤에 우는 울음은 성격이 다른 거지요.


'너 잘됐구나. 아버지 품에 안기게 됐구나. 잘 가라. 엄마도 곧 따라갈게.'

이런 울음이지요. 생명이 바뀌어 버린 거예요.

예수님으로 바뀌어 버린 겁니다.


성경 본문 사건을 통해 과부는,

‘예수님께서 원래 아들의 주인’이셨다는 것을 알게 되고

‘예수님이 자기 생명’으로 바뀌어버린 겁니다.


(성경 본문에는, 그 과부가 크게 변화되었다는 설명이 안 나오지만

여러분, 죽었던 자기 아들을 다시 살려 주셨는데, 잃었던 생명 다시 찾았는데,

그런 변화가 일어났다고 보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이제 이 과부 미망인께서 살아야 될 이유가 뭡니까? 이제는 아들이 아니에요.

이제는 ‘예수님’입니다.

그 분이 생명을 다스리고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반복합니다. ‘예수님을 내 생명’으로 모시면, 왜 울지 않는 세상이 벌어집니까?

아들이 내 생명, 내가 살아야 될 이유였을 때는

내가 너무너무 약한 존재라서,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엎어지고 꺾어지고 망가지고 실패할 때마다

내가 울어요. 그럴 때마다 내가 울 수밖에 없었어요.


뭔가 내 생명이 되는 것들이, 세상에서 잘 풀리지 않기 때문에 우는 겁니다.


그런데 이제 <주님이 내 생명>이 되셨어요.

주님이 슬퍼하시거나, 실패하시거나, 망하는 일이 없잖아요?

도리어 생수의 강이 늘 주님으로부터 흘러나옵니다.


그래서 자꾸 웃게 돼요.

그게 바로 생명 되신 주님으로부터 生을 命받는 사람들의 특징이라는 것이에요. 


▲가정주부도 영감을 가지고 살게 되어 있습니다.

목사님들이 하는 농담이 있습니다.

나이 많은 과부와, 저처럼 설교를 못하는 목사님들의 공통점이 한 가지 있습니다.

영감靈感이 없다는 것입니다.


나이 많은 과부도 영감old husband이 없으시고

설교 못하는 목사님inspiration도 영감이 없으시고...


그런데 예수님이 생명인 사람들의 특징은 영감으로 충만한 거예요.

모차르트가 오페라를 작곡할 때만 영감이 필요한 게 아니에요.

헨델이 메시아를 작곡할 때만 영감이 필요합니까.


집에서 반찬 만들 때도 영감을 받으세요. 주님이 내게 허락하신 가족이에요.

가족 땜에 사는 게 아니라, 주님이 그 가족을 내게 허락하셨기 때문에 사는 겁니다.

가족 때문에 사는 게 아니에요. 가족이 이유가 돼서는 안돼요.

이 가족을, 이 남편을, 이 자식을 누가 주셨어요? 주님이 주셨어요.


그래서 그들이 먹을 식사도, 주님이 주신 사람들을 먹일 것이니까

영감靈感을 받아서 반찬을 만드세요. 반드시 그렇게 됩니다.

주님이 내가 사는 이유이기 때문에,

주님이 나를 살게 하기 때문에... 내 얼굴에서 빛이 나고 웃음이 나요.


▲혹시 지금 가족과 관계가 힘들다면

남편과의 관계가 어려워졌다, 며느리와의 관계가 어려워졌다,

시어머니와의 관계가 어려워졌다... 그것을 회복하려고 하지마세요.


그냥 놔두고 생명을 바꾸세요.

내가 살아야 될 이유를 바꿔요. 지금. 예수님으로 바꾸세요.


내가 사는 이유가, 즉 내 ‘생명’이

자녀가 아니요, 남편이 아니요, 예수님이 될 때

예수님의 생명/영감/기운/성령이 내게로 스며들어옵니다.

그러면 가족간의 관계도 회복되게 되어 있습니다.

무작정 인간관계부터 회복하려고 하지 마세요.


주님과 15분 동안 단절이 되도 나는 숨을 못 쉰다.

이렇게 느끼며 사세요.

‘15분 동안만 주님과 통하지 않아도 나는 끝장난다.’

이런 마음가짐으로 살아 보세요.

주님의 생기가 生氣가 내 속으로 들어옵니다.


그래서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진다는 게 뭡니까.

이게 명령입니다.


‘예수가 나의 생명’이 된 사람들을 통해서,

주님이 당신의 뜻을 이 땅에서 이루어 가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정한 뜻이 아직 너를 통해 이루어져야 되니까

너 아직 이 땅에 살아 있어라.’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 주님과 막히면 내가 15분만 막혀도 숨을 못 쉬는 그런 사람이 되기 원합니다.

돈이 없어서 숨을 못 쉬고 자식이 안 돼서 숨을 못 쉬는 게 아니라

주님과 막히면 숨을 못 쉬는 그런 사람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이게 바로 생명이신 예수님을 상대하는 방법이지요.


▲‘사역의 성공’이 사도바울의 ‘생명’이 아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 감옥에 갇혀서 찬양하잖아요.

채찍에 맞아서 몸이 너덜너덜해진 겁니다.

건강과 육신의 아름다움이 바울에게 생명이었다면..

이제 그가 살아야 될 이유가 하나도 없어요.


선교를 하는 선교의 성공이 생명이었다면

사도 바울은 살아야 될 이유가 하나도 없어요.

꿈에 마게도니아 사람을 통해 성령이 불러서 갔는데도... 실패했어요.

하나님이 지시했는데 왜 실패합니까.

그것에 대한 성공을 바라고 살았다면... 빌립보 감옥에서.. 살아야 될 이유가 없었어요.


그러나 ‘사역의 성공’이 사도바울에게 ‘자기 생명’이 아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 분만 자기 생명이었습니다.

그래서 감옥에서도 그 찢겨진 몸을 일으켜 세우고, 찬송하고 기도합니다.

그랬더니 수감자들의 마음이 변화되고(듣더라...),

간수의 가정이 회개하는 역사가... 덤으로 일어났습니다.

과부의 아들이 다시 살아났던 것처럼!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아브라함이 이삭을 스스로 죽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나인 성의 과부는 하나님이 그 외아들을 앗아가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살리시면서 생명이 누구인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주님! 이제 우리는 하나님 말고 사랑하는 모든 내 마음을 주님의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주님만이 내 생명이 되게 하여 주시고,

내가 지금 하루라도 더 사는 이유가 주님 때문이며


내가 지금 움직이는 이유가 주님 때문이고

내가 웃고 우는 모든 이유가 주님 때문인

<주님이 나의 생명인 사람>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복음 관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