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저한 조연, 세례요한 눅3:15~20 09.02.08.설교녹취
◑‘세례요한이 메시야였으면 좋았겠다’는 기대감
▲메시야를 간절히 기다리고, 그 분에 앞서 올 엘리야를 기다렸던 사람들
말라기 이후 이스라엘에는 4백 년 동안 선지자가 없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한 가지 희망의 예언을 잊지 않고 있었다. 말4:5~6
그 말라기 예언의 성취로, 드디어 ‘엘리야’가 왔다.
사실 세례요한의 입에서 나온 말들은, 매우 거칠고 독설적이었지만
사람들은 그의 메시지 속에서 어떤 희망을 보았다. 어떤 기대감을 가졌다.
그래서 잠시나마 행복해했다.
▲세례요한이 차라리 메시야이었으면 좋겠다... 는 사람들의 기대감
그런데 사람들의 기대감은 지나친 것이었다.
‘세례요한이 그리스도였으면 좋겠다’ 하는 것이었다.
백성들이 바라고 기다리므로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혹 그리스도신가 심중에 생각하니 눅3:16
‘그리스도를 기다리다가 지쳤다. 그가 누구이든지, 좀 빨리 오셔서
우리들 삶에 변화/해결을 해 줬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가당치 않은 생각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세례요한이 그리스도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메시야는 유다 지파/다윗의 후손에서 나와야 하기 때문이다. (세례요한은 레위지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례요한이 혹시 그리스도이신가?’ 하며 잠시 기대했던 것은
그만큼 그들의 고통이 심했고, 그들의 서러움이 깊었고
메시야에 대한 그들의 기다림이 그만큼 간절했다는 뜻이다.
그들은, 세례요한을 (또는 다른 누구라도) 그리스도로 인정하고 싶었던 것이다.
▲세례요한의 자기부인 : 나는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메시야가 아니요!
자기가 혹시 메시야이기를 바라는, 그들의 생각을 세례요한이 알았다.
그래서 그들에게 명백하게 말한다.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눅3:16
‘당신들은 나를 매우 높이 평가하고, 나를 중요한 사람으로 여기고 있지만,
나는 당신들이 생각하고 기다리는 메시야가 아니오.’ 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세례요한은,
사람들의 관심이 자기에게 집중되는 것을 아예 싹을 잘라버리고 싶었던 것이다.
- 이것이 세례요한의 위대함이다.
세례요한을 통해서 우리가 반드시 교훈 받아야 할 점이 바로 이것이다.
자기가 메시야(=그리스도)보다 높아지고 대우받는 분위기를
도저히 못 견뎌하는 것이다.
요한은, 자기의 그 말 때문에, 실망할 사람들이 많을 것을 미리 알았다.
그러나 그들을 실망시키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자기가 그리스도가 아닌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나서 자기 뒤에 오실 그리스도에 대해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는 능력이 있으신데, 그 분의 능력과 나를 비교하자면
나는 그 분의 신발끈을 풀 수도 없는 자입니다.’ 라고 말했다.
사실 세례요한은 큰 능력이 있었다.
예루살렘과 유대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서 세례를 받았다.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 막1:5
많은 사람들이 그의 메시지를 듣고, 변화의 체험이 나타났었다. 눅3:10~14
사람들은, 그 능력을 보고 얼마나 깜짝 놀랐는지
심지어는 ‘그가 오시기로 예언된 메시야일지도 모른다’고 까지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 위대한 능력의 종이
철저히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있다.
자기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감을.. 싸늘하게 식혀버리고 있다.
사람들은 자기가 유명세를 타고 인기가 높아지면 전도가 더 잘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자기를 드러내는 사이에, 그리스도가 감추어진다.
세례요한은, 자기를 그리스도처럼 높이는 사람들에 대해서
철저히 자기 뒤에 오실 예수님만 높일 것을... 그는 강조한 것이다.
자기를 너무 높여서 그리스도처럼 높이려 하면.. 이단이 그렇게 한다.
◑알곡과 쭉정이를 갈라내시는 그리스도
세례요한의 메시지에 의하면, 자기 뒤에 오시는 그리스도께서 하실 일 중에 하나는
알곡은 모아서 곡간에, 쭉정이는 모아서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는 일이다.
즉, 알곡과 가라지를 갈라내는 일을 하실 것이라고.., 그는 예언한다.
▲어떤 의미에서.. 복음은 사람들을 갈라지게 만든다.
예수를 기복주의의 포장으로 전달하는 곳에는, 아무런 갈등도 일어나지 않겠지만,
오늘날 예수가 4복음서에서 막 바로 뛰쳐나온 것처럼,
그 분과 그의 메시지가 생생하게 전파된다면..
<그 곳에는 알곡과 가라지가 반드시 갈라지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어있다.
그 때도 사람들이 불편해 못 견뎌서, 예수를 잡아 죽이려 했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어쩌면 ‘분열’은 반드시 일어나게 되어있다.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마10:36
▲나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그 분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오! 눅3:16
여러분, ‘물’과 ‘불’의 차이다.
‘물’은 뭔가를 씻지만, 그 성질을 바꿀 수는 없다.
그러나 ‘불’은 태워서, 그 성질을 완전히 바꿔버린다.
무슨 말인가 하면, 우리가 하나님 자녀가 된다는 것은, 옷을 갈아입는 정도가 아니다.
내 신분과 본질이 바뀌는 것이다.
그러나 내 신분과 본질이 바뀌는 것은, 물세례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불과 성령의 세례를 통해서이다.
지금 모든 사람들이 자기를 주목하고 있다.
그런데 세례요한의 겸손한 자기부인의 말을 들어보시라!
‘지금 내가 하는 일은,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니요, 그저 씻어주는 것 정도요.
그런데 내 뒤에 오시는 분은, 여러분을 불과 성령으로 완전히 바꾸어 주실 것이요!’
여기서 ‘성령과 불의 세례’가 무엇인가 해석할 때,
①‘성령과 불의 세례’를 하나로, 즉 ‘성령의 불세례’를 의미한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행2장에 성령이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모양으로 임하셨기 때문이다.
②성령세례는 중생/성령충만, 불세례는 종말의 심판을 의미한다고 해석하기도 하는데,
이어지는 눅3:17절을 볼 때, 여기서 ‘불’은 종말 심판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purify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눅3:17
성경에서 ‘불’은 종종 2가지 의미다.
①정화/재련/단련하는 불 refining fire
②심판의 불 consuming fire
종종 이 두 가지 역사가 동시에 일어난다.
예수께서 불을 보내실 때, 믿는 자에게는 ‘정화의 불’이 되지만,
동시에 안 믿는 자들에게는 ‘심판/소멸의 불’이 되는 것이다.
세례요한이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지리라’고 한 것은
바로 이 ‘심판과 소멸의 불’을 의미한다. 히12:29, 신4:24등
◑세례요한은 왜 헤롯에게 대들었을까?
▲일찍 자기 죽음을 자초할 필요가 없지 않았을까?
세례요한은 지금 자기가 해야 될 일이 많은 사람이었다.
많은 백성들이 세례요한과 그의 메시지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인간적으로 볼 때, 괜히 헤롯에게 대들었다가 일찍 죽느니,
헤롯을 우회해서 비껴가서, 더 오래, 더 많은 사역을 하는 것이
더 열매가 많지 않았을까? ... 이것이 성경을 읽은 나의 질문이었다.
세례요한은 똑똑한 사람이다. 헤롯에게 대들었다가 자기 목숨이 떨어질 것을 잘 알았다.
그런데 그가 왜 그렇게 무모하게,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아니하고,
헤롯의 잘못을 직설적으로 드러내어 공격하다가, 감옥에 들어가 최후를 마쳤는가?
▲예수님은 초기에 죽음을 피하셨다.
생각해 보시라. 예수님도 똑같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잘못을
매우 날카롭게 지적하시고, 공격하셨다.
그러자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살해위협이 사방에 가득했다.
그 때, 초기에 예수님은,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피신하셨다. 요7:1, 11:54등
왜 예수님은 정면으로 맞서지 않으시고, 피하셨는가?
아직 십자가를 지실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때가 되면, 예수님은 그 어떤 위험도 감수하실 각오가 단단히 되어있으셨다.
그러나 아직은 그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피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세례요한은 때조차 분변치 못하는 무모한 사람이었는가?
사람들 앞에서 영웅이 되려고 헤롯에게 대들고,
그래서 감옥에 들어가서, 얼마든지 더 오래 사역할 수 있었는데도
영웅심에 도취되어 날뛰다가, 아까운 자기 생명을 잃게 된 덜렁이였는가?
물론 그렇지 않다. 천만의 말씀이다.
세례요한을 그렇게 단순하고 무지하게 평가하면 안 된다.
세례요한은 하나님의 음성에 매우 주의를 기울였던 사람이었다.
그는 ‘나는 광야의 소리요’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라고 말할 때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전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왜 세례요한은, 지금 헤롯에게 무모하게 대들고 있는가?
답은 단순하다.
▲세례요한은, 지금이 자기 사명을 완료할 때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세례요한은 자기 마음속에 꽉 차 있는 생각이
자기가 나서는 것이 아니라, 자기는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자요,
그리스도가 오시면, 자기는 퇴장해야 한다는 것을.. 엄격히 잘 알고 있었다.
어떤 분들은, 예수를 전하지만, 자기가 너무 위대해서, 예수가 가려지는 경우가 있다.
그런 교회에 가면.. 성도들이, 예수를 자랑하지 않고, 사람을 자랑한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자기 때문에 예수가 가려지는 것을, 결코 견딜 수 없었다.
◑나는 절대로 주목받기 싫어요! .. 철저한 조연을 고집했던 사람
▲신랑의 들러리로 만족한 세례요한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요3:29~30
위 비유가 나올 수 있었던 당시 사회적 배경이 있다.
결혼식 때, 신부가 기다리고, 신랑은 정해지지 않은 어떤 특정한 시간에 도착한다.
그 때 (깜짝 쇼같이) 기쁨이 배가되는 것이다.
신랑이 아직 오지 않을 동안에, 즉 신랑을 기다리는 동안에
신부를 지키고 보호하는 보디가드 역할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 유대 풍습에.
그 사람이 바로 ‘신랑의 가장 절친한 친구’였다.
그래서 신랑이 도착하면, 그 보디가드가 신부를 곱게 모셔서 신랑에게 인계한다.
신랑이 신부를 인계 받아 방에 들어가서, 신부를 확인하고 기뻐 박수 치고 즐거워한다.
그 때 방 밖에 있던 보디가드 친구도, 그 소리를 듣고, 함께 박수를 치고 즐거워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결혼식이 절정에 달하는 것이다.
지금 세례요한은 요3:29~30에서,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하면서, 자기가 보디가드 같은 신랑친구로서 만족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오늘날 신랑은 예수님이고, 신부는 교회이다.
따라서 교회를, 신랑이신 예수께 고귀하게 바치게 하기 위해서
세례요한과 같이 자기를 ‘들러리’로 잘 쓰임 받는 사람이 있을 수 있고,
신부인 교회와, 신랑인 예수 사이를 이간질시키는
이상한 ‘들러리’도 오늘날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오늘날 필요한 리더십은 ‘있으나 마나한 목사’라고 말한 분이 있다.
물론 이 말은, ‘무책임한 목회자가 되라’는 뜻이 아니다.
무슨 말인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앉아 계셔야할 그 자리에
자기가 꿰 차고 앉아서 주인 행세하는 자는
이 시대에 교회를 무너뜨리는 가장 큰 장애물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자기는 있으나 마나 하면서, 오직 예수만 높여드리는 목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런 중직자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교회에서 거드름을 피우며, 주인 행세하는 자들은.. ‘신부’를 파괴하는 자들이다.
나는 죽어지고, 그리스도만 높아지고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
사람에게 관심이 집중되면 안 된다.
▲나(설교자)도 주목받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사람이 얼마나 천박한지...
전에 제가 부교역자 생활할 때, 사람들의 칭찬에 속은 적이 많은데,
성도들이 제게 ‘부목사님 설교는, 담임 목사님 설교보다 훨씬 좋아요!’라고 말한다.
‘부목사님 설교 듣는 맛에, 제가 교회에 와요’
이런 말을 할 때, 그런 아부성 칭찬을 제 마음 속에서 은근히 즐겼던 적이 있었다.
‘설교를 더 잘 준비해서, 더 잘 한다는 소리 들어야지’ 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여러분, 제가 (진짜 잘 해서가 아니라) 명설교로 나를 드러내려 한다면
그리스도가 가려지게 된다.
설교자가 너무 칭찬만 들으면.. 자꾸 <자기를 나타내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는 것을
제 스스로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당시 이스라엘의 최고의 설교가였지만, 자기를 감추고, 그리스도만 드러내었다.
예수 그리스도께로만 가야하는 사람들의 시선을, 자기가 가로채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세례요한의 위대성이다.
그는 철저히 자신을 ‘신발끈 매는 종’, ‘신랑의 들러리’ 정도로 인식하다가
자기 사명이 다 했다고 생각되는 순간, 스스로 퇴장해 주었다.
주님이 주시는 감동을 따라서, 기꺼이 순교의 길을 갔던 것이다.
▲그리스도 대신에, 사람을 섬기려는 (정신 나간) 제자들이 있다.
행18장에 보면, 이 때로부터 30년쯤 지난 시점인데,
사도바울이 소아시아의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할 때
그곳 제자들은, ‘세례요한의 세례만 알고, 믿고 있었다.’ 행19:3
그들은 유대를 떠나, 소아시아 에베소까지 가서도
시점도 세례요한이 죽은 지 약 30년이나 지났는데,
<여전히 세례요한을 메시야로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세례요한은 바로 그것을 겁내었던 것 같다.
사람들이, 예수님 말고, 자신을 숭배할 것을!
그래서 철저히 자기 사역 내내,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스도만 높였던 것이다.
▲세례요한이 제자들을 호통친 이유
요3장에서도,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하루는 씩씩거리며 말했다.
‘선생님, 우리에게 와서 세례 받던 사람들이 다 떠나서 예수께로 가고 있습니다.’
그 때 세례요한은 이렇게 말했다.
너희(요한의 제자들)야말로 내가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고, 그분보다 앞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다' 한 말을 증언할 사람들이다. 요3:28
라고 호통쳤던 것이다.
여러분, 오늘날 제가 여러분 교우들에게
‘저, 정목사는 무능한 목회자입니다! 이것을 사방에 소문내고 다니십시오...’
이를 테면 세례요한은, 이렇게 자기 제자들에게 부탁한 식이다.
▲세례요한이 헤롯에게 대든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주의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가 있었겠지만,
어쩌면 자기의 존재가, 그리스도의 공생애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래서 그는 감옥에 갇혔어도, 그래서 죽게 되었어도,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했을 것이다. (후략)
▲마치는 말
내가 예수님과 함께 ‘공동 주연’으로 뛸 때... 글쎄, 성령의 능력이 사라질 것 같다.
내가 예수님만 주연으로 세우고, 철저히 조연의 자리를 고수할 때...
세례요한과 같은 성령의 능력이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실 것이다.
내가 조연이라고 생각할 때만, 주님이 나와 함께 일하기를 기뻐하실 것이다.
자기가 주연처럼 활동하는 사람을 통해서는, 주님이 함께 일하지 않으실 것이다.
성도님들, 주위에 누가 예수님을 느끼게 하는가?
-여지없이 자기를 조연으로 여기고 섬기는 사람들이다. ▣ 선지자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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