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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2009

나그네 신앙 1968

LNCK 2009. 7. 4. 12:53
 

◈나그네 신앙                                   벧전2:11                             09.06.07. 설교녹취



▲베드로전서는 ‘나그네 신앙’

야고보서의 주제가 한 마디로 <온전한 사람>이라면

베드로전서의 주제는 한 마디로 <나그네>이다.


이 ‘나그네’는 방랑을 의미하지 않는다.

목적지와 방향 없이 헤매는 것 ‘방황’이 아니다.


여러분, 성도의 삶은 ‘순례자의 길’인데

방향과 목적이 없는 ‘방랑’과는 엄연히 다르다.

천국을 분명히 목적삼고서, 이 땅에 머물지 않는 ‘나그네’이다. 


▲삶의 지혜

(물건을) 살까/말까 하는 것은 .. 사지 말고,

(음식을) 먹을까/말까 하는 것은 .. 절반만 먹고

(여행을) 갈까/말까 할 때는 .. (여행을) 떠나라는 말이 있다.

그냥 사람들의 경험과 삶의 지혜에서 나온 말이니, 참고로만 하시기 바란다.

여행을 통해서 인생을 많이 배운다는 것이다.



◑1. (나그네 신앙의 특징1)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는 나그네와 행인 같은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벧전2:11


▲나그네 신앙은.. 방황이 아니다.

나그네 신앙의 목적지는 천국이며, 목표는 영생이다.

그렇게 천국 영생의 목표를 분명히 가진 사람만이

현실의 가치를 제대로 보고, 현실에 대한 올바른 안목을 갖게 된다.

 

그래서 나그네 성도는 ‘현실’에 얽매이지 않고, ‘현실’에 안주하지 않는다.

성경은, 결코 영생을 떠난 현실만을 강조하지 않는다.


우리는.. 좀 잘 되면 현실에 ‘안주’하거나, 조금 어려우면 현실에 ‘얽매인다.’

그런데 나그네 신앙은, 목표(영생)를 향하는 신앙이기 때문에,

현실에 얽매이거나 안주하지 않는다. 현실에 100% 올인해서 목숨 걸지 않는다.


여러분의 삶이 ‘다람쥐 쳇바퀴 돌 듯 한다’며 한탄하시는 분이 계시는가?

삶의 목적과 방향성을 상실한 결과이다.

오늘 하루 일어나서 자기가 해야 할 일이 분명한 사람은,

어제와 똑같은 일을 오늘도 하게 되지만, 결코 다람쥐 쳇바퀴 도는 일이 아니다.

사명감으로 불 타 오르는.. 매우 중요한/의미 있는 일을 자기가 하는 것이 된다.


여러분, 삶의 <목표>가 있으면 삶의 <기준>도 있다.

그래서 하루가 지나고 저녁이 되면,

그 기준에 의해서, 자기의 하루를 (또는 일주일, 한 달 단위로) 평가해 보게 된다.

‘오늘 나는 하루를 충실하게 보냈는지...’


여러분, 자기 삶을 평가하지 못하는 분이 계신가?

기준(평가 잣대)이 없기 때문이며,

기준이 없는 것은.. 근본을 거슬러 올라가면, 삶에 목표가 없기 때문이다.

 

하루하루의 기준을 예로 들면.

-나는 만나는 사람들을 모두 지극히 사랑했는가, 위해서 기도했는가?

-나는 매 순간을 하나님의 뜻대로 거룩한(구별된) 삶을 살았는가?

-혹시 낭비한 시간, 낭비한 물질은 없는가?

-내가 받은 사명 my mission에 나는 충실했는가?


◑2. 나그네 신앙을 잘 살려면 <관찰자의 자리>에 설 줄 알아야 한다.


▲관찰자란?

살다가 보면, 삶이 내가 예상한 대로 되지 않고, 돌발변수가 늘 발생한다.

이런 돌발변수들에 대해... 성도는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내가 예상치 못했던, 전혀 돌발적인 일이 발생할 때

성도는 <하나님의 뜻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관찰자의 자리에 선 다는 것은..

①내 생각과 달리 돌발적으로 그냥 되어지는 일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이다.

②돌발적이 아니더라도, 하나님이 일반적으로 행하시는 일들을..

순례의 여정에서 내가 묵묵히 관찰/묵상하는 것이다.

 

여러분, 여행의 묘미가 무엇인가?

현실을 떠나 멀리 여행을 가 보면, 그 여행지에서, 나의 현실을 관찰하게 된다.

평소에 못 보는 것들, 평소에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이... 그제야 보이게 되고, 비로소 정리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여행자/관찰자가 얻는 선물'이다.


▲빠르다고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니다.

여러분, 여행 중에 간발의 차이로 연결 버스나 연계 비행기를 놓칠 때가 있다.

그래서 대합실에서 다음 편을 타기 위해서 오래 기다려야 할 때도 있다.


연계 버스나 비행기가 제시간에 착착 연결되면, 시간을 절약하니까 좋다.

그러나 여러 이유로, 차편이 지연되어, 하염없이 오래 기다려야 할 때가 있다.

저는 종종 그것이 결코 나쁜 것만은 아닌 것임을 발견했다.

그 기다리는 시간에.. 하나님께서 신령한 깨달음을 주실 때도 있기 때문이다.


여러분,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다. 빠르다고 무조건 좋은 것이 아니다.

재수도 하지 않고 대학 입학, 졸업과 동시에 취업, 제 때에 아기 출산...

물론 그렇게 제 때에 모든 것이 착착 들어맞는 것도 빨라서 좋지만,


재수를 하면서 늦어지고, 취업 하면서 늦어지는 사람도

느리게 가면서 여러 방면에서 인생을 새롭게 깨닫는 점들이 분명히 있다.

빨리 가는 사람들이 결코 깨달을 수 없는, 신령한 교훈들을 깨닫게 된다.

(물론 느리게 가면서도 그 신령한 교훈들을 못 깨닫는 사람도 있지만 말이다.)


그러므로 뭔가 연결이 제대로 착착 제때 제때 되지 않을 때도

여러분 <관찰자의 자세>를 가지시라.

거기에도 전능하신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다.

하나님이 그 ‘느림’을 통해서도, 뭔가 분명히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 있을 수 있다.


▲개혁주의(칼빈주의) 신학의 가장 근본은 - 하나님의 주권이다.

여러분, 평소의 삶에,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해 드리고 계시는가?

그러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삶은, 과연 어떤 것인가?

- 그것은 <관찰자의 신앙>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행하시는 모든 일들을

나는 관찰자가 되어서, 그저 지켜보는 것이다.

이것은 수동적이 결코 아니다. 하나님이 움직이라 명하시면 즉시 움직인다.


그러나 내가 막 나서서 설쳐대는 것은 결코 아니다.

나그네 신앙은..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행하시는 그 일을.. 내가 그저 관찰하면서

찬송하고, 영광 돌리고(영화롭게 하고), 그 분을 즐거워하는 것이다. ←소요리문답1조


너희는 가만히 있어, 저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시46:10등



◑3. 나그네 신앙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이동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는 나그네와 행인 같은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적 정욕을 조심하십시오. 벧전2:11


▲주님과 동행하는 것은, 육체의 정욕을 조심하는 것이다.

위 벧전2:11절이 그런 메시지를 전해 준다.

나그네와 행인은..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적 정욕을 조심하는 사람이다.

결국 나그네 신앙으로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그저 ‘동행’이 아니라, 자기 육신과 심각한 영적 전쟁을 수행하는 사람인 것이다.


▲육체적 정욕은.. 가까이 두고 매니지 manage 하는 것이 아니다.

육체적 정욕은, 자기 정예부대를 투입해서 우리를 공격하는데,

우리는, 육체적 정욕과 싸울 때, 그저 동네축구 하듯이.. 싸우고 있다.

이렇게 해서는 결코 이길 수가 없다.


예를 들면,

‘육체적 정욕.. 그게 뭐 내게 크게 있나?, 나는 얼마든지 제어할 수 있어’

‘나는 그 육체적 정욕에.. 남의 눈에 띌 만큼, 크게 실패한 적도 없어’

라고들 생각한다.


여러분, 육체적 정욕은, 가까이 두고서 manage하는(다루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그것을 얼마든지 매니지(다룰 수)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불을 다루지만, 손은 대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착각)하는 것이다.


여러분, 육체의 정욕은 우리 각자에게 각각 다르다. 폭식, 돈, TV, 컴퓨터, 음행, 쇼핑중독 등 

그것은 내 영혼을 하나님 앞에서 바로 세우지 못하는 심각한 것이다.


이것들이 <내 영혼을 거슬러 대항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이것들이 <내 영혼을 대항해서 전쟁을 벌인다>고 베드로가 지적하고 있다. 벧전2:11

                                                                 abstain from fleshly lusts, which war against the soul 벧전2:11


▲자기가 매니지 할 수 있다는 자신감 ?

육체의 정욕이, 내 영혼을 대항해서 총력전을 펼치는데,

나는.. 그것을 내 가까이에 두고서..,

내가 충분히 매니지 할 수(다룰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문제 안 생기게, 적당히 즐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는 바는 <멀리하라 abstain>이다.

물리치라는 것이다. 절대 가까이 두지 말라는 것이다.


육체의 정욕은.. 가까이 두고서 매니지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아예 <멀리 떨어뜨려 놓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


▲바울 사도도 <멀리>하라고 했다.


하나님의 뜻은 여러분이 성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음행을 <멀리> 하십시오 살전4:3


For this is the will of God, even your sanctification,

that ye should abstain from fornication:  살전4:3 KJV


개역성경에는 ‘멀리하라’는 번역이 자세히 되어있지 않다.

그러나 다른 성경에 ‘피하라’라고 번역했는데, ‘멀리하라’가 더 좋다고 본다.


베드로 사도도, 육체의 정욕을 멀리하라abstain라고 충고했고,

바울 사도 역시, 음행(fornication/포르노의 어원)을 멀리하라고 충고했다.

그것은 우리 영혼을 거슬려 싸우기 때문이다.

그래서 죄가 있으면, 하나님과 제대로 동행하지 못하게 된다.


여러분, 멀리해야 할 것을

내가 충분히 매니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가까이 두고서 적당히 재미있게 살려고 하다가는,

주님과 동행하지 못한다.

나그네 여정에서, 하나님과 동떨어져서, 마치 광야 백성들처럼 헤매게 된다.


▲너희 영혼을 싸우는 육체적 정욕들

여기 영혼은 단수.., 내 영혼 하나이고

정욕들은 복수... 다수이다. 한 가지가 아니다.


그런데 내가 그 영적 싸움을

거의 컴퓨터 게임(싸움) 즐기듯이 하다가는.., 큰 일 나게 된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데서.. 금이 간다. 동행이 안 되고, 하나님과 멀어진다.


▲마치는 말

여러분, 하나님과 동행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면.. 거기엔 행복이 있다.

그러니까 나그네 신앙이란.. 괴로운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동행하는데 행복이 있는 것이다.

이런 행복한 기쁨이 여러분의 일생에 늘 함께 하시기를 축원드린다.                              ▣ 복음 관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