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름을 걸어오시는 하나님 창32:21~31 09.05.24. 김지찬 교수님 설교일부녹취
◑1막 : ‘속이는 자’ 야곱을 축복하시는 하나님
▲‘속이는 자 야곱’이 오히려 축복 받았다.
야곱은 형 에서의 분노를 피하여 외삼촌 집으로 도망가다가
루스(벧엘) 들판에서 돌베게 베고 잠자다가, 희한한 꿈을 꾸게 된다.
그가 꾼 꿈은, 도망자의 가위눌린 꿈이 아니었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방랑자의 슬픈 꿈도 아니었다.
형을 속이고, 눈먼 아버지를 속인 죄로 도망을 가는 자가 꾸기에는
정말 얼토당토 않는, 눈물이 날 만큼 멋진 꿈이었다. 창28:11~15
하나님은 야곱을 혼내기는커녕, 오히려 야곱 편에 서 계셨다.
▲여기서, 우리의 도덕관념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장면을 만나게 된다.
‘도대체 하나님이 어떻게 속이는 자 야곱의 편에 서 주시는 것일까?’
이게 우리의 머리로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다.
우리의 설교는 ‘야곱이 속이는 바람에, 고생바가지를 했다’로 나가는데,
그가 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피해서 고생을 안 한 것은 아니지만,
<속이는 죄로 인해, 죽도록 고생했다>는 논리로만 설명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피신하는 첫 날 밤에
①‘내가 내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하는 하나님의 친음성을 듣는가하면,
②20년 후에 고향에 돌아올 때는 거부가 되어서 돌아온 것이다. (오늘날 수십억의 자산가)
도피자가 고향에 돌아올 때는, 빈털터리로 초라하게 돌아와야 뭔가 아귀가 맞는데...
③그리고 아내가 4명에다가, 자녀가 11명 등...
지팡이만 달랑 가지고 20년 전에 요단강(오늘날의 현해탄)을 건너갔던 도피자치고는
결과가 영 딴판이다.
야곱이 ‘거짓과 속임수의 도피자였다. 그래서 고생바가지로 살았다’라는 명제로만
설명되지 않는, 어떤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가 속임수의 결과로 고생한 것은 사실이었다.
①그가 라헬을 보고 사랑해서, 7년이나 노동을 해 주고, 대가로 아내를 얻었는데,
첫 날 밤을 치르고 나서 보니, 그는 라헬이 아니라 레아였다.
아마 전등불이 없었던 시절에, 또한 야곱이 술에 취해 있었음을 감안할 때,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때 야곱은, 자기가 형과 아버지를 속인 죄를, 자기 뇌리에 금방 떠올렸을 것이다.
자기가, 형과 아우를 바꿔서 속였던 그대로, 형과 아우가 바뀌는 속임을.. 그대로 당했다.
'대접한 대로 대접 받는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절대로 무시하면 안 된다.
②그 후에도, 삼촌 라반은 자기 품삯을 10번이나 변경했다고 한다.
그리고 양을 치는 것도, 제대로 자지도 못하고, 더위와 추위를 이기며
무척 힘들었다고 고백한다. 창31:40
또한 그는, 모친 리브가와 다시는 재회하지 못한 것 같다.
이렇게 볼 때, 그가 속임수의 결과로, 도피해서.. 고생한 것은 사실이었다.
▲야곱이 20년 동안 <자기 죗값을 치르는 고생을 했다> 하더라도/ 그것을 인정하더라도
그것만으로 설명하기에는, 야곱의 인생이 너무 잘 풀렸다는 것이다.
툭 까놓고 말하자면, <속이는 자 야곱이 평생 불행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야곱은 세상적으로 봐도, 성공한 사람이고,
신앙적으로 봐도, 그는 점점 성숙해 간 사람이다.
그러니까 야곱의 삶을 보고 평가할 때,
그가 저지른 부정직과 잘못으로 실타래를 풀어가는 것은... 핵심을 놓치고 있다.
하나님과 야곱의 언약적 관점에서 야곱의 삶을 설명해야... 핵심을 붙잡는 것이다. (2막에서 설명함)
결론적 관점에서 이 딜레마를 설명하자면,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고 구원하실 때는,
꾀가 많고/속이기 잘하고/자기 열심으로 사는...
인격적으로 부족하고 문제점 투성이인 우리들을... 은혜로 부르시고 축복하신다.
그것이 <얍복강 이전의 야곱>같은 삶이다. 우리도 야곱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은혜로 불러서 축복한 야곱을, 그냥 내버려 두시지 않으시고
얍복강에서 완전한 항복을 받아내신다.
그 후로부터, 점점 인격적으로 성숙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다듬고/ 만들어 가신다.
그 큰 계기가 얍복강 강에서 이루어지는데...
◑야곱과 같은 오늘날의 우리들
▲예수 믿는 사람들 가운데, 영악한 사람들이 더 많을 수 있다.
회사에서나, 군대에서나
사람의 인격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곳에 가면,
어쩐지 예수 믿는 사람들 가운데, 영악한 사람이 많다고 한다.
(기준도 불분명하고, 확인할 수도 없는 불확실한 추정이지만)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유는 이렇다.
사람들 가운데, 야곱처럼, 야심만만하고, 어떻게 해서든지 성공해야 한다는...
그래서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회사에서는 승진해야 하며,
그렇게 성공지향적/축복지향적으로 살다보면... 야곱처럼 남을 잘 속이게 된다.
사실 인간성 좋은 호인은.. 아무 성취도 못하는 면이 있다.
그런데 이런 성격 좋은 사람/호인은.. 예수도 안 믿는다. '호인'이라는 자기 성격에 만족하고 사는 것이다.
야곱이 장자권의 축복을 간절히 바래서 형을 속였던 것처럼
오늘날의 크리스천들도.. 성공을 간절히 바래서
성공을 주시는 하나님을 간절히 믿고 섬기는가 하면,
야곱처럼 세상에서 간사하게 살 수도 있다는 것이다. 오직 성공(장자의 축복)만을 위해서 Go! 한다.
성공을 바라지 않는 사람(자연인)은, 사실 교회도 간절히 다니지 않는다.
그러나 성공을 간절히 바라는 사람은, 하나님도 교회도 간절히 믿고 다닌다.
새벽기도, 철야기도... 각종 헌금생활에... 교회 설거지도 마다하지 않는다.
(타종교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절에 가서 설거지도 한다.)
▲우리는 그런 <종교적 열심>을, 무조건 평가절하만 할 수 없고/ 해서도 안 된다.
기복주의적 신앙을... 무조건 욕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저(설교자)도 과거에는, 그런 기복주의적 열심이 중요하지 않다고 평가절하 했었다.
또한 세상적 축복 역시 중요하지 않다고 여겼던 적이 있었다.
물론 그것이 ‘전부’라는 것은 아니다.
영생과 비교해 볼 때.., 그것이 그토록 목숨걸만한 중요한 것은 물론 아니다.
그러나 그것을 평가절하 하지는 말자는 것이다.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것
-돈을 많이 버는 것
-좋은 직장에 들어가는 것
이것들이 ‘전부’는 아니지만, 또한 ‘아무 것도 아닌 것’은 아니다.
그런 것들을 얻기 위한 ‘기복주의적 신앙’ 또한 ‘세상에서 열심히 사는 것’
그 열심히 도가 지나쳐서 형을 속이고, 아버지를 속이기까지 하지만(문제지만)
그런 열심을... 평가절하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에서와 비교해 볼 때,
에서는.. 그저 호탕하고 사람이 좋기만 한... 그러나 어쩌면 아무 의욕도 없는
장자권도 팥죽 한 그릇에 기분 좋게 팔아버릴 수 있는
그런 사람으로 살아갈 수는.. 우리가 없다는 것이다.
▲놀랍게도 하나님은, 야곱의 그런 (속이는) 모습에도 불구하고, 야곱을 축복하신다.
이게 하나님의 은혜다.
기독교인들 중에도, 성공이라는 목표를 향해서,
남들을 속이는 일까지도 마다하지 않는 교인들이 많다.
그래서 교인들의 성품은, 에서와 야곱 두 사람을 놓고 볼 때
에서보다 야곱 쪽에 훨씬 더 가깝다. 우리는 모두 ‘야곱 과’인 것이다. *영어과/수학과 할 때의 '과'
에서는 세상적 관점에서 보면 멋있는 인간이다. 신앙심은 없지만...
몸에 털도 많고, 사냥도 잘하는.. 요즘 말로 하면 ‘터프 가이’다.
(야곱은 몸도 매끈매끈하고, 엄마나 졸졸 따라다니는 사람이다.)
에서가 얼마나 호탕한지, 동생이 장자의 명분을 팔라고 하니까
<팥죽 한 그릇에 그냥 줘 버린다.> 화끈하다. 쪼잔하지 않다.
20년이 지나서 4백 명을 거느리고 동생 야곱을 만났을 때에도
순간적으로 20년 전의 원한을 다 잊어버린다.
그리고 동생을 호위해 주겠다고 발 벗고 나선다.
요즘 식으로 하면, 술 한 잔 먹고, 모든 것을 해결해 버리는 사람 같다.
세속적으로 보면, 에서가 훨씬 멋있다. 단, 신앙심은 부족하지만...
▲예수 믿는 사람이 착하면.. 이상하게 보이는 세상
어떤 전도사가, 교회개척을 하다가 힘들어서, 부업으로 택시 운전을 했다.
택시 회사에서 그의 언행심사가, 다른 택시기사들과 뭐가 달라도 달랐다.
그러니까 그 회사 사장이, 그 신참 택시 기사(전도사)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여보슈, 자네는 예수 믿으면서도 왜 그리 착한거지?’
일부 세상 사람들 눈에는,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할 때 그 이미지가
굉장히 성공지향적이고, 그러기 위해 부지런히 뛰어다니고,
약삭빠르고, 뭔가 성취해 내려고 몸부림치는 열심장이들인데,
그 전도사는 뭔가 느리고, 욕심도 없고, 야망도 없게 보였던 모양이다...
야곱처럼, 속임수도 적당하게 부릴 줄 알고, 꾀가 많고, 영리한 그런 교인들,
그런 이기적인 ‘야곱들’도 ... 하나님은 축복하신다.
그런데 이게 전부가 아니다.
그것만 갖고는 하나님의 축복을 온전히 받기는 어렵다...
◑2막 : ‘속이는 자’ 야곱을, 점점 변화시켜 가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꾀와 속임수의 야곱에게 개입하셔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숙하도록 다루어 가신다.
하나님은 꾀와 속임수의 야곱에도 불구하고, 그를 부르시고 축복하셨지만,
이제 점점 그를 ‘성숙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셨다.
그냥 제멋대로 살도록 내버려 두시면서, 계속 그를 축복하신 것은... 결코 아니다.
▲한국교회도 이와 비슷하다고 본다. 우리도 야곱처럼.. 먼저 축복부터 받았다.
한국과 한국교회는, 2차대전 이후,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만큼 성장해 왔다.
주식 상장한 CEO의 40%가 기독교인이라고 한다.
국회의원 중에 130명이 개신교인이다.
그렇게 특출하게 성공한 사람들 말고도, 보통 사람들도
물질적으로/세상적으로 대부분 다 중산층 이상으로 축복을 받았는데,
문제는, (야곱처럼) 기독교 신앙의 성숙에는 아직 들어가지 못했다는 것이다.
한국의 기독교가 625이후 지난 60년간, 그렇게 지내 왔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과 깊은 교제, 거기서 나오는 진정한 사랑과 화평,
자기 인격이 하나님 형상을 닮기.., 이런 점은 아직 미숙하다는 것이다.
단 한 가지, 외적인 축복만 받고 지금까지 지내왔다.
▲외적 축복은 받았으나, 내적 성숙은 아직 이루지 못했다.
노골적으로 말하면,
장년층 교인을 두고 볼 때, 그들은 직장은 번듯하게 갖고 있다.
집도 그럴듯하게 장만하고 있으며, 자동차도 다른 나라에 비해 괜찮게 타고 다닌다.
해외에서 보면, 서울의 한국 교인들은... 정말 외적으로 나이스하다.
그런데 내적으로 보면..,
부부사이가 불안정하다. 그래서 가정에 행복이 없다.
위로 부모와의 관계도... 원활하지 못한 가정들이 많고,
아래로 자녀와의 관계도... 사춘기를 지나면서 홍역을 치르는 가정들이 많다.
모두 <신앙의 내면화/성숙> 되지 못한데서 나오는... 자연적 결과이다.
야곱의 삶에 빗대어 말하자면
한 마디로, <얍복강의 체험>을 거치지 못한 교인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얍복강의 체험이란.. 야곱의 생애가 결정적으로 뒤바뀌는 순간이었다.
(이것을 회심conversion이라고 말할 수 있으나, 그런 신학적 토의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얍복강에서의 야곱
야곱이 밤중에 캄캄한 강가에서 기도하는데, 그 으스스한 장소에서,
정체불명의 어떤 사람이 자기를 죽이려고 달려들었다. 주위에 아무도 없는데...
지금처럼 무슨 가로등이나 보안등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아마 야곱은 ‘에서가 보낸 자객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쉬웠을 것이다.
어쨌든 야곱은 그와 씨름을 하기 시작한다.
이것은 이종격투기처럼, 치열하고도 생사를 건 사투였을 것이다.
창32:25, 그 사람이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야곱의 환도뼈를 치매
야곱은 정말 지독한 사람/독종이었다.
오직 악으로, 깡으로 버틴 것이다. 밤새도록 사투를 벌인 싸움에서 밀리지 않았다.
(물론 주님이 져 주셨겠지만, 어쨌든 야곱의 투지는 대단한 것이었다.
그의 살아온 방식이 그대로 이 씨름에 녹아 있었다.)
환도뼈를 다친 야곱은 더욱 결사적으로, 이제 두 팔로 잡고 그를 놔 주지 않는다.
그와 밤새 씨름하던 야곱은, 점점 상대를 인식하게 되었는데,
그가 하나님(의 현현 이거나, 하나님의 사자)이심을 깨달았다.
그리고는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32:26
하면서 물고 늘어진다.
▲지금까지 자기 꾀와 방법으로 살아온 것에 대한 180도 전환
얍복강 이전까지 야곱은, 자기 꾀와/ 속임수와/ 열심이 점철된 삶을 살아왔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이제 에서의 복수 앞에
한 순간에 물거품처럼 사라질 위기에 처한 것이다.
‘자기 꾀와/속임수와/열심의 패배’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 제법 거부가 되고, 아들 딸 많이 놓고 잘 살아온 것 같았는데,
그것이 사상누각 이었음을, 언제나 일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야곱은, 그 밤에, 얍복강 가에서 철저하게 깨닫게 되었다.
이제 자기가 사는 길은 <하나님의 축복 없이는>
도저히 자기 힘으로 제대로 살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철저히 주님께 ‘천부여 의지 없어서’ 항복하고, 백기들고 투항했던 것이다.
그것은 ‘자기 꾀/속임수/열심의 항복’을 뜻했다.
그리고 ‘주님의 축복’이.. 진정 자신의 미래요, 희망임을 .. 비로소 깨달았던 것이다.
▲오늘 한국 교회도 마찬가지다.
많은 성도들이 ‘자기 꾀/속임수/열심’으로 오늘까지 부지런히 살아왔다.
그래서 야곱처럼, 제법 물질적으로/세상적으로 축복도 받았다.
그러나 그 결과, 야곱처럼, 가족간에 관계가 심각하게 깨어지기도 하고,
그렇게 애써 평생 일구었던 자기 텃밭 전체가, 일순간에 없어질 위기에 처하기도 한다.
그 세상적/물질적 축복은.. 영원히 견고하거나 안전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마치 얍복강의 야곱처럼.. 우리는 심히 불안한 하루하루를 살고 있는 것이다.
◑낯선 밤 중에 씨름을 걸어오시는 하나님
▲싸움을 걸어오시는 하나님
먼저 은혜로 야곱을 축복하신 하나님은,
때가 되자.. (그가 진짜 가나안/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서 살려고 하자)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시비를 걸어오신다. 싸움을 걸어오신다.
‘너 그렇게 살면 안 돼!, 너 그렇게 산 결과가 이거야!’
때가 되자 어느 날, 하나님은 기습적으로, 야곱의 삶 가운데 싸움을 걸어오신다.
그리고 야곱의 항복을 받아내신다. ‘내 꾀/내 속임수/내 열심으로는 안 됩니다!’
‘천부여 의지 없어서... 저는 주님이 축복하지 않으시면, 못 살아갑니다!’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32:26
하면서 물고 늘어지게 만드신다.
▲오늘 우리가 ‘낯선 적으로 찾아오신 하나님’을 만나서 우왕좌왕하고 있다.
이제까지 하나님은 .. 그 은혜로 축복만 주시던 좋으신 하나님이셨다.
내 허물과 꾀가 많지만 .. 어쨌든 하나님은 은혜로 돌보시고, 축복하신다.
그런데 내가 가나안(하나님의 나라)의 삶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때가 되면
하나님이 기습적으로, 낯선 싸움꾼으로서 나를 찾아오신다. 싸움을 걸어오신다.
그래서 내 환도뼈가 부러지는 듯한, 지울 수 없는 상처도 남기신다.
그러나 내가 완전히 항복하는 순간,
내가 주님의 축복이 없이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음을 고백하는 순간
그 낯선 손님, 하나님은.. 비로소 내게 져 주시며, 나를 축복해 주신다.
▲오늘날 성도인 나도 마찬가지다.
욥도 그랬다.
이전에 제가 주님을 귀로 듣기만 했다가, 이제 제 눈으로 뵙게 되었습니다. 욥42:5
욥은 하나님이 기습적인 공격을 받고, 완전히 <하나님 중심 신앙>으로 교체되었다.
자기 삶을 리모델링 했다.
야곱도 얍복 강의 그 항복 이후로부터는,
주님의 임재/동행을 체험하면서,
자기 꾀/속임수/열심이 아니라
주님의 도우심을 의지하면서 살아가게 되는.. 180도 전환이 자기 삶에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 일환으로, 신앙의 인격적/도덕적 성숙도 일어난다.
그러면서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도 점차로 회복된다. (속이고 빼앗지 않고, 겸손하니까)
그렇게 해서 하나님은, 야곱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어 가신 것이다.
그 과정에 ‘얍복강의 혈투/항복/환도뼈의 부러짐/깨어짐’이 있었지만
어쨌든 하나님은..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을.. 주도적으로 만들어서 쓰신다.
결코 제 멋대로/자기 꾀로 살도록.. 내버려두시지 않으신다.. 그가 언약백성이라면!
▲여러분, 밤중에 낯선 모습으로 찾아오시는 하나님은
①여러분의 배우자가 그럴 수 있다.
결혼하면 배우자는 서로에게 ‘인격 연마용’으로 하나님이 내게 붙여주신 씨름꾼이다.
평생 그와 싸움을 통해서, 서로가 점점 성화되면서,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간다.
지금 나를 죽이려고 덤벼드는 그 남편/아내가, 달리 보면,
나의 더러운 성격을 고치기 원하시고, 내 고집의 항복을 받아내기 원하시는
하나님이 내게 씨름하라고 붙여주신 사자인 것이다.
②고질병 때문에 고생하시는가?
그 병과 씨름하며 애를 쓰다가 수 십 년을 보냈는데,
어느 날 달리 보니, 그 병은, 하나님이 나를 축복하기 위해 보내신, 하나님의 사자였다.
그 병 때문에, 내가 성숙되었고, 내가 하나님의 성도로써, 인격적 성숙을 이룰 수 있었다.
③사업과 자녀도 마찬가지다.
어느 날 하나님이 그것들을 통해서, 내게 씨름을 걸어오신다.
나의 항복을 받아내신다. 그리고 주님만을 붙들고 사는 인생으로 거듭나게 하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 먼저 우리를 넘어뜨리신다>는 말이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온전히 자기 백성으로 세우기 위해서,
나에게 씨름을 걸어오시는 것이다. 먼저 나를 깨뜨리고/ 넘어뜨리고/ 부러뜨리는 것이다.
야곱이 처음에는 은혜로 그저 행복하게 별탈없이 잘 살았지만 (얍복강 이전까지)
그가 언약 백성으로서 가나안의 삶의 본격적으로 시작하려고 할 때
하나님은 그를 넘어뜨리셨다. 환도뼈를 부러뜨리셨다.
완전히 새사람으로 만들어주셨다.
그의 부족한 인격적인 면들을 본격적으로 수술해서.. 성화의 길을 가도록 섭리하셨다.
저와 여러분이 언약백성이라면, 우리도 예외가 아니다. 그 길을 반드시 가게 되어 있다.
▲우리는 싸움을 걸어오시는 하나님을.. 어디서 진짜로 만나는가?
멀리 있지 않다. 내 아내가 ... 어느 날 씨름하던 손을 잠시 놓고 보니 ... '하나님의 얼굴'이다.(브니엘)
내 사업관계의 원수가 ... 어느 날 그와 싸움을 하던 손을 잠시 놓고 보니 ...
나의 모난 인격을 다듬기 위해서 특별히 내게 붙여주신 ... '하나님의 얼굴'이었다.
내 자녀의 반항하는 모습이 .. 내가 하나님께 반항하는 모습 그대로였다.
그래서 이전에 회개하지 않았던 내 내면들을 하나씩 회개하면서 .. (내 자녀 통해 비디오로 보니까)
내가 점점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화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간섭으로!
▲마치는 말
지금 한국교회 안에, 교인들 가정에
‘밤중에 낯선 적의 모습으로 찾아오신 하나님’ 때문에 홍역들을 치르고 있다.
이것을 무서워할 필요 없다. 우리를 진짜로 죽이시려는 싸움이 아니라,
정말 변하지 않는 내 고집/내 인격을 완전히 수술해서 (환도뼈를 꺾어서)
내가 정말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그릇으로.. 주님이 빚어가시는 과정인 것이다.
처음에는 은혜로.. 그래서 창28장에 벧엘에서 달콤한 약속도 해 주셨고,
그 후에 하란 땅에 가서 자기 꾀와 속임수와 열심을 통해 .. 부자가 되게 해 주셨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간섭해 들어오신다.
그냥 내버려 주시지 않으신다.
이렇게 하나님이 ‘한 밤 중에 찾아오는 적’으로 나를 공격해 들어오실 때는
일시적으로 <하나님이 나의 원수로/적으로 느껴진다.>
하나님 때문에 죽고, 망하는 것 같다. 괜히 기독교 신앙을 가진 것 같기도 하다.
이 때는 하나님과 씨름wrestle하지 말고, 하나님 품에 안겨야nestle 한다.
전적으로 항복하는 것이다.
그 품 안에서 행복과 즐거움을 발견해 나가는 것이다.
절대 하나님과 씨름을 길게 끌지 마시라!
완전히 항복하고, 변화된 새로운 성화의 삶을 살기 시작하면서
나는 하나님 나라에서 2막의 새 인생을 시작하는 것이다...
▲야곱과 에서의 차이
내가 야곱은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노라 롬9;13
하나님께서는 에서를 향한 자신의 심판과
야곱을 향한 자신의 사랑을 어떻게 나타내셨는가?
하나님은, 에서는 자기 마음대로 살도록 내버려 두셨다.
거룩한 삶에 대한 간섭도 전혀 없으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야곱을 거의 매일 죽을 만큼 치셨다.
우리를 거룩함으로 데려오시기 위한 사랑의 훈련, 하나님의 바로잡으심이다.
만약 여러분의 삶 속에 성결하도록 역사하시는 하나님이 역사가 없다면
그것은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냥 내버려 두시는 것이다. 남의 자식이니까! ▣ 물질과 성공
'분류 없음 > 2009'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자기가 죽어야 성령이 역사하신다 1984 (0) | 2009.07.14 |
---|---|
성찬과 유월절 1981 (0) | 2009.07.12 |
말씀의 씨앗을 뿌리는 자 1977 (0) | 2009.07.10 |
베드로, 진정한 믿음을 보여주다 1976 (0) | 2009.07.09 |
주의 손이 나와 함께 하려면 1975 (0) | 2009.07.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