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찬과 유월절 출12:1~14 09.06.14.설교녹취, 정리
*원제목 :유월절과 성찬
저(편집자)도 아직 잘 모르는 영역이지만, 시일을 두고서 조금씩 정리해 나가려고 합니다.
◑1. 성찬에 있어서 떡과 포도주와.. 예수님의 살과 피와의 관계
▲1. 천주교의 화체설 (몸體으로 변化한다는 설)
성찬식을 할 때, 사제가 떡과 포도주를 들고 기도할 때
그 떡과 포도주가 .. 예수님의 살과 피로 변화한다는 주장.
그래서 천주교에서, 성찬은 굉장한 의미를 지닌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자기가 지금 받는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다.
천주교에서 예배를 ‘미사’라고 하는데, ‘성찬’을 가리키는 말이다.
성찬식 자체가, 그들에게는 예배인 것이다.
개신교 쪽에서는, 이 화체설을.. 비약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
▲2. 상징설
성찬식의 떡과 포도주는, 예수님의 살과 피를 <상징>한다는 주장.
종교개혁자 중에 쯔윙글리가 이 설을 주장했다.
한국 개신교에 이 설이 많이 유포되어 있는데,
그 이유는, 초기 선교사들이 대부분 이 견해를 가르쳤던 것으로 보인다.
상징설은, 떡과 잔이 그저 ‘상징’에 불과하니까
떡을 보면서.. 예수님의 살을 떠올려 생각하고,
잔을 보면서.. 예수님의 피를 떠올려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떡과 잔에 신비적 의미를 거의 부여하지 않는다. ‘생각나게 하는 도구’일 뿐이다.
▲3. 영적 임재설
미국에서 20세기 초반에 ‘예배갱신 운동’이 일어나면서
‘칼빈의 예배 신학’에 대해 관심을 가지면서,
성찬에 대한 칼빈 선생의 주장을 또한 연구해 보았다.
그 때 칼빈은 ‘상징설’이 아니라,
<떡과 포도주 속에 예수님이 영적으로 임재하신다>는 ‘영적 임재설’을
가졌던 것으로 연구되었다.
<화체설>보다는 약하지만, 단순한 <상징설>보다는
성찬식의 떡과 잔에 대해, 더욱 더 무거운 무게를 두고 있다.
성찬식을 받을 때, 그 떡과 잔에, 실제로 예수님이 영적으로 (아마 살과 피로)
임재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찬을 믿음으로 받으면, 그 사람 속에 주님이 임(재)하시지만,
믿음이 없이 그냥 성찬을 받으면, 그 떡과 잔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입장이다.
저는 칼빈의 ‘영적 임재설’이 성경적이라고 본다.
우리가 믿음으로 성찬을 받을 때, 떡과 포도주 속에
예수님이 영적으로 임재하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을.. 저는 믿는다.
◑2. 성찬 예식에 관하여
▲1. 성찬상을 흰 천으로 덮는 것은.. 옳지 않다.
성찬식을 할 때, 흰 천으로 성찬상을 미리 덮어둔다.
그리고 성찬식이 시작될 때, 그 흰천을 접어서 개어두고..
성찬식이 끝나면, 다시 그 흰천으로 성찬상을 덮어둔다.
누가 가르쳐 주었는지 모르지만, 이런 전통이 우리에게 있다.
그래서 누구도 의문을 달지 않고, 흰천으로 성찬상을 덮었다가, 열었다가, 다시 덮는다.
역사적으로 보면, 초대교회는 성찬상을 흰천으로 덮지 않았다고 본다.
중세교회도, 종교개혁 할 때까지, 성찬상을 흰천으로 덮은 적이 없었다.
성찬상을 흰천으로 제일 먼저 덮은 사람은 칼빈이다.
왜 덮었느냐 하면,
당시 교인들은, 중세교회 영향권 아래서
성찬을 너무 신비롭게/미신적으로
‘야, 저게 이제 예수님의 살과 피로 변하는구나!’ 이런 식으로 생각했다.
너무 미신적으로/신비롭게 생각하니까
아예 교인들이 성찬상을 보지 못하도록, 관심을 끌지 못하도록
성찬상을 흰천으로 덮어버린 것이다.
지금은 이 떡과 포도주를 그렇게 미신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지금은 ‘성찬상을 덮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외국의 교회들은, 예배갱신운동을 하면서
성찬상을 흰천으로 덮던 칼빈의 전통을 다 없애버렸다. 그래서 이제는 덮지 않는다.
지금 성찬할 때, 흰천으로 덮는 교회는.. 외국에 거의 없다고 본다.
그럴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혹시나 그 사이에 먼지가 앉을까봐 흰천으로 덮어두는 것이라면 모를까)
어쨌든 예식에 있어서 한 순서, 한 순서는 중요하고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 의미도 없는 ‘흰천 덮기’는 .. 안 덮는 것이 좋다.
▲2. 성찬식에 참여하는 우리의 마음
전통적으로 우리는, 성찬식에 참여할 때는.. 언제나 슬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눈물을 흘려야 성찬식에서 은혜를 받았다’고 생각한다.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생각하면서, 슬퍼하고 눈물을 흘리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성경을 연구해 보면,
초대교회 성도들은, 성찬을 기쁨과/감사와/축제로 참여했다는 사실을 본다.
성찬식을 헬라어로 ‘유카리스트’라고 하는데,
이 말 자체가 ‘감사/축제’란 뜻이다.
성찬을,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금요일에 하지 않고 (슬픈 날)
부활하신 주일날에 행했다. (기쁜 날, 승리한 날)
안식 후 첫날(주일)에 우리가 떡을 떼려하여 모였더니... 행20:7
주일날에, 부활하신 주님/ 승리하신 주님을 생각하며
기쁨과 구원의 감격으로 .. 성찬에 참여했던 것이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행2:46
성찬식 할 때, 슬퍼하는 것은.. 귀한 일이다. 나쁜 것이 아니다.
그러나 부활을 생각하며, 기쁨과 축제로도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을
꼭 기억해야 하겠다.
▲3. 떡을 반드시 찢는(떼는) 것이 좋다.
여러분, 성찬식 때, 과거에 보면
여선교회에서 미리 떡을 잘게 찢어서 준비했다.
그래야 성찬식이 원활하게 잘 진행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처음으로 성찬식을 행하신 것을 보면,
<떡을 떼서/찢어서> 제자들에게 주셨다.
마26:26,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사도 바울도 떡을 찢었다.
행27:35, 떡을 가져다가 모든 사람 앞에서 하나님께 축사하고 떼어 먹기를 시작하매
그래서 이렇게 찢는 의식을.. fraction이라고 부른다.
예전의 한 의식으로.. 떡을 찢고, 잔을 나누는 형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가 fraction이라고 부르고, 정했다. 찢기/떼기/분병/분잔이다.
물론 당시의 떡(빵)은, 영화에서 보듯이, 피자판처럼 둥글고 크고 넓적했다.
한 사람이 그 떡 한 개를 다 먹을 수 없었고,
여러 사람이 떡 한 개를 떼서 먹을 수밖에 없었다.
피자는 칼 같은 것으로 나누었지만,
당시 사람들은, 손으로 떡을 찢어서(떼서) 나누었다.
오늘은 우리가 그런 유대식 둥근 빵을 가지고 성찬을 하는 것이 아니므로
굳이 떡을 찢을 필요가 없다.
그러나 떡을 찢는 것은.. 예수님의 몸이 깨어짐/찢어짐을 의미한다.
그냥 먹기 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깊은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집례자가 떡을 들어서 찢는 것이 좋다.
일일이 수 백~ 수 천 명의 성도들이 모두 다 찢으면 너무 시간이 걸리니까
대표로 집례자가 떡을 찢는 것이다.
‘잔’도 정말 예수님과 12제자의 성찬식을 복원하자면
한 잔(큰 그릇 하나)으로 돌려가면서 나눠 마셨다고 본다.
그 분들이 각각의 잔을 가지고, 성찬식을 한 것은 아니었다고 본다.
그래서 오늘날 성찬식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
큰 양푼 같은데 포도즙을 준비해서
모든 참여자들이 돌아가면서 마시는 성찬식을 가지는 분들도 있는데,
오늘날은 위생상 그런 것을 거부하는 분위기다.
그래서 천주교는 아마 사제가 ‘잔’을 대표로 혼자서만 마시고
신도들은 ‘떡’만 받는 것으로 알고 있다.
어떤 교회에 가면, 한 떡으로 떼고
한 잔에 자기가 뗀 떡을 일일이 찍어서
자기 입에 넣는다.
굳이 이렇게 하는 이유는,
‘한 떡’과 ‘한 잔’에.. 깊은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주님의 몸 된 교회가 <하나>이며,
모든 지체가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성찬을 하면서, 한 잔과 한 떡을 같이 나누면서
모든 교인들이 <한 몸>임을 스스로 다짐하고, 천명하는 것이다.
어쨌든 미리 떡과 잔을 여선교회에서 나눠서 준비하는 것은
형편상 어쩔 수 없어서 그렇게 하는 것이지만
원래 성찬식의 의미를 축소할 수 있으므로..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3. 성찬과 유월절 만찬의 관계
예수님이 성찬식을 제일 처음 행하시고, 제정하는 것은
못 박히시기 전날 밤에, 마가요한의 다락방에서이다.
그런데 이날 밤은, 유월절 만찬을 잡수시던 밤이었다.
즉 유월절 만찬을 가지시고, 성찬식을 거행하셨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라, 의미가 있다.
유월절과 성찬식은.. 근본적으로 의미가 동일하다는 것이다.
유월절이 성찬식을 통해 완성되는 것이다.
▲1. 유월절은 구원받은 은혜의 날
유월절의 의미는,
이스라엘이 출애굽한 것을 기념하는 절기다.
양을 잡아서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발랐는데,
장자를 치는 천사가, 그 피를 보고는, 그 집을 넘어갔다.
유월절은 한자어로.. ‘넘어갔다’는 의미고,
영어로 유월절passover도.. ‘넘어서 지나갔다’는 뜻이다.
그날 밤에, 히브리인들은, 유월절을 지키면서, 유월절 음식을 먹었다.
유월절 어린양은.. 예수님을 예표한다.
유월절 양이 죽어야.. 출애굽 역사가 일어났듯이
예수 그리스도가 죽어 피를 흘려야..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기념하기 위해서
유월절을 지키며 무교병과 양고기를 먹었듯이
우리는 주님의 구원의 은혜를 기념하기 위하여
성찬을 행하며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성찬식은
새 유월절이며, 유월절의 완성인 것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월절을 행하며.. 출애굽 은혜를 기억했듯이
오늘날 우리는 성찬식을 행하면서..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고 기념하는 것이다.
성찬식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대한 기념식’인 셈이다.
그러므로 성찬에 참여할 때마다, 나를 구원하신 구원의 은혜를 새롭게 생각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노예생활을 기억했듯이
우리들도 과거에 구원받기 전에는, 마귀에게 종살이하고 살았었다.
그렇게 종노릇하다가, 죽으면 마귀에게 이끌려 지옥에 갈 운명이었다.
거기서 구원받았으니, 얼마나 크고 고마운 은혜인가!
우리가 쉽게 잊어버리지만, 너무 쉽게 잊어버릴 은혜가 아닌 것이다.
▲2.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약의 공동체>됨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유월절을 지키지 않는 자는.. 이스라엘 회중에서 끊어지리라고 계속 말씀하셨다.
왜 그런가 하면,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약 공동체’임을 확인하는 예식이기 때문에 그렇다.
즉 <전체가 하나됨>을 확인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첫 번째 성찬식을 행하시면서 (사도바울의 증거에 의하면)
이것은 ‘피로 세운 새언약’이라고 말씀하셨다.
고전11:25,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구약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맺었던 모든 언약이.. 사실상 실패했다.
인간 편에서 그 언약(약속)의 내용을 제대로 준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님은 이제 마지막으로 새언약을 새로 세우신다.
다시는 실패하지 않는, 모든 언약을 완성하는 최종적 언약이다.
그 언약은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에서> 세워진다. *예수님이 인간의 대표
예수님이 언약의 당사자가 되시니.. 실패하지 않는 언약이 되었다.
이 언약을 세우시고,
그 언약의 표로.. 성찬을 제정하신 것이다.
우리는 성찬을 통해서.. 하나님의 언약 백성임을 확인하게 된다.
성찬식을 먹을 때..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는 것이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에 맺은 언약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주시려는 약속/언약도.. 우리의 것이 되고,
하나님의 언약 속에 있는 모든 축복이.. 우리의 것이 되는 것이다.
세례 역시 성찬과 더불어 중요한/비슷한 의미를 갖고 있다.
세례를 받아야.. 언약 공동체 안으로 비로소 들어오는 것이다.
그리고 성찬을 행함으로써.. 그 언약 공동체에 소속된 것을 확인하는 것이다.
♬당신은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는 축복의 통로♪
◑4. 성찬은.. '먹는 데' 큰 의미가 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요6:54~55
우리가 오늘날 매일 밥을 먹고, 물을 마시지만
그 밥과 물이.. 우리를 <영생>하도록 인도하지는 않는다.
또한 오늘 내가 <영생>의 삶을 사는 것도 아니다. 밥과 물을 먹는 것이 그렇다.
그런데 영생하도록 인도하는 양식이 있는데, 예수님의 살과 피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요6:55 라고 하셨다.
오늘 내가 영생의 삶을 살도록 하시며, 나중에 영원히 나를 영생으로 인도하신다. 주님의 살과 피가!
즉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고는,
어떤 의미에서 영생을 얻지 못할 수도 있다는 데서.. 성찬의 중대성이 있다.
칼빈은 성찬을 ‘예수님의 영적 임재’로 보았다.
진정한 믿음으로 성찬을 받는 사람은,
그 시간에 예수님이 살과 피로 임하실 수도 있다는 것이다.
여러분, ‘먹는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가?
그 음식이 내 몸 속으로 들어온다는 뜻이다.
즉 예수님의 살과 피의 임재가 내 속으로 들어와서
나에게 힘이 되고, 내 몸과 구분할 수 없는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이 성찬을 ‘먹으라’고 하셨다.
성찬은 특별히 ‘먹는 것’에 그 절정이 있다.
만약 단순한 기념이요, 상징이라면.. 그냥 쳐다보기만 해도 된다.
생각만으로 예수님의 살과 피를 느끼면 된다.
그러나 ‘먹으라’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먹을 때, 실제로 주님이 떡과 잔을 통해서, 우리 속에 임재하시겠다는 것이다.
이런 믿음으로 성찬을 ‘먹을 때’
실제로 주님이 더욱 강력하게 내 속에서 역사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이 말씀하셨다.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요6:57
주님을 먹고 마실 때, 주님이 내 속에 임하셔서, 내게 힘과 용기를 주신다.
실제로 주님이 내 몸과 혼연일체가 되신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능력 있게 승리하며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성찬식과 애찬식의 구분이 나와 있으니, 자세히 읽어봅시다. ▣ 부활, 추수, 성탄, 성찬, 장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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