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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2009

고통은 현실이 아니고 느낌이다

LNCK 2009. 7. 27. 19:25

 

◈고통은 현실이 아니고 느낌이다      시88:1~18       -09.06.30.설교스크랩, 출처-

 

▲불교에서 ‘6도 윤회’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사람이 지금의 생애에서 쌓은 업에 따라서 내세에 다시 태어날 때에

6가지 다른 세상으로 나뉘어져서 태어나게 된다는 것이에요.

 

⑥그래서 이 세상에서 아주아주 악하게 산 경우에

제일 고통스러운 지옥도에 떨어진다고 합니다. 지옥도.

지옥도는 뭐니 뭐니 해도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

여러분 당장에 참을 수 없는 고통은 ‘육체적인 고통’ 아닙니까?

거기 가면, 항상 육체적인 고통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쉽게 설명하면, 그곳은 계속 고문/육체적 고통을 받는 곳입니다.

 

⑤그 지옥도 다음이 아귀도입니다. 아귀도.

아귀도는 굶주림의 고통이 있습니다.

육체적인 찢어지는 그런 아픔과 고통은 없을지라도

아귀도에서는 굶주림의 고통이 있다. 보통 고통스러운 게 또 아니겠지요.

 

④그 다음에 축생도가 있어요.

이 세상에서 잘 못살게 되면 동물의 세계, 그야말로 동물의 왕국에 태어나게 됩니다.

 

그 동물의 왕국이라는 것은 단순히 아프리카에 사는 동물들뿐만 아니라

곤충이나 뱀, 이런 것까지 다 포함해서, 파충류나 곤충류 다 포함해서

이런 짐승의 세계에 태어나게 되고

 

③그 다음에 아수라도가 있습니다. 아수라.

아수라도는 어떤 세상이냐 하면.

서로가 서로를 비난하는 그런 세상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너무 비판하고 자기가 중심이 돼서

모든 타인의 잘못을 지적하고 살았던 사람들이 떨어지는 곳이 아수라도에요.

하루도 편안할 날이 없이 서로 다툼을 하게 되는 그런.

 

②그 다음에 인도. 사람으로서 태어나는.

지금과 같은 사람으로 태어나는 세상이 있고.

 

①그리고 마지막으로 천도. 행복이 두루두루 갖추어져있는 하늘의 세계에 태어난다.

그러니까 우리가 온 이 세상을 아주 잘 살면 선행을 하고 공덕을 쌓고 이렇게 살면

천상의 세계에 태어나는데

 

특징은 이 6도의 내세는 영원한 게 없고

그 세상에서 또 지옥에 갔더라도 거기서 잘 살면

육체적 고통이 있지만 잘 참고 잘 살면 다시 천도로 태어날 수도 있고

인도로 태어날 수도 있고 사람의 세상으로 태어날 수도 있고 하다는 것이

6도 윤회입니다.

 

오늘 시편 88편 말씀은, 위의 이야기에 비유하자면 ‘지옥도’에 해당됩니다.

이 시편의 앞에 ‘마할랏르안놋’은 ‘질병 중에, 고통 중에’ 라는 뜻이에요.

 

이 비탄시는 여느 다른 비탄시와 다른 점이 있다면

선취적 감사신앙이 전혀 표현되지 않고 있어요.

 

‘선취적 감사신앙’이 뭐예요?

고통스러운 현실이 있더라도 그 고통을 호소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노래하다가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헤세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믿으면서

조만간 이 어려움이 극복이 되고,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현실이 되어서

내게 기쁨이 넘치는 순간이 오려니 라는 선취,

미리 이루는 그런 확신 안에서 감사를 드리게 되는데...

 

이 시88편은, 그런 감사도 없이, 그냥 그대로 비탄으로 끝나버리고 말아요.

마치 지옥도 같은 고통에 대한 묘사가, 그냥 그대로 끝나버리고 맙니다.

 

솔로몬시대 때 씌어졌다고 여겨지는데

도대체 이 사람, 어떤 고통이 있었길래 이렇게 썼으며

또 이 시편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그럼 뭐냐? ... 라는 것이에요.

 

▲시88편이 교훈하는 바는?

너무너무 괴로워하는 모습으로

이 시의 내용이 극심한 고난으로 인한 고통을 호소하다가 끝이 납니다.

특정한 배경은 모르겠어요.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소싯적부터 괴롭다고 하는 말이 들어있는 걸 봐서

‘아마 무슨 몸에 큰 질병이 있었는가...’ 추측은 할 수 있어요.

그러나 그것도 확실한 게 아닙니다.

 

그럼 도대체 이렇게 ‘선취적 감사신앙’이 없이

그냥 고통 그 자체를 호소하다 끝난 이 시편의 메시지가 도대체 뭘까요?

 

그러나 여러분, 참으로 귀한 의미가 들어있는 시편입니다.

이 시편이 말하려고 하는 것은.. 오늘 설교 제목이에요.

<고통은 현실이 아니고 느낌이다> .. 라는 얘기입니다.

 

고통의 현실은.. 객관적인 의미에서 없어요.

객관적인 기준이 없다는 것입니다.

어디까지가 고통이고, 어디부터가 고통이 아닌지... 도저히 객관적으로 정할 수 없어요.

 

다시 말하면, 내가 고통이라고 느끼는 것도.. 전혀 고통이 아닐 수 있어요.

왜 그런지 헬렌 켈러/사도바울/나폴레옹/마릴린 먼로 예를 들어서 설명해 보겠습니다.

 

 

▲고통의 현실을 거의 못 느꼈던 헬렌 켈러

헬렌 켈러는 삼중고를 겪고 있지 않았어요?

보이지 않았고/ 들리지 않았고/ 말도 못합니다. 3중고 입니다.

 

그러니까 이 외부세계와 사실은 교통할 수 있는, 교감을 일으킬 수 있는 통로가

너무 제한되어 있었어요.

보통 사람 같았으면, 답답해서 죽으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헬렌 켈러가 뭐라고 말했는가 하면.

“나는 행복하지 않았던 날이 없었다.” 이렇게 얘기해요.

 

이런 고백을 뒷받침이라도 해주듯이 행복에 대한 헬렌 켈러의 명언을 들어보면,

'행복의 문 하나가 닫히면 다른 문들이 열린다.

그러나 우리는 대개 닫힌 문들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우리를 향해 열린 문은 보지 못한다.' 라고 말했어요.

 

헬렌 켈러는 5감각기관 중에 세 개가 닫혀버린 사람이에요.

눈이 닫히고/ 귀가 닫히고/ 입이 닫혀버렸어요.

 

그런데 나머지 두 개 열려있는 것, 즉 코로 냄새 맡고,

촉감으로 느낄 수 있는 그것 가지고 살았는데.. 뭐라고 얘기했느냐 하면.

'이 세상에서 난 행복하지 않았던 날이 없다.' ... 이렇게 얘기합니다.

 

▲반면에 여러분 잘 아시는 나폴레옹.

유럽을 뒤흔들었던 프랑스의 제 1대 대통령 나폴레옹.

이 나폴레옹은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유배당해서 죽어가면서 뭐라 그랬냐.

'나는 생애 동안에 단 6일만 행복했다.' 이렇게 얘기합니다.

 

오(감각기)관이 멀쩡하고. 황제요, 첫 번째 통령이 되었던 이 나폴레옹의 말은

나는 단 6일간 행복했다. 이렇게 얘기합니다.

 

▲고통의 현실을 못 느끼고 살았던 사도 바울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라.

라는 말을 한 사도바울은 우리가 생각할 때

우리가 고통을 느끼는 현실이라고 믿어지는 그런 상황이 없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항상 기뻐하라는 말을 한 이유는

그가 우리가 느끼는 고통의 어떤 포인트가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예를 하나 들어보면 이래요.

고린도후서 11:24절 이하에서 자기의 생애를 돌아보며 이렇게 얘기합니다.

 

-유대인들에게 40에 하나 감한 매를 5번 맞았다.

그러니까 사형은 아니고 하나 감한 매,

죽기 직전까지 살점이 떨어져나가는 채찍을 맞게 했다는 것이에요.

그것도 다섯 번 씩이나!

 

-그리고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1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며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 위험, 광야의 위험, 바다의 위험과

-거짓형제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고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6도 윤회로 말하자면, 사도바울은 지상에서 ‘지옥도’를 산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뭐라고 얘기하느냐 하면.

항상 기뻐하라고 얘기합니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것이에요.

 

그러므로 우리가 느끼는 괴로움과 고통의 현실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는 겁니다.

 

분명히 우리가 상상하지도 못할

고통에 찌들어 죽어야 마땅할 정도의 괴로운 일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도바울이 항상 기뻐하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거기다 갖다 붙인 말이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는 겁니다.  살전5:16~19

 

객관적인 고통의 현실은 없습니다.  주관적인 고통의 현실은 있겠지만,

그러므로 여러분,

헬렌 켈러와 같은 고통을 마땅히 느껴야 될 것 같은 현실이 주어져도

우리도 헬렌 켈러 여사처럼 날마다 행복할 수 있고

 

황제의 자리에 등극을 해서 온 유럽을 사시나무 떨듯이 공포에 몰아넣었던

힘의 절정에 다해봤던 나폴레옹은 단 6일 동안 행복했다고 말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고통스럽다. 불만스럽다. 괴롭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객관적인 현실은 없다는 것입니다.

 

실제적으로 우리는 말합니다.

-나는 돈이 없기 때문에 괴롭다.

-시어머니 때문에 괴롭다.

-남편 때문에 괴롭고, 아내 때문에 괴롭다.

이 모든 불만은.. 이게 내가 스스로 속고 있는 거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얼굴을 숨기시면, 내가 괴롭다.

그럼 오늘 이 시편 88편이 말하는 게 뭐예요?

사람들이 지옥 같은 세상을 사는 이유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럼 사람들이 지옥 같은 세상을 사는 이유가 과연 무엇입니까?

여호와여 어찌하여 나의 영혼을 버리시며,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시나이까? 88:14

주님의 얼굴이 감추어지잖아요? 그 결과는 이어지는 구절에 나와 있습니다.

 

:15, 내가 어릴 적부터 고난을 당해 죽게 되었사오며 주께서 두렵게 하실 때 당황하였나이다.

:16, 주의 진노가 내게 넘치고 주의 두려움이 나를 끊었나이다.

:17, 이런 일이 물 같이 종일 나를 에우며 함께 나를 둘러쌌나이다. 

 

이렇게 주의 얼굴이 자기에게 감추어져서, 지옥 같은 세상을 산 사람의 예를 들면,

-나폴레옹처럼 온 유럽에 위세를 떨치며 살아도... 지옥처럼 살고

-마릴린 먼로처럼 온 남성들의 사랑을 받고 살아도.. 지옥처럼 살다 결국 자살하고,

진짜 지옥처럼 살아야 할 헬렌 켈러 여사는... 천국처럼 살더라는 것입니다.

 

▲반대로, 하나님 얼굴을 뵙는 것이 복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산상수훈에서 뭐라고 얘기하십니까?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라. 얘기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얼굴이 가려진 상태에서는, 현실이 어떻게 주어져도 마찬가지로

자기 마음에서 지옥도⑥가 만들어지는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아귀도⑤가 만들어지고... 굶주림이 있는 것이에요.

뭘 먹어도 불만이에요. 현실이 어떻게 되도 자기 마음에 불만이에요. 굶주려요.

다 불만이에요. 다 불만! 이것도 불만, 저것도 불만.

 

그리고 축생도④

사람이 마치 짐승처럼 살아가는 거예요. 짐승처럼.

 

그리고 뭐예요. 아수라도③

자기만 빼고, 모든 사람이 다 잘못했다는 거예요.

사람들이 나를 기쁘게 해줘야 되는데, 그렇지 않고 자기를 기쁘게 하니까

모든 사람이 내가 볼 때 다 불만이에요. 이게 아수라도에요.

 

(※여기서 불교의 교훈을 빌려온 것은, 불교의 교훈이 맞다고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좀 더 지옥 같은 삶을 상세히 설명하기 위한 방편으로서 빌려온 것임)

 

그럼 왜 이런 세상을 살아가게 되느냐고요?

현실이 그래서가 아니에요.

-돈이 없다는 것도 이유가 안 됩니다.

-남편이 바람피우는 것도 이유가 안 됩니다.

-부인이 살림을 못하는 것도 이유가 안 되고

-자식이 공부를 못하는 것도 이유가 안돼요.

 

아무것도 내 마음에 지옥도가 그려질 수 있는 이유가 안 되고

오직 하나 <하나님의 얼굴이 가려졌기 때문>이라는 것이에요.

 

▲주님이 얼굴을 내게서 감추시니, 내가 무덤이나/지옥에 내려가는 자 같습니다.

 

3절, 무릇 나의 영혼에는 재난이 가득하며 나의 생명은 ‘스올’에 가까웠으니.

스올은, 구약적 개념의 지옥입니다.

 

4절, 나는 무덤에 내려가는 자 같이 인정되고, 힘없는 용사와 같으며...

 

이 사람의 현실은 감추어졌어요.

그의 현실의 상황은 어떤 상황인지 우리가 전혀 짐작을 못하겠어요.

어떤 상황이기에 이런 지옥도의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어요.

 

그러나 이 시인이, 결국은 그 이유를 밝혀줍니다.

왜 사람이 마음에 지옥도가 그려지느냐 라는 이유를

14절에, 주의 얼굴이 숨겨졌기 때문입니다 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얼굴 뵈올 때, 내 마음이 비로소 기쁩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부른 찬송 한번 보실래요?

 

♪내 영혼에 햇빛 비치니... 주의 얼굴의 광채가 비치면 주 영광이 찬란해지면

후렴에 보면, 그 밝은 얼굴 뵈올 때 나의 영혼 기쁘다♬

 

-내가 돈을 벌어 기쁘다가 아니고

-내 자식 공부를 잘해 기쁘다가 아니고

-내가 병이 나아서 기쁘다가 아니라

-그 밝은 얼굴 뵈올 때 나의 영혼 기쁘다 이겁니다.

 

우리 신앙의 조상들이, 이 진리를 올바로/체험적으로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이런 귀한 찬송시를 지었는데,

지금 우리들은 ‘물질의 복을 받아서 나의 영혼 기쁘다’ 하고 있으면 되겠습니까? 

 

▲감옥에서도 기뻐한 사도바울

빌립보 감옥에서 여러분 잘 아시잖아요.

매 맞고 감옥에 들어가서 감사 찬양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지금 사도바울의 현실이 뭐예요?

현실은 개뿔이에요.

그렇지만, 기도하고 찬미합니다. 행16:25

 

여러분, 이 설교의 주제를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현실은 우리에게 고통을 줄 수도 없고 기쁨을 줄 수도 없습니다.

기쁨과 고통과 불만과 감사의 경계선이 어디서부터 시작이 됩니까?

주의 얼굴을 보고 있느냐/아니냐? 는 것이에요.

 

그러므로 속지 마세요.

-누구 때문에 괴롭다.

-내가 지금 누구 때문에 우리 집안이 먹구름이 끼었다.

-돈이 없기 때문이다. 병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런데 속지 마세요.

 

뭐 때문에 그런 것이 고통으로 느껴지느냐?

그 근본 원인은, 이면적 이유는 주의 얼굴을 뵙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찬송가 414장 찬송 가사가 너무 기가 막히게 좋습니다.

이 가사만 있어도 살 거 같아요.

 

♩주의 사랑 비췰 때 기쁨 오네. 근심걱정 물러가고 기쁨 오네

그 큰 사랑 내 맘속에 명랑하게 비췰 때에 (나) 찬송하네 ♬

 

이게 근심걱정, 돈 근심, 돈 걱정 했다고 칩시다.

그럼 돈이 와서 이 근심걱정이 물러가는 게 아니라

주의 사랑 비췰 때에 이 근심, 돈 때문에 생긴 걱정근심이 물러간다는 거예요.

그리고 주의 사랑 비췰 때 세상은 아름답고 활기차게 다 변하네.

 

세상은 똑같아요.

그런데 주의 사랑이 비췰 때, 주의 얼굴의 빛에서 내가 주의 사랑을 느끼게 될 때

세상은 활기차게 다 변한다는 거예요.

 

객관적인 고통의 현실이 없어요.

오직 내가 주관적으로 고통을 느낄 뿐입니다.

-주의 얼굴/사랑이 내게 비취지 못하니까...

-주의 얼굴을 뵙지 못하기 때문이에요.

 

여러분 우리는 탁월한 영적 환경에 놓여있어요.

주님의 십자가사건이 있으니까.

주님의 십자가가 뭐하는 겁니까?

 

이 세상에서 우리가 고통을 느끼고, 괴로움을 느끼고, 불만을 느끼고,

걱정하게 되는 이 모든 세상에 대한 관계를.. 주님의 십자가가 끊어줘요.

 

그리고 동시에 관계가 회복되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시고

하나님의 얼굴이 나타나게 해주십니다.

그래서 고통이 아니라.. 도리어 기쁨을 느끼며 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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