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탁한 세상을 사는 법 렘51:41~50 09.08.23.설교스크랩
▲본문의 배경
본문의 배경은 시드기야 왕 때입니다.
시드기야가 모태신앙으로 날 때부터 하나님의 백성이었고,
그 중에서도 왕으로 세움을 받았던 지도자였음을 우리가 기억합시다.
그런데 21세에 왕이 된 그 시드기야가
오늘 본문과 이어지는 말씀을 볼 때, 얼마나 비참하게 무너졌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따라 살던 그는
자기 아들들이 자기 눈앞에서 죽는 것을 보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바벨론 왕 앞에서 자기의 두 눈이 뽑혔으며,
적국 바벨론 땅에 포로로 잡혀가서, 죽을 때까지 감옥에 있다가 최후를 맞습니다.
시드기야의 이전 여호야긴 왕은
시드기야보다 먼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갔습니다.
그는 포로로 잡혀간 지 37년 만에야 바벨론 왕의 호의로 죄수신세를 면합니다.
37년만에야 죄수복이 벗겨지고, 왕과 함께 밥을 먹도록 허락을 받습니다.
그러고는 죽을 때까지 바벨론 왕의 호의에 의지해서,
그가 하사하는 것을 받아서 생활을 하게 됩니다. 렘52:31~
시드기야 왕보다는 형편이 좀 낫다고 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혹시 ‘차라리 죽고 말지, 어떻게 일국의 왕이
적국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살아갈 수 있는가?’ 이렇게 생각하신다면
시드기야보다 여호야긴이 더욱 비참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불행했던 두 왕의 이야기를 성경에 똑똑히 기록한 이유
아무튼 시드기야건 여호야긴이건,
하나님이 세우신 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책임을 맡았던 자들이
이렇게 비참하게 몰락하고만 사실을.. 성경은 냉정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왜 하나님이 이 이야기를 예레미야서에 기록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왜 오늘 우리로 하여금 그 이야기를 읽게 하십니까?
여러분, 이것은 불신자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두 왕이 믿음을 가지고 살았지만, 권세와 부를 가지고 살았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자기의 길을 걸어간 사람들의 종말을
우리로 하여금 분명히 목도케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 이야기를 기록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사람은 큰 집을 가져야.. 잘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권력이 있고 돈이 많아야.. 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야.. 축복이 임하고, 살 길이 열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것을 바라시는데, 우리가 그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내가 살고 싶은 대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산다면
그런 삶은 바로 하나님 보시기에
시드기야나 여호야긴의 삶과 같은 것입니다. 이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2. 그런데 본문은 바벨론도 무너진다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51:41, 슬프다 세상이 함락되었도다. 온 세상의 칭찬받는 성읍이 빼앗겼도다.
슬프다 바벨론이 나라들 가운데에 황폐하였도다.
:42, 바다가 바벨론에 넘침이여, 그 노도 소리가 그 땅을 뒤덮었도다.
바벨론이 어떤 나라입니까?
이 본문이 기록된 무렵, 바벨론은 매우 융성하고 강한 국가였습니다.
난공불락의 바벨론 성을 구축해 놓고, 수많은 나라들을 정복하며
고대의 제국들 중에 둘째가라면 서러워할만큼, 강력한 국가를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나라가 망한다고 하십니다.
물론 이 말씀은 바벨론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바벨론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아예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기들을 정복하고 압제한 그 강한 나라도
결국 망하고 말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아마 이 말씀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는
그렇게 엄청난 부와 강한 군대를 가지고 있는 바벨론이 망할 리가 없다고
쉽게 동의하지 못하는 부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지금 말씀하고 계십니다.
온 세상이 부러워하는 그 바벨론이 망한다고 말입니다. 왜입니까?
하나님께서 왜 이런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하십니까?
그것은 이런 말씀을 하고 싶어서입니다.
‘너희 나라가 망하는 것이 슬프냐? 약한 것이 슬프냐?
바벨론처럼 강하고 융성하지 못한 것이 억울하냐?
너희도 바벨론처럼 강해지고, 커지고, 화려하고,
세련되고 멋있는 나라를 만들고 싶으냐? 아니다!
그것이 너희 살 길이 아니다. 너희가 구해야 할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그 강한 바벨론도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마치 낫 앞에 풀처럼 쓰러질 날이 올 것이다.’
▲여러분, 그러면 잘 사는 것이, 강하고 융성해지는 것이,
세련되고 화려하게 사는 것이 잘못이란 말입니까? 그 이야기가 아닙니다.
여러분도, 할 수만 있다면 세련되고, 화려하게 사셔야지요. 부유하게 잘 사셔야지요.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축복을 누리는 것이 잘못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에게나, 우리에게나 무엇이 문제입니까?
하나님을 첫 번째 자리에 두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많이 누리고 산다면, 그것은 정말 감사한 일입니다.
그런데 가나안 땅 주시고, 성전 주시고 해서, 그렇게 살다 보니까,
주변에 애굽이 보입니다. 앗수르가 보입니다. 바벨론이 보입니다.
더 넓은 땅 가지고, 더 부유하게 잘 사는 나라들이 눈에 자꾸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도 애굽같이 되고 싶고, 앗수르, 바벨론같이 되고 싶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보다는 애굽/앗수르/바벨론이 가진 것들,
즉, 이스라엘 사람 자기들의 눈과 마음에 보기에 좋은 것들을 좇아갑니다.
여러분, 그런데 이방을 그렇게 좇아간 결과가 무엇이었습니까?
북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망했으며,
남 유다 역시 앗수르에 괴롭힘을 당하다가.. 결국에는 바벨론에게 망했습니다.
▲적용 : 바벨론을 의지하지 마십시오!
지금 이 자리에 계신 분들도, 각자 여러 가지 어려움에 처해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이스라엘의 상황과, 자신의 상황을 잘 한번 연결해 보십시오.
혹시 지금 돈 때문에 힘드십니까? 어떻게 하면 해결이 되겠습니까?
돈을 얻으면 됩니까?
만약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바벨론이 무너진다는 말의 뜻을 잘 모르시는 분입니다.
‘돈 때문에 어려움을 당했으니까, 돈만 있으면 다 해결 된다고요?’ 아닙니다, 여러분!
‘바벨론이 나를 쓰러뜨렸으니까, 내가 바벨론보다 더 강해지면 된다. 바벨론을 이기면 된다.’
아닙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앙을 회복해서...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그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면
하나님이 아닌 그 어떤 신이라도, 내 필요한 것만 채워주면
그 신을 따르게 되고 말 것입니다.
여러분, 혼탁한 세상을 살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비슷한 환경의 오늘날 우리들을 향해
하나님이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일러주고 계십니다. ↓
▲3. 이런 처지에서 예레미야의 예언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칼을 피한 자들이여 멈추지 말고 걸어가라.
먼 곳에서 여호와를 생각하고, 예루살렘을 너의 마음에 두라. 렘51:50
지금 남유다 왕국은 바벨론의 칼 때문에 망하고 있습니다.
그 전에는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의 칼에 망했습니다.
그런데 그 칼끝을 피해 살아남은 자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남은 자들을 통해, 다음 역사를 이루어 가시려고 하십니다.
①그래서 겨우 목숨만 건진, 나라도 없고, 자존감도 잃고,
재산과 가족을 모두 잃은 비참한 지경의 남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지금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멈추지 말고 걸어가라’
이게 대체 무슨 말씀입니까?
여러분, 사실 하나님께서는 그 동안에도 침묵하고 계셨던 것이 아닙니다.
어느 날 갑자기 말씀을 시작하신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계속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말씀해 왔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라가 망하고 나자, 남은 자들이 애굽으로 가느니/마느니 하다가 비로소 깨닫습니다.
'지금껏 귀 기울이지 않았던, 그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따랐다면
이런 고통은 없었을 텐데..!'
그런 그들을 향해, 피난의 길, 유배의 길을 멈추지 말고 걸어가라는
하나님은 말씀은 즉 이런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인도하겠다. 그 길을 따라 계속 나아가라.’
②그러시면서 또 덧붙이십니다. ‘먼 곳에서 여호와를 생각하라.’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의 처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나라가 무너졌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팔레스타인 땅을 벗어나 살길을 찾아, 피난을 떠났습니다.
생명을 보전하기 위해 흩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먼 곳에서’ 절망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버린 것은 아닌가..,
하나님이 다시 우리를 회복시켜 주실 것인가..,
우리가 하나님이 잊어버렸기 때문에 결국 망하고 말았구나..!’
하지만 그런 그들에게 주님이 지금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이 그 먼 곳 어디에 있든지 여호와를 생각하라!’
물론 ‘나라도 지켜주지 않고, 나를 이 모양 만든 하나님!’
이런 생각을 한다면 그것은 여호와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분노와 어리석음에 빠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을 망친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들 자신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보여주신 길을 제대로 걷지 않았기 때문에 엉망진창이 된 것입니다.
하지만 아직 마지막은 아닙니다.
만약 그들이 다시 여호와를 생각하며,
그 인도 하시는 길을 한 걸음 한 걸음 다시 걷는 다면,
비록 나라가 망했어도, 건강을 잃었어도, 손에 쥔 것이 아무것도 없어도
그들은 회복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영광이 다시 나타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위로의 말씀을 지금 하고 계십니다.
▲과거 우리 민족도 이런 경험을 겪었습니다. 20세기 초 조선의 상황이 그랬습니다.
일본과 청국이 조선 땅에서 전쟁을 벌였습니다. (청일전쟁)
전쟁이 끝나자 콜레라가 창궐해 전국에서 수십 만 명이 죽어 넘어졌습니다.
그러다가 나라가 결국 일본에 먹혀버렸고
왕후가 시해를 당하고, 왕이 독살을 당하는 일이 벌어 졌습니다.
아마 우리가 그 시대에 살았다면 다 피를 토하고 죽을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지금 지난 조상들의 역사로 이 얘기를 합니다만,
만약 우리가 그 시대를 살았다면, 다 절망 속에서 술독에 빠져 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 그런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여호와를 생각하며, 예루살렘을 마음에 품고 길을 간다면.. 반드시 회복될 것이다. :50
여러분, 구한말의 한국도 마찬가지고,
본문의 예레미야 당시 이스라엘도 마찬가지고,
오늘날 우리 시대의 상황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여호와를 생각하며, 예루살렘을 마음에 품고 길을 간다면.. 반드시 회복될 것입니다. :50
(신약적으로 표현하면, ‘주님과 동행하며, 성령의 인도를 매일 받으라’는 것입니다.)
▲개인적 적용
여러분, 그런데 사실 이전에도 수없이 말씀하셨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약속하고 계신 것은 회복 정도가 아닙니다.
회복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개인적으로 어떤 상황에 놓여 있든지,
또 우리 사회가 앞으로 어떤 상황을 맞게 되든지,
우리 교회가 어떤 상황에 놓이든지,
우리가 한결같이 행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길이 무엇 인가를 생각하며
그 길은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 길을 걸어가는 자에게는 반드시 회복과, 다시 영광이 있을 것입니다.
사업상의 문제건, 부부 사이의 문제건,
혹은 자녀 문제건, 노년의 문제건,
분노를 지울 수 없어 가슴이 답답하고 쓰라린 관계의 문제건,
하나님이 오늘 자신에게 주시는 그 말씀을 따라서, 순종의 길을 걸어갈 때에
반드시 해결되고 위로받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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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세상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남’ ... 의 의미
여러분, 신명기 28:1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이 세상 모든 민족들보다 뛰어나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참 근사한 얘기지만 여러분, 이 말씀을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이런 말씀을 들을 때마다
‘그래! 하나님 누구보다 부자 되게 해 주시고,
우리 아이를 누구보다 더 좋은 학교에 가게 해 주십시오’ 이렇게 적용합니다.
여러분, 그렇게 적용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희생으로 여러 민족들을 섬기는 의미의 ‘뛰어남’ 입니다.
신28:1절을 본문과 연결지어 생각하면,
‘내가 이스라엘을 바벨론보다 더 뛰어나게 하겠다.
바벨론보다 더 강하게 만들어 주고, 바벨론을 깨트릴 수 있는 무기를 네 손에 쥐어 주마’
하는 얘기가 아닙니다.
성경에 나오는 승리는,
하나님 나라의 궁극적인 승리를 얘기하는 것입니다.
칼과 창으로 더 강하게 무장해서 승리하는 방식이 아닙니다.
그랬다면 예수님이 천군천사를 동원하시고, 십자가의 길을 가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 사람들이 자기를 칼로 찌를 때.. 그 칼을 맞았습니다.
제자들을 훈련시켜 로마를 공격하거나,
자신을 대적하는 자들을 힘으로 제압하려 하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용서를 선포하고, 사랑을 선포하시고,
마침내는 죽음으로써 이기셨습니다.
그것을 알기 때문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로마에 대항하기 위해 칼과 창으로 맞서는 독립전쟁을 한 것이 아닙니다.
더 원대한 비전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단지 정치적, 군사적 독립이 아니라
로마도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야 한다는 놀라운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로마에 가서 복음 전하기 원했던 것입니다.
로마를 원수로 삼는 것이 아니라,
로마를 비롯한 모든 나라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 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자기와 달라도 사정없이 정죄하던 바울,
시골 어촌의 무식한 어부 베드로 같은 인물들이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지닌 자로 변화된 것입니다.
모든 민족, 모든 사람들 위해 뛰어난 자로 변화되어 나갔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 후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결국 로마가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칼과 창으로 로마를 몰아내거나 정복할 수는 없었지만
복음을 들고 목숨을 바친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로 말미암아
로마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돌아왔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세상 모든 민족/사람들보다 뛰어나 탁월해진 다는 것은,
남들보다 좀 더 큰 집에서 살고, 남들보다 좀 더 폼 나게 살고,
남들보다 좀 더 휴가를 멋있게 즐기고, 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비록 부족하고 허물이 많은 존재이지만
성령께서 내 마음을 움직여 주시고 바꾸어 주셔서
다른 사람을 섬길 수 있는 자가 될 때에,
하나님의 능력이 내 삶을 통해서 놀랍게 나타나는 인생이 되는 것,
그것이 바로 탁월해지는 것입니다.
▲2. 무모함과 합리성 사이에서.. 성령의 인도 받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의미에서 무모함과 합리성 사이에 서 있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명령하셨습니다.
‘해발 800m에 있는 저 예루살렘 성을 빼앗아라. 내가 주겠다!’
그런데 인간적인 계산으로는 너무 어려운 일입니다.
차라리 광야에 물을 좀 끌어대고, 땅을 일구는 것이 낫지, 그래서 평지를 개간하지,
왜 꼭 전쟁을 해서 어렵게 그 산꼭대기 성을 빼앗아야 하는가요?
이런 합리적인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자신의 합리성을 버리고,
하나님의 약속과 인도하심을 따라 무모한 쪽을 택했습니다.
결국 그 일은 무모함이 아니었습니다. 주님 뜻에 순종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신자들이 <무모한> 일에 빠지는 것을 종종 봅니다.
믿음으로 도전해 보겠다고는 하는데,
하나님의 역사와 인도하심과는 상관없이
자기가 가서는 안 될 길을 가는 모습을 볼 때가 있습니다.
또한 반대로 우리들이 너무 겁을 집어먹고, 너무 <합리적>으로만 생각해서
꼭 가야 할 길을 가지 않고, 앉아서 계산만 하는 것입니다.
‘이게 될 일인지/아닌지..,’
여러분, 참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는 인간적인 합리성에 기울거나,
아니면 자칫 잘못해 무모함에 빠지거나 할 수 있는 그 경계선상에 서 있습니다.
이쪽으로도 저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것,
이것은 우리 개인, 가정, 공동체가 가져야 할 아주 중요한 기도 제목입니다.
무모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없이 자기 일을 하면서,
믿음을 빙자해 무모한 일을 벌이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반면에 자기 생각에 합리적이지 못하다고
하나님이 이루어 가시는 일들을 훼방하는 자리에도 서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 둘 사이에서 균형을 잡을 수 있을 것인가요?
여러분, ‘여호와를 생각하라! 예루살렘을 마음에 품으라!’ *예루살렘 : 주님의 임재
이 말씀을 청종할 때에
우리는 무모함의 함정에도/ 합리성의 함정에도 빠지지 않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승리의 길을 걷게 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길을 걸어가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평강을 약속하셨습니다. ▣ 삶의 통찰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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