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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남’ 과 ‘제2의 중생체험’ 2096

LNCK 2009. 9. 23. 14:31

◈‘거듭남(중생)’ 과 ‘제2의 중생체험’                  고전12:3                 인터넷 글 스크랩/ 정리


 

‘거듭남(중생)’과 ‘제2의 중생체험’은 구별되어야 한다는 주제의 글을

인터넷에서 스크랩해서 정리해 보았습니다.

 

 

▲거듭남에 관한 헷갈림

‘내가 과연 거듭났을까?’에 대해 생각해 볼 때,

-'나는 거듭났다',

-'나는 거듭난 것도 같기도 하고, 거듭나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예수 믿고 세례도 받았지만 자꾸 죄를 짓는 것을 보니, 거듭나지 않은 것 같다'

라고 생각하는 등, 사실 우왕좌왕 하게 됩니다.


‘거듭남을 강조’하는 어떤 목사님은,

한국교회의 부족하고 부끄러운 현실의 원인이

신자들이, 교회를 다니지만, 대부분 거듭나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힘주어 말합니다.


그 분의 말씀을 들으면, 그 분의 말씀이 옳은 것 같습니다.

사실 조지 휫필드, 조나단 에드워즈의 설교에서 강조하는 것이,

서구의 모태교인들에게 ‘당신은 거듭나야 한다!’는 것을 반복해서 강조했습니다.


▲오순절의 성령체험 이전에도 <거듭납니다.>

‘거듭남’이란, 성령님의 역사로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의 역사/감동에 의하여

불신자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를 성령님으로 나는 것, 하늘에서 태어나는 것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게 쉬운 사람은 쉽지만,

어려운 사람에게는 무척 어렵습니다.

어떻게 자기 집에 두 눈 시퍼렇게 뜨고 계신 아버지가 계시는데,

‘하나님을 또 아버지로 부를 수 있겠느냐?’고 그들은 반문합니다.

그래서 오직 성령의 역사로, 사람은 거듭날 수 있습니다.


오직 성령의 역사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내 죄를 대신해서 죽으심과,

나를 구원하러 오신 모든 것이... 저절로 믿어지는 것입니다.

 

    또 성령님을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는 주님이시다' 하고 말할 수 없습니다. 고전12:3


아직 사도행전 오순절의 성령충만을 경험하지 못한

4복음서의 제자들은 거듭났을까요? 대표적으로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이라는 믿음의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마16:17

 

이런 문맥을 볼 때, 베드로가 자기 육정에 의해 그리스도를 믿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하늘/성령의 역사에 의해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행전의 오순절 체험을 하기 전에

4복음서의 베드로를 위시한 제자들은.. 거듭났다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문제 제기 : 그런데 왜 거듭난 베드로는, 예수님을 저주/부인하고 실족했을까요?

베드로가 진정 거듭났다면.. 그런 실족하는 일이 없었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 행2장에서 오순절 성령충만의 체험을 하고 난 다음부터

베드로는 정말 목숨 걸고 전도하는 복음의 사도의 진면목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거듭난 것은,

행2장의 성령충만의 체험/ 오순절의 체험이

바로 그에게 <거듭남>의 순간이었다고 말해야 옳지 않을까요?)


답: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성령충만의 체험, (또는 얍복강에서 야곱의 체험)

이런 것들은 모두 <제2의 중생체험>으로 부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런 체험을 아직 거치지 않은 사람들을 두고서

거듭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은... 많은 무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들이 아직 성령의 체험 없이, 단순한 지식적 동의로 예수님을 영접했건/말건

어쨌든 예수님을 믿는 것은 사실입니다.

(다만 모든 것을 판별하시고, 심판하실 이는 오직 주님이십니다만...)


그러므로 4복음서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며,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제자들은

이미 성령님의 역사로 거듭난 사람들이었습니다. (성령충만은 아직 아님)



▲제2의 중생체험

 

구원파에서는 교인들에게 ‘당신은 거듭났느냐/그 시점이 언제냐?’고 묻습니다.

그런데 교인이 대답을 선뜻 하지 못하면,

‘당신은 아직 거듭나지 않은 것이다’... 하면서 교인들을 가르치려 듭니다.


우리는 그런 질문에 흔들리지 말고,

내가 <예수를 주로 믿고 시인하면 거듭난 것이다>라고 확실히 믿어야 합니다.


그러나 <거듭남>에 만족하고, 안주하면 안 됩니다.

<제2의 중생체험/성령체험>을 간절히 사모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제2의 중생체험>은,

거듭남 이후의 모든 성령체험을 통 털어 지칭하는 것으로 봅니다.

제3의, 제4의 중생체험이 있을 수 있으나,

통칭해서 ‘제2의 중생체험’으로 부르기로 합시다.


과거에 믿음의 선배들은 ‘은혜를 받아야 한다. 은혜의 체험을 해야 한다’고

표현을 약간 다르게 하기도 했지만, 그 속내용은 같습니다.


▲청교도 신학에 있어서, ‘거듭남’에 대한 개념정리가 필요합니다.

문제는 오늘날의 거듭남 이해가 성경이 가르치는 바를 넘어서서

일부 사람들에 의해서, 너무 강화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거듭남을..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출발, 영적인 갓난아이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넘어서

너무 강화시켜놓았습니다.


그 결과, 거듭남을... ‘성숙한/장성한 믿음의 사람’으로 이해하도록 만들어버렸습니다.


특히 거듭남에 대한 청교도들의 글들이 그렇습니다.

거듭나면 신앙의 여러 아름다운 열매가 당연히 맺혀지는 것으로 이야기 합니다.

그래서 성숙한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들은.., 거듭나지 못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거듭났으면 그렇게 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청교도의 후예들입니다. 청교도의 전통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습니다.

그 신앙의 내용을 그대로 가지되,

오해와 헷갈림의 소지가 있는 ‘거듭남’에 대해.. 용어와 개념을 정리하자는 것입니다.


17~18세기 청교도들이 말한 ‘거듭남’

그리고 그 전통을 이어받은 미국교회가 말한 ‘거듭남’은

사실은 ‘제2의 중생체험’으로 (아니면 다른 용어로) 구분해서 불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중에 신앙의 성숙한 열매를 맺지 못하고,

제대로 생활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 대해 '거듭나지 못하였다'고 말하는 것은

성령님께서 그에게 행하신 일을, 자신의 생각을 앞세워 멸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베푸신 은혜를.. 없었던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말이, 그럼 대충 신앙생활해도 괜찮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제대로 생활하지 못하는 이들이.. 모두 거듭나지 못한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들은 언제든지, 충성된 사람으로 장성한 사람으로.. 얼마든지 변화될 수 있습니다.

단 ‘제2의 중생체험’을 반드시 거쳐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조지 휫필드, 에드워즈 목사님 같은 분들이 설교할 때마다

‘거듭났느냐/ 중생했느냐?’를 무척 강조했습니다.


그 전통이 아직까지 살아있어서 1970~80년대에

미국에서 오신 선교사들은

‘Are you a born again Christian? / 당신은 거듭난 신자입니까?’ 라고 물었는데,

 

사실 그 의미는

‘당신은 제2의 중생체험을 했습니까?’ ... 이런 뜻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렇게 개념 및 용어를 정리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래서 ‘내가 거듭났는가/아닌가?’에 대해 더 이상 고민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럼 거듭나고서, ‘제2의 중생체험’이 만약 없는 사람은

천국에 갈 수 있을까요? 가룟 유다는 거듭나지 않은 것일까요?

 

일단, 심판자/재판장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전제로 하고요,

거듭남은 영적인 갓난아기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성경은 곳곳에서 ‘자라가라, 장성한 분량’을 강조합니다.

 

다른 표현으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좇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급적 안전한/확실한 길을 택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 '구원' 문제를 다루는 것은 아니므로, 이 문제는 건너 뛰고 지나갑니다)


▲적용

예수님은 자신을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거듭남에 대하여 가르쳤습니다.

니고데모는 유대인의 관원이며 랍비의 한 사람입니다.

그는 산헤드린 공의회의 회원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의 선생이지만 거듭남에 대해 알지 못하였고, 거듭나지 못하였습니다.


이를 오늘날의 교회에 여과 없이 연결시키면

교회의 직분자, 목사라고 하더라도 거듭나지 못하였을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거듭나지 못하였기에 바르게 살지 못한다는 말도 성립됩니다.

 

그러나 앞으로 이렇게 말하지 맙시다.

이것은 ‘거듭남’에 대한 개념을 바로 정리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마치는 말

거듭남은 사람의 사모함이나 열정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사안이 아닙니다.

성령님께서 주권적으로 그 마음을 열어 복음을 듣고 받아들이게 하심으로 되는 사안입니다.

거듭남을.. 사모한다고 거듭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제2의 중생 체험을 했다고 하더라도

현재적인 자기 부인, 자기 십자가를 짊, 예수님을 좇음이 없다면

그 체험은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됩니다.

제2의 중생 체험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입니다.

    (다윗 왕도 밧세바 사건으로 넘어지지 않았습니까!)

 

다만, '거듭남(중생)'과 '제2의 중생체험'을 구분짓지 못하여

공동체에 많은 혼란이 일어나거나/ 그래서 아예 이 문제를 거론 안 할 수 있습니다.

 

(윗 글을 인터넷에 올려주신 분께 감사드립니다.)

 

 

▲덧붙여서...  

거듭 말씀드리지만, 이 글은 '거듭남' 정도로

평생에 신앙생활해도 괜찮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신자는, <거듭남>에 안주하지 말고 <제2의 중생체험>을 사모해야 합니다.

성경에 나타난 많은 사람들은,

<제2의 중생체험/성령체험/오순절>을 거친 사람들입니다.


거듭난 것을.. 기독교 신앙의 종착역/목적지/마침으로 보는 것은 큰 잘못입니다.

거듭남은 영적 여정의 출발점입니다.

우리 모두가, 거듭남을 받았지만, 여기에 안주하지 말고,

휫필드, 웨슬리,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님이 강조하신 <제2의 중생체험>으로

나아가기를 힘쓰고, 사모해야 하겠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께 쓰임받은 모든 지도자들이.. 보니까 그랬더라고요!                  ▣ 거듭남, 회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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