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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경 위에 놓인 등불 2143

LNCK 2009. 10. 22. 13:57

◈등경 위에 놓인 등불                                눅8:16~18                09.09.27.설교녹취



◑빛은.. 사람에게 보게 하기 위함이다.   눅8:16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평상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들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  눅8:16


▲빛은.. 사람에게 보게 하기 위해 존재한다.

그리스도인은, 어두운 밤같은 캄캄한 길을 찾아가는 사람에게

빛을 비추어주는 사람이다. 빛이 되는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은, 의도적이지 않더라도,
누군가에 빛이 되어주기 위하여, 오늘/지금 그 자리에 존재하는 사람이다.

 

▲빛은.. 사람에게 보게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이다.

마5:14~16절에도, 그리스도인을 빛에 비유하고 있다.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16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예수님께서는, 우리는 빛으로 부르시고,

이 빛이 사람들 앞에 비추어져야 한다고 말씀하시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빛을 비추어,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하셨다.


여기서 눈여겨 볼 것은,

빛과 같이 밝은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고.. 우리를 칭찬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이다.


‘저 사람 보니까, 하나님이 살아계시는구나..’ 라든지

‘하나님이 저 사람 속에서 역사하시는 게 틀림없어...’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려면, 우리가 빛을 비추는 선한 행동을 할 때,

‘내 이름, 내 명예, 내 공로’를 위해서.. 해서는 절대 안 된다.

만약 그렇게 하면,

나의 빛나는 선한 행실을 보고도.. 사람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빛인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빛으로 살 때,

그 선한행실을 통해서, 빛으로서 세상에 밝혀 보여주는 동기 매우 중요하다.


오늘날 적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이, 또한 그 공동체가

세상에 빛같이 선한 행실을 하면서도,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지 못할 수도 있는데,

 

그것은 선한 행실을 애써서 하면서도,

그 이면의 동기가 ‘자기 자랑, 자기 영광’을 은근히 추구할 때이다. 


▲지금까지 내용을 정리하면

①주님은 우리를 세상의 빛으로 세우셨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마5:14

②빛은.. 사람들에게 보게 하기 위함이다. (등경위에 두어)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 눅8:16

③빛은.. 성도들의 착한 행실이다.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마5:16

④그래서 그 빛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를 원하신다.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5:15


▲교회 일을 할 때, 주의할 점이 한 가지 있다.

마7장, 산상수훈의 마지막 대목에 보면,

많은 사람들이 그 날(아마 심판 날)에 주께 와서, 

자기들이 선지자 노릇을 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권능을 행했다고 한다.

그것도 ‘주의 이름으로’ 그 일을 했다고 말했다.

쉽게 말하면, 자기들이 <교회 일을 많이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고 꾸짖으신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며 내쫓으셨다. 마7:23


그들의 많은 교회 봉사는,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못했다.

예수님은 ‘불법’이라고 규정하셨다. 이유가 무엇일까?


추정하건데, 그 힘든 교회봉사를, 많은 사역을

하나님 영광을 위해서 하지 않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자기 공적을 나타내기 위하여’ 했기 때문이다.


여러분, 겉으로 보기에는, 모든 것이 다 ‘주님의 일/사역/봉사’처럼 보인다.

그러나 마음 중심을 보시는 주님은

‘그 일의 동기가 자기부인인지,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인지,

아니면 사역을 통해 자기 이름과 명예를 드러내려는 일인지’

불꽃같은 눈으로 분명히 분별하신다.


다시 말해서, 교회 일을 한다고, 기독교 사역을 한다고,

그것이 다 ‘빛으로 드러나는 일은 아니다’는 것이다.

오직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을 해야’ .. 내가 진짜 ‘빛’인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내가 하는 사역/봉사를 통해서

내 주위 사람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는가?

아니면 나를 쳐다보고 있는가? ‘저 사람은 대단한 사람이야!, 참 대단해!’ 이런 말을 하면서

나를 주목하고 있지는 않는가?


▲더 확대해서 적용하면,

우리의 사역/봉사가 무엇이든지..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설교든지/찬양이든지/청소든지/헌금이든지..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내 영광을 위해서 하느냐/ 하나님 영광을 위해서 하느냐?’이다.


자기 영광을 위해서 하는 ‘위대한 설교/저술/헌금’보다,

하나님 영광을 위해서 하는 ‘작은 봉사’가 더 소중하다는 것이다.

아무도 모르는데서, 은밀하게, 오직 하나님 영광을 위해서 하는 사역/봉사가

결국은 빛이 되어, 사람들이 그 빛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이다.


▲가슴 뭉클한 일화

제가 과거에 안산에서 부교역자 생활을 할 때의 일이다.

그 교회 강대상이 아크릴로 만들어져 있었는데,

정말 툭 치면 부서져 내릴 것 같은.. 아슬아슬한 강대상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름다운 크리스털 강대상으로 바뀌어져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누가 강대상을 바꾸었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누가 감쪽같이,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살짝 바꿔놓은 것이다.


수 개 월이 지나서, 그 일이 은밀하게 알려졌는데,

그 교회의 관리 집사님이, 오래 동안 수 백 만원의 돈을 모아서,

아무도 모르는 시간에, 그것을 바꿔 놓으셨다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듣고서, 제 마음이 얼마나 뭉클했는지...


정말 그런 놀라운 일을 행하신 하나님께.. 제가 영광을 돌리게 되었다.

그런 아름다운 믿음을 주신 하나님께.. 먼저 영광을 돌리고,

그 다음에 그 관리 집사님을 축복하는 마음을 가졌던 적이 있었다.

 

지금도 그 일을 떠올리면 이런 생각이 든다.

‘하나님은 정말 멋진 분이셔, 어떻게 사람을 그렇게 감동하실까!’

 


빛을 비추려면.. 말씀을 잘 들어야      눅8:18


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하시니라  눅8:18


저는 ‘등불 비유’에, 왜 위 말씀이 나오는지.. 처음에 상당히 당황했다.

위 18절이 ‘등불 비유’인 16~17절에 연결/포함되어 있는데,

문맥이 쉽게 연결되지 않아서였다.

그래서 기도하며 고심하다가.. 제 무릎을 쳤다. '아, 이거 구나!'


본문을 자세히 보니까

‘씨 뿌리는 비유’가 나오고, 바로 이어서  눅8:4~15

오늘 본문인 ‘등불 비유’가 나온다.  눅8:16~18

두 비유가 어떤 연관성이 있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두 비유를 자세히 살펴보니, 공통되는 말씀이 나온다. 그것은

‘씨 뿌리는 비유’에서는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15


‘등불 비유’에서는 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이다.  :18

두 비유가 모두 다 ‘듣는 것’을 공통적으로 강조한다.


해석을 하자면,

‘씨 뿌리는 비유’에서.. 좋은 땅이 되어서 백배의 결실을 맺으려면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그 다음에는 지키는 것이고,  :15


이어지는 ‘등불 비유’에서.. 등경위에 놓여, 모든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되려면

역시 ‘말씀을 조심해서 잘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18


▲빛이 비취려면, <말씀을 잘 들어야 한다>는 뜻이다.

말씀이, 내 귀에 잘 들리지 않으면,

즉 하나님의 말씀의 원리에 의해 내가 인도되지 않고/봉사하지 않고,


대신에 내 생각, 내 경험, 내 판단으로 ‘세상에 빛’이 되려고 하다보니

결국 온전한 빛이 되지 못하고..

(앞서 말한) ‘자기 공로주의’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가족간에도, ‘공로주의’에 빠지면,

그 빛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하는 것을 본다.

예를 들면, 아빠가

‘내가 얼마나 고생해서 돈 벌어서 너희를 키웠는데..’

이런 자기 공로를 내세우면.. 그 아빠가 ‘빛’을 상실한다.


부부간에도 마찬가지다.

‘내가 가정을 위해 얼마나 희생했는데, 네가 내게 이렇게 할 수 있어?’

이런 자기 공로를 내세우면.. 그 배우자가 ‘빛’을 상실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게 들어와서 (내가 삼가 잘 들어서)

그 말씀에 순종하는 방식으로 내가 빛이 되지 않으면

우리는 ‘온전한 빛,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빛’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대신에 ‘자기 공로주의’로 나가다가.. 결국 그르치게 될 것이다.


그래서 18절 말씀이 뜻하는 것은,

‘너희가 빛이요, 세상에 빛을 비추려면,

말씀을 삼가 잘 듣고, 말씀에 순종하는 방식으로 빛이 되어라’이다.



빛으로 드러나려면 .. 인내해야      8:17


숨은 것이 장차 드러나지 아니할 것이 없고

감추인 것이 장차 알려지고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눅8:17


▲이 말씀도 잘 해석하기 위해서, 그 윗 단락인 ‘씨 뿌리는 비유’와 연관지어 살펴보자.

‘씨 뿌리는 비유’에 이런 말씀이 나온다.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15


씨가 좋은 땅에 뿌려져서, 결실하여 열매를 맺으려면.., 인내가 필요하다.

즉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루아침에 안 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숨은 빛이 장차 드러나지 아니할 것이 없고

감추인 빛이 장차 알려지려면 :17

반드시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루아침에 빛이 드러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빛은 물리학적으로는 하루아침에, 아니 순간적으로 밝히 드러나지만,

영적인 빛은.. 사람들의 눈이 어두워서, 그것을 빛으로 알아보는 데는.. 시간이 한참 걸린다.)


▲숨은 것이 장차 드러나지 아니할 것이 없고

감추인 것이 장차 알려지고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눅8:17


이 말씀을 역으로(거꾸로) 생각하면

숨은 빛이 드러나는 데..

감추인 빛이 알려지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당장 알려지지 않고, 즉시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는 반드시.. 드러나고/알려진다.

 

그래서 여러분, 저는, 남을 비판하는 사람은, 자기모순에 빠진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 사람이 행하는 그것과 똑 같은 것이.. 자기 속에도 내재해 있는데,

어떻게 남을 함부로 비판할 수 있는가?

아니 자기 속에, 그 보다 더 큰 들보가 있는데, 어떻게 남의 눈의 티를 판단하는가?


그 사람이 빛으로 드러나는 데도 .. 시간이 필요하므로 .. 기다리자는 것이다.

그 교회가 빛으로 드러나는 데도 .. 시간이 필요하므로 .. 기다리자는 것이다.


한 신자나, 개척교회가 즉시로 '세상의 빛'이 되면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그것은 보통 10~15년간 기다려야 한다.

마치 좋은 땅에 씨를 뿌리고서도.. 인내로 결실하는 것처럼.. 기다려야 한다.

(그러나) 빛은.. 반드시 알려지고, 반드시 드러난다는 것이다.  눅8:17


▲언더우드 선교사의 기다림

(언더우드 선교사가 조선에서 선교하다가.. 지친 어느 날의 일기다.)


주여, 지금은 아무 것도 제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메마르고 가난한 땅, 나무 한 그루 시원하게 자라나지 않는 이 땅에

저희들을 옮겨 와 앉히셨습니다.


그 넓고 넓은 태평양을 어떻게 건너왔는지,

그 사실이 기적입니다.

주께서 저를 붙잡아 뚝 떨어뜨려 놓으신 듯한 이 곳,


지금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고집스럽게 얼룩진 어둠뿐입니다.

조선의 마음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 순종하겠습니다.


겸손하게 순종할 때, 주께서 일을 시작하시고,

그 하시는 일을, 우리들의 영적인 눈이 볼 수 있는 날이

오게 될 줄을 믿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하신

말씀을 따라, 조선의 믿음의 앞날을 보게 될 줄을 믿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황무지 위에 맨손으로 서 있는 것 같사오나

지금은 우리가 양귀자(서양 귀신)라고 손가락질 받고 있사오나,

 

저들이 우리의 영혼과 하나인 것을 깨닫고,

하늘나라의 한 백성, 한 자녀임을 알고,

눈물로 기뻐할 날이 있음을.. 믿나이다.


지금은 예배드릴 예배당도 없고, 학교도 없고,

경계와 의심과 멸시와 천대만 가득한 곳이지만,

이곳이 머지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주여, 오직 제 믿음을 붙잡아 주소서!


이렇게 처음에는 좌절하던 언더우드 선교사도

이 땅에서 계속 인내하고, 세월을 보내면서 참고 견딘 결과

드디어 밝은 빛으로 조선 땅에 비취게 되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었는데...

(백년이 지난 지금까지, 우리가 그로 인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다.)


후에 그는 연희전문학교를 세웠고,

새문안교회를 개척했으며,

YMCA를 세웠고,

성경을 번역하고, 4부로 된 찬송가를 만들고,

한영사전을 만들었다.


그가 제작한 ‘그리스도교 신문’은

그 구독자 중에 1/4이 일반인이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 신문에 세계정세, 도량법, 토목공사에 관하여 등

여러 가지 소중한 지식을 전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시 정부가 5백부를 구독해서

정부 10개 부처와 전국 4백 곳에 비치해서 사람들을 개화시켰다고 한다.

(당시에는 신문 1부로 약 50명이 돌려 읽었다고 한다.)


그는 처음에는, ‘내 눈 앞에 아무 것도 안 보입니다’라고 일기에 썼다.

그러나 실망하지 않고, 이 땅을 떠나지 않고, 인내했을 때

조선의 많은 사람들이, 오늘날까지

그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으며,

그는 ‘빛으로 세상에 드러났던’ 것이다.

 

다만 하루아침에 빛이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빛은 반드시, 때가 되면, 반드시 드러나게 되어 있다.  눅8:17                           ▣ 복음 관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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