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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영의 성장을 위한 것 P1 / 정원

LNCK 2010. 2. 28. 20:51

www.youtube.com/watch?v=Ogpp8ULQqQo

◈인생은 영의 성장을 위한 것 P1              롬7:24~8:2                  -출처 보기-

 

 

▲유년기, 청년기, 장년기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의 성장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 어떻게 나아가는 것인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그것은 곧 우리 인생의 과정이기도 합니다.

 

그 과정을 이해하게 될 때 우리의 삶, 우리의 인생이

어떻게 전개되어 가는지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신앙은 은혜의 시기, 연단과 훈련의 시기, 열매와 성숙의 시기 등 3가지로 이루어집니다.

그것은 인생이 유년기, 청년기, 장년기로 이루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살다가 모세의 인도를 따라

애굽을 떠나 광야를 거쳐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그것은 곧 성도의 영적 여정이기도 합니다.

 

 

◑1. 은혜의 시기 / 애굽의 시기 / 신앙의 유년기  

 

이스라엘 백성이 아직 애굽을 나오지 않고 애굽에 있는 상태,

이것을 영적으로는 은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애굽은 육과 자아의 본성을 따라 사는 시기입니다.

이 상태는 자연인이며 본능적인 가치관과 삶을 사는 시기입니다.

이 시기는 아직 동물의 몸을 벗지 못한 시기입니다.

 

따라서 이 시기는 아직 하나님의 말씀을 먹을 수 없는 상태이며

무엇이 진리인가에 관심이 없고

그저 누가 내 편인가, 누가 나를 사랑해주는가에만 관심을 가지는 시기입니다.

먹고 마시고 즐기며 편안한, 그러한 본능적인 삶을 가장 기뻐하는 시기입니다.

 

이 시기에 하나님은 일방적인 은혜를 베푸십니다.

(이때는 아직 말씀이 없습니다. 말씀은 광야에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때는 아직 말씀을 먹지 못합니다. 아직 말씀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기도를 하면 울 수도 있고, 찬양을 통해서 감동을 받을 수도 있으며

감동적인 예화를 들으면 가슴에 충격을 먹을 수도 있지만

진리에 대해서 말씀을 전하면.. 다들 졸거나 잠을 잘 것입니다.

아직 말씀을 받을 수 있는 영이 형성되지 않은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바로는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괴롭히지만,

애굽은 원래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땅이 아니고, 잠시 머무는 곳이라서,

마귀의 영역 아래 사는 사람은, 채찍에 맞고 고통을 겪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

 

이 시기는 은혜의 시기이며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와 능력과 기적과 은총이 임하는 시기입니다.

그래서 애굽에서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책임을 묻지 않습니다.

그리고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저 일방적으로 사랑하시고

일방적으로 은혜를 베푸십니다. 바로의 압제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권능을 행하십니다.

 

많은 은사, 권능, 기적, 능력이 임하는 곳이 바로 이 애굽입니다. (10가지 재앙, 홍해 기적 등)

그러므로 여기에 있는 많은 신자들은.. 자기의 신앙이 깊다고 생각합니다.

은사가 임하고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고 기도의 응답이 신속하게 이루어지니까

자기들이 영적으로 깊다고 생각(착각)합니다.

 

      은사, 기적이 많이 임하므로.. 교만/비판하기 쉽습니다.

      어떤 책 한 두 권을 읽고, 자신들이 그리스도의 신부이며 술람미 여인이라고 주장하기도 하고

      십자가의 도에 대한 메시지를 조금 접하면, 기존의 모든 신앙을 공격하기도 합니다.

      어떤 이들은 은혜를 전하는 메시지에 대해서, 거짓선지자라고 공격을 하기도 합니다.

      (공통점은, 지나친 자기 확신과 상대에 대한 공격이네요)

 

     신앙의 전 과정, 인생의 과정, 영성의 발달 과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은

     한 두 가지의 관점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려고 합니다.

 

유치원에서 배우는 것이 있고, 중학교에서 배우는 것이 있고

대학교에서 배우는 것이 있고, 사회와 인생의 경험학교에서 배우는 것이 있습니다.

 

 

나중에 성장한 후의 관점에서 보면

유치원에서 배우는 것은 (유치하지만) 다 거짓이겠습니까..

 

사탕을 나누어주는 유치원 교사들을, 다 치아파괴범으로 여기는 것은 지나친 것입니다.

때가 되고 자라면.. 무엇이 진정 건강에 도움이 되는 음식인지 알게 됩니다.

그것을 거짓된 미혹이라고 보는 것은 지나친 것입니다.

 

(혹시 누가 유치한 것을 가르치더라도, 유치원생들에게는 유치한 것도 필요합니다.

언제나 고상한 것만 가르치겠습니까?

예를 들면, 유치한 기독교서적도 필요합니다.

무조건 비판하는 자세로 일관하는 것은.. 아무리 맞는 말이라도.. 아직 미숙한 것입니다.)

 

애굽의 핵심 은혜는 보혈의 은혜입니다.

어떠한 권능과 기적으로도, 은사와 능력으로도 바로를 이기고 애굽을 탈출할 수 없으나

마지막 재앙, 피의 사건으로 인하여 그들은 드디어 저주의 땅을 떠나게 됩니다.

그들은 홍해 바다를 건너서 그곳을 탈출합니다.

 

그러나 바로의 군사들은 모두 다 바다에 빠져 죽습니다.

보혈의 역사는 하나님께 속한 백성에게는 구원의 도구이지만, 마귀에게는 멸망의 도구입니다.

그들은 피에 대하여 대항할 아무 힘과 권세가 없습니다.

 

애굽은 은혜의 시기입니다. 이때는 어린 아기와 같습니다. (자아가 강합니다.)

그들은 아무 것도 모르고 칭얼거릴 뿐입니다.

이들은 자기들이 왜 사는지, 하나님이 자기들을 왜 창조하셨는지,

사명이 무엇인지, 어떻게 주님의 뜻을 추구하며 따라야 하는지.. 아무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은 그저 잘 먹고 잘 살기를 원합니다.

유명한 대학에 가고 돈을 많이 벌고, 편하게 살고,

자식들이 다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기를 원합니다.

 

문제가 생기면 울고 금식하고 하소연하고, 공격을 받으면 분노합니다.

자존심이나 기분을 마치 하나님처럼 여깁니다.

육신의 욕망을 따르며.. 자기의 고유한 취향이 있고, 애정이 있는데,

그것을 버릴 의사가 전혀 없습니다.

 

이들의 관심은 세상입니다. 아직 영이 열리지 않았기 때문에

영원한 세상에 대한 갈망이나 이해도 거의 없습니다.

이들은 아직 보이는 것에 사로잡혀 있고, 환경의 문제에만 관심이 있지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해서는 아직 깨어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어린아이가 수학이나 문학에 관심이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들은 자기의 상태가 어떤 모습인지, 하나님은 자신을 어디로 이끄시는지.. 관심이 없습니다.

다만 사랑받기를 원하고, 편하게 살기를 원할 뿐입니다.

이들은 가치관에 있어서

물질관/ 결혼관/ 성공관/ 출세관/ 이성관/ 가정관이나..

대부분의 가치관에 있어서, 세상 사람과 별로 차이가 없습니다.

 

이들에게 하나님이란 자기의 소원을 채워주는 존재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자기의 기대를 채워줄 때, 이들은 간증도 하고 좋아하지만

하나님이 자기를 실망시킬 때, 원망을 하거나 상처를 받거나 실족을 하곤 합니다.

 

아직 이들은 육체와 자아가 지옥에 속한 것이며

그것들이 처리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 자체를 모릅니다.

자신이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을 위하여 부름을 받았고

그 진정한 고향을 위하여 준비되어야 하고 훈련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는 것입니다.

 

이들이 애굽을 나오게 되면 가는 곳은 광야입니다.

이들은 아직 가나안땅을 누릴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그동안 몸에 익었던 것들, 애굽의 냄새, 애굽의 삶, 애굽의 의식을 토해야 합니다.

애굽의 요소를 모두 지워야 합니다.

 

몸이 애굽을 나왔다고 해서 마음까지 나온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애굽을 나온 많은 신자들이 가나안을 향하기는커녕

애굽이 좋았다고, 그 때가 좋았다고 돌아가고 싶다고 말하곤 합니다.

 

이들은 아직 성과 속의 차이를 모릅니다. 지옥과 천국의 차이를 모릅니다.

자기 안에서 미움과 시기와 분노가 일어나도

그것이 지옥에서 온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살다보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직 전혀 눈을 뜨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애굽의 의식, 마비된 의식이 처리되고 분리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훈련의 장소가 광야입니다.

 

정리하면, 신앙의 초기에는 은혜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것을 배우고 경험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는 훈련과 굴복이 있습니다.

 

 

◑2. 연단과 훈련의 시기 / 광야 / 신앙의 청년기

 

시내산에서 주님은 모세를 통하여 구체적인 말씀을 주십니다.

광야는 말씀을 받고, 그 말씀에 따라 연단과 훈련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애굽에서 십자가의 보혈을 경험하지만

애굽에 있는 신자들은 그 당시에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광야에 들어가서 비로소 말씀을 받습니다.

그 후에야 비로소 말씀을 배우며 그 의미를 알게 됩니다.

 

말씀의 중심이 그리스도이며 피이며

그리스도의 피에 새생명의 역사가 있는 것을 조금씩 배우고 알게 됩니다.

 

이 광야의 말씀에 대하여 오해하고 있는 이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이 말씀, 율법의 말씀을 지켜서 천국에 가는 것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율법의 행위로는 아무도 천국에 이를 수 없습니다.

광야의 말씀, 이 율법의 의미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죽이는 것입니다.

모든 육체를 죽이는 것입니다.

모든 육체, 모든 자아가 광야에서 다 엎드러지기까지 역사하는 것이 말씀입니다.

 

말씀이란 죽이는 것입니다. 나를 죽이는 것입니다. 옛사람을 죽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죽어야, 내 안에서 예수가 사시기 때문입니다.

옛사람이 죽어야 새 사람이 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승리의 비결이며, 열매의 비결이며, 믿음의 비밀입니다.

 

말씀을 묵상하고, 큐티를 하고, 나름대로 적용을 하고.. 그것은 물론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말씀의 중심, 말씀의 핵심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부분적으로 좋고, 좋아하고, 그런 말씀이 있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런 말씀을 좌우명으로 삼고 살아가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말씀의 중심원리를 이해해야 합니다.

 

말씀은 죽이는 것입니다.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쪼개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가 없습니다.

말씀의 역할은 몽학선생입니다.

‘아, 나는 안 되는 구나.. 나는 끝이구나..’ 이렇게 절망시키고 낙담을 일으키고

그리스도 아래 엎드러지게 하는 것이 말씀의 역할입니다.

 

율법이 없으면 우리는 자신이 죄인인 것을 모릅니다.

거룩하라, 순종하라, 순결하라.. 그 말씀을 듣고 지키려고 하다보니

내가 더럽고 순종은 커녕, 욱하는 성질이 있고 못됐고..

그러한 자신의 본질적인 모습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롬7장의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절망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7장의 절망을 충분히 경험하지 못하면, 로마서8장의 영광을 맛볼 수 없습니다.

얼어붙은 겨울이 지나고 생명의 봄이 오는 것처럼, 죽음 후에 부활이 있는 것처럼,

로마서7장의 처절한 절망을 충분히 통과한 후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나를 해방했다8장의 환희의 감격이 터지게 됩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은

먼저 죄와 사망의 법으로 죽은 이들이 경험하는 것이지

아직 자기의 처절한 사망성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들이 경험하는 것이 아닙니다.

새생명 이전에 먼저 죽음이 있습니다.

그 죽음을 일으키는 것이 말씀의 능력이며 광야의 훈련입니다. 

 

광야란 바로 이 로마서 7장이 이루어지는 과정입니다.

‘나는 안 되는 구나..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안 되는 구나..’

그렇게 절망을 경험시키는 훈련과 연단의 시기입니다.

‘내 안에는 선한 것이 없구나.. 내 안에는 오직 이기심과 사악한 자아와 사망 뿐이구나.’

이것을 처절하게 깨닫고 경험하는 곳이 광야입니다.

 

주님은 여인을 보고 마음에 음란한 상상을 하면 간음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눈이 범죄하면 빼어버리라고 하셨습니다. 손이 범죄하면 찍어버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문자적으로 순종해서 손을 찍어 버리고, 눈을 빼버린 분은 안 계시겠지요?

그것은 철저하고 완벽하게 살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너희는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육체와 자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육체와 자아가 해야할 것은 죽는 것뿐입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가 더 이상 우리 자신으로 살지 않고

그리스도로 인하여 살게 되므로.. 율법의 의를 이루고, 선한 열매를 맺게 됩니다.

 

승리의 삶의 비결, 열매를 맺는 비결은

오직 육과 자아가 죽고.. 내 안에서 그리스도가 사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율법은 (완벽하게) 지키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정죄하고 죽이려고 주신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참 모습을 보게 하려고 주신 것입니다.

폐부까지 완전히 썩어서 문드러진 우리 자신을 보라고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너희는 죽었다 깨어나도 안 되니까 너희 힘으로 살지 말고

나를 믿고, 나를 부르고, 나를 바라보고, 나를 의지하라..

그렇게 인도하시기 위하여 주신 것입니다.

 

아직 자신이 고상한 사람인줄 아는 사람은 아직 말씀을 모르는 것입니다.

아직 자기 자존심이 있고 자기가 괜찮은 사람인줄 아는 사람은

말씀의 의미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씀을 모르고 자신을 모르니까

자기를 높이고 사소한 일에 상처를 받으며 억울해하면서 삽니다.

 

아직도 자기 속에 가득한 사망을 모르고,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면서 삽니다.

심지어 자기 신앙이 최고라고 여기며, 남들이 한심하다고 판단하면서 삽니다.

그런 이들은 아직도 그리스도를 붙잡지 않고, 자기의 의를 붙잡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아직도 자기 힘으로 노력하고 살려고 합니다. 그들은 아직도 어둠 속에 있는 것입니다.

 

말씀의 진리를 모르면 자꾸 자기가 행하려 하고 노력을 하게 되며

자기 의가 나와서 자신을 대단한 존재로 여기게 됩니다.

그러나 말씀을 깨닫고 모든 의와 열매와 생명이

오직 그리스도로부터 나오는 것을 알게 되면, 자기를 드러낼 수가 없습니다.

 

흉악한 죄인 쓰레기인 자신에게 베푸신 주님의 은총만을 한 없이 높이고

그 발 앞에 엎드리기만을 원하며

자신을 치는 이들에게 상처받지 않고, 자신을 높이는 이들에게 상처를 받게 됩니다.

 

어떤 신자들은 학벌이나 용모나 환경 등으로 인하여

우월감을 가지거나/ 열등감을 가지거나 합니다.

세상 사람이 그렇다면 그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신자도 그러한 상태라면 그것은 참으로 우스운 일입니다.

 

그것은 이들이 아직도 영의 세계를 모르고 세상에 매어있고

자아에 매여 있는 것을 보여줍니다.

어떤 사람이 사형선고를 받았다면 그의 학벌이나 용모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살리는 것은 영이며 육은 무익한 것입니다.

우리를 사망에서 살리는 것은 그 학벌이나 용모나 어떤 조건도 아니고

오직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가 없습니다.

의를 행하려고, 죄를 끊으려고.. 아무리 하려고 애를 써도 안 됩니다.

그게 가능하다면 주님이 십자가를 지실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할 수 없는 것들이

자기 죽음을 경험하고, 자기를 주님께 드리고

주님이 실제적으로 우리 안에서 살게 될 수록.. 우리는 변화의 열매를 갖게 됩니다.

 

죄를 이기려고 온갖 애를 썼을 때는 할 수 없었던 것이

우리 안에서 새 역사를 이루시는 성령, 그리스도의 영이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죄를 이기게 되고 승리의 풍성한 변화와 열매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승리란 죽음의 분량만큼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실제적인 죽음이 이루어지는 곳이 광야입니다. 육이 죽는 곳이 광야입니다.

그 죽음이 이루어져서 드디어 가나안의 입성,

정복의 역사와 풍성한 삶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아직 어린 신자들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하여 모르기 때문에

자기의 애정을 버릴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그것이 천국에 방해가 되는 줄을 전혀 모릅니다.

이들은 혈연에 대한, 자기 혼의 애정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을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들은 육신의 만족과 즐거움을 버릴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이들은 이미 사형선고를 받은 육체의 욕망에 따라 사는 것이, 왜 잘못인지를 모릅니다.

죽은 육체를 따라 살때 죽음이 오며, 산 영을 따라 살 때 진정한 삶이 오는 것을 모릅니다.

 

그들은 왜 요셉(자식 사랑)이 없어져야 했는지, 베냐민(자식 우상)이 위험에 처하게 되는지,

왜 이삭을 버려야 하는지, 왜 라헬은 빨리 죽었는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저 자기 자존심을 세워달라고,

자기 소원과 욕망을 이루게 해달라고 금식하며 기도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미련을 버리지 못하며, 자기를 포기하지 못하고, 세상을 포기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나는 장가들었으니 바쁘고, 소를 샀으니 가봐야 하고

주를 따르겠지만 장사를 한 후에 따르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잠에서 깨어날 때, 그는 비로소 꿈의 허망함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주를 갈망하지 않은 삶, 주를 향하지 않은 내 멋대로의 삶은

곧 죽은 삶이며, 허망한 삶이며, 아무 의미도 가치도 없는 삶인 것을

우리는 반드시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광야는 육신적이고 혼적인 것들이 처리되는 장소이며 기간입니다.

그러한 것들은 다 하나님의 나라에게 기업을 얻지 못하기 때문에

광야의 기간 동안 처리되어.. 영의 새생명이 일어나도록 자리를 비켜주어야 합니다.

 

그것은 나무 잎의 아름다움과 풍성함들이 다 죽어 떨어지고

주위 환경도 얼어붙은 죽음을 통과한 후에.. 봄이 되고 새생명이 일어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신앙의 과정은 첫 번째 애굽에서의 은혜의 시기,

둘째 광야에서의 훈련과 굴복이 이루어지는 시기,

그리고 세 번째로 가나안에서 신부되신 주님과의 연합이 이루어지고

친밀한 교제와 정복전쟁이 이루어지는 시기입니다.

가나안에서는 ‘천국에 가까운 은총’을 누리며

신부와 용사, 즉 친밀함과 승리의 열매를 누리게 됩니다.

 

 

◑3. 열매와 성숙의 시기 / 가나안 / 신앙의 장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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