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의 의미 재발견 벧전5:10 편집글
고난주간을 앞두고, 또한 사순절을 지나면서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기 위해서,
<고통의 의미 재발견>이란 주제를.. 묵상하면서, 기도해 보려고 합니다.
최근에 이 블로그에 게시된 설교문 중심으로
<고통의 의미 재발견>이란 주제로, 재구성 해 봅니다.
이 세상에서 고통이 없는 사람은, 다운 증후군 같은 정신질환자를 빼고는, 없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의무적으로 주시는 <고통>이라면,
그 의미를 긍정적으로/창조적으로 재발견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1. 고통의 환경에서 자족하기 <#2352에서 가져온 글
▲고통을 허락하시는 이유는.. 고통 속에서만 되는 성장이 있기 때문입니다.
고통이 없으면.. 성장도 안 됩니다.
그래서 고통의 환경까지도 내가 자족하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하는 연습을 해 나갑시다.
한 그러면, 일평생 후회, 탄식하게 됩니다. 고통은 일평생 나를 따라다니니까요!
'믿음이 성장하면 고통이 없어지겠지?'
맞습니다. 삶의 염려 등 쓸데 없는 고통은 없어집니다.
그러나 이 글을 끝까지 읽어보시면, '쓸데 있는 고통'에 대해 계속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성장하더라도.. (쓸데 있는) 고통은 결코 없어지지 않습니다.
①창39:3절에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서 형통하였다고 했는데,
그 형통의 결과라는 것이.. 종살이 상황에서 더 악화되어 옥살이하게 됩니다.
그런데 또 ‘감옥에서도 요셉이 형통하였다’고 합니다. 39:23
우리 생각에는, 전혀 형통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데.. 감옥에서 형통해 봤자이지 않습니까?
(성경이 말하는 형통은 ‘하나님이 함께 하심’입니다.
‘환경의 형통’이 아닙니다.)
②창28장에, 벧엘에서, 하나님은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약속해 주십니다.
‘네가 어디를 가든지 내가 너를 지켜 주겠다’고 창28:15
그랬다면.. 라반에게 가서 속임을 당하지 않아야죠. (임금 10번 변역, 결혼 속임 등)
그리고 그의 삶이 일평생 평탄해야죠.
그런데 야곱은, 노후에 자기 삶을 회고하면서 '험악한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물론, 그 험악한 삶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벧엘의 언약대로, 늘 야곱을 지켜 주셨습니다.
③다윗이 사무엘에게 기름부음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날 이후에 성령에 크게 감동되면서, 동시에 고생길이 시작됩니다.
(남들 못 받는) 기름부음을 받았으면.. 축복/형통/대박의 문이 활짝 열려야 하는데..
대신에, 뜻밖에도, (남들 안 겪는) 고생길이 활짝 열렸습니다.
④이스라엘도..
하나님이 사랑해 주셔서, 그 각각의 이름까지 다 기억하고 계시지만
바벨론의 70년 포로생활을 허락하십니다.
⑤나도 마찬가집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해 주시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내가 겪는 고통/환란/괴로움을.. 무조건 면제해 주시지는 않습니다. "꿈 깨십시오!"
오히려 (예수 안 믿는 사람들보다) 더 심한 고통/환란/괴로움을 당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나의 인격 성숙이요, 신앙의 연단이요, 믿음의 시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을 만드시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지만, 내 삶이 계속 괴로운 이유입니다.
요셉은.. 고통 후에.. 용서의 사람이 되고, 애굽을 통치할만한 역량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야곱은.. 시련 후에.. 회개하고, 이스라엘 12지파를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환란을 통과한 후에.. 예수님을 본받은 넓은 마음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바벨론 포로 후에.. 하나님의 언약 백성의 사명을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구속사history>에서, 자기 시대에, 자기 사명을 잘 감당했습니다.
고난을 통과하면서,
하나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으로 점점 빚어져 갔던 것입니다.
일평생 고난을 당하면서.. 일평생 변화되어져 갔습니다.
나도..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나를 형통케 하시지만
환란/시련/역경/고난을 통과하게 하심으로써 (면제가 아닙니다. 꿈 깨세요!)
‘원래 내 수준보다 월등한 인생’을 살게 하십니다. 구속사(구원의 역사)의 주인공으로 써 주십니다.
개인적으로, 제게 주어진 상황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고,
불평하지 않고, 하나님의 완전한 섭리와 전능한 지혜를 믿게 된 것은,
즉 ‘하나님이 나에게 최적의 현재의 상황을 알아서 마련해 주셨다’고 믿게 된 데는
7~8년 이상 수년이 걸린 것 같습니다.
▲‘그렇게 모든 주어진 상황을 자족/만족하고 살면.. 발전이 없지 않느냐고요?’
(여기서 ‘환경’과 ‘인격’을 구분해야 합니다.)
내면적 인격/신앙/믿음은.. 반드시 계속 발전, 성장해야 합니다.
그러나 외부적 환경/여건/상황은..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자족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전능하신 섭리로, 다 알아서, 가장 좋은 환경을 주셨다고요!
그것을 불평하지 않고, 고스란히 받아들이는 것이.. 진정한 믿음이 아닐까요?
바꾸어 말하면, 내 환경과 처지가, 내 생각대로, 내 기도응답대로 척척 좋아진다면
하나님이 진정 원하시고 바라시는.. 나의 신앙인격적 성장이 안 일어나기 쉽다는 것이요,
결국은 그것이 내게도 좋지 않다는 것입니다. 내 사명도 못 감당하게 되고요...
(이 글의 주제는, 이런 이유로... 고통을 수용하고, 고통을 감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불평만 하지 말고요!)
여러분, 성경에 '고난 가운데 너희를 온전케 한다' (벧전5:10) .. 이런 식의 말씀은 꽤 나옵니다.
그런데 '축복 혹은 풍부함 가운데 너희를 온전케 한다' .. 이런 말씀은 안 나옵니다.
우리가 고난 없이/인격의 성장 없이 모든 게 잘 되면.. 반드시 게을러지고, 교만함을 막을 수 없습니다.
또한 모든 게 막히고 안 풀리면.. 핑계, 원망, 남 탓합니다. 고난 없이 살았던 사람의 특징입니다...
◑2. 자기 사명을 감당하는 데서 오는 <고통>
이제까지 나의 기쁨의 근거는.. 주님이 뭔가 내 기도를 응답해 주시고, 내 필요를 채워주시고,
내 소원을 들어주셔서.. 내가 잘 풀리고, 내가 잘 되어서.. 기뻤습니다.
그러나 내가 앞으로 믿음이 성장해서 느껴야 하는 기쁨은..
아가서에 나오는 '솔로몬의 가마'처럼
신랑되신 주님을 내가 모시고 가는 데서.. 즉, 주님을 섬기는데서 오는 고통..
그것을 진정으로 내 기쁨으로 삼도록.. 내 기쁨의 근거를 업그레이드 해야 하겠습니다.
즉,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데서 생기는.. 고통과.. 동시에 기쁨입니다.
아래 설교문이 그 내용을 자세히 설명합니다.
◑3. 세상과 불화하는 데서 오는 고난
◑4. 영생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고난
알렉산더 대왕에 관한 다큐멘터리 TV프로를 시청했습니다.
맨 마지막에, 왜 알렉산더가, 그 젊은 나이에, 만족하지 못하고,
페르시아를 넘어 인도까지 정복 야욕에 쉬지 않고 불탔는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당시 헬라 사회에, '내세관'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전부이고,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다'.. 이런 가치관을 누구나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알렉산더를 위시하여, 헬라 사람들은
'내가 죽기 전에 어떻게 해서든지 큰 공을 세우고, 업적을 남겨놓아야 하겠다' 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천국을 확실히 보지 못하면, 알렉산더와 비슷한 생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이 전부이고,
어떻게 해서든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 세상에서 성공하고, 출세하고, 잘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천국과 영생이 자기 눈 앞에, 실감나게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현실을 무시하라는 뜻이 아니라) 오늘날 내가 현실에 과도하게 목숨까지 거는 것은,
(알렉산더 대왕처럼) 천국이 실감되지 않기 때문은 아닌가요?
아래 설교문은, 우리가 천국의 관점에서, (현실의 관점이 아니라)
오늘 현실의 문제(고통을 포함해서)를 봐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남자들은, 군대에서 고생하던 시절이.. 그 당시에는 절망적인 고통이었지만,
지나고 나서 회상하면, 이구동성으로 '군복무는 필요한 고통'이었다고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내가 당하는 모든 고난도
나중에 영생의 관점에서 회상하면, '꼭 필요한 고난'이라는 것입니다.
이같은 영생의 관점은, 오늘 내가 당하는 고난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줍니다.
고난에 대해 무조건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기꺼이 수용하게 합니다.
기왕 군대생활 하는 것이라면.. 적극적으로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5. 자기 죄로 인한 고난
이 부분은, 많은 분들이 종종 다루시므로, 여기서 따로 다루지 않습니다.
다만 두 가지만 스스로 기도하며 짚어 봅시다.
*죄를 용서하시는 주님의 십자가를 내가 믿는가?
*나는 회개했는가?, 내 회개가 주님께 받아들여졌는가?
그러나 이런 자기 죄로 인한 고난도, 쓸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요나를 예로 들면, 자기 죄로 인해서, 물고기 배속에서
거의 '물고문 수준으로' 큰 고난을 당하면서 회개합니다.
그 후에 그가 육지로 토해졌을 때, 그는 니느웨로 안 갈 수 없었을 것입니다.
까불고 불순종 하다가는.. 또 물고기 배 속으로 들어가서, 또 끔찍한 물고문을 당할지 모르니까요.
요나는, 이판 사판 심정으로 니느웨 성에서 회개를 촉구했을 것입니다.
그러자 니느웨 사람들은 '죽음의 위협'을 느꼈습니다.
요나의 목소리에는 '죽음의 현장 체험'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마 요나가, 순종해서 순순히 니느웨로 가서, 회개를 선포했더라면
그 악독하기로 소문난 니느웨 사람들이 아마 이렇게 반응했을 것입니다. '너나 잘 하세요!'
그러나 죽다가 살아난 요나의 음성은.. 니느웨 사람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죄로 불순종하다가 ‘죽을 뻔했던 고난’까지도.. 모두가 은총입니다. 쓸데 있습니다.
이번 사순절과 고난주간에,
나의 고난의 섭리와 의미를 생각하면서
자꾸 괴로워하는 삶을 살지 말고, 그런 삶은 이제 그만하고,
고난을 주신 주님께 감사하고, 주님의 섭리를 믿는 신앙을 가져 봅시다. ▣ 고난의 신학, 영광의 신학
'분류 없음 > 2010'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경은 피의 역사 (0) | 2010.03.19 |
---|---|
암세포도 자신의 일부로! (0) | 2010.03.18 |
불편한 소식 2358 (0) | 2010.03.17 |
여호야긴의 복권 2355 (0) | 2010.03.15 |
마지못해서라도.. 2354 (0) | 2010.03.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