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한 소식 갈1:10 -스크랩 출처 보기-
내가 사람을 기쁘게 한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 갈1:10
▲복음이란 말의 뜻은 ‘기쁜 소식’이다.
그런데 4복음서에서의 예수님의 선포는 심판이요, 전쟁이요,
원수 되게 하는 것이며, 싸우도록 검을 주시기도 하셨다.
너희가 세상을 사랑하면.. 하나님과 관계없다고 얘기하셨다.
도덕적이지도 않다, 부친을 장사하고 난후에 주님을 따르겠다하니
죽은 사람에게 신경 쓰지 말고 자신만 따르라 한다.
제일 껄끄러운 말씀은, 부자는 천국에 못 간단다,
차라리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단다,
4복음서에서 모두 주님의 선포는.. 이렇듯 상당수가 불편한 말씀들이다
▲사도 바울도 복음을 전하면서 말하기를
“내가 사람을 기쁘게 한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고 하였다.
도대체 ‘불편한 소식’을.. 왜 ‘복음’이라 말을 하였을까?
세상의 것을 포기하라는 것이다,
그래야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복음인 것이다.
세상의 것을 사랑하면 그리스도와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있는 것 가지고 베풀라는 것이다.
그래야 천국에서 상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을
사람들이 얼마나 견디기가 힘이 들었으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을까?
이 십자가사건의 중심에는 -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가장 잘 알고,
잘 섬긴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바로 그들에 의하여 일어난 사건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심으로,
주(主)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
그러니 더욱 싫은 사건이 된 것이다.
사도들이 복음을 증거 할 때에
“너희들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나사렛 예수가 - 주主와 그리스도가 되셨다”
라는 이 소식을 전하였다.
그러자 이 불편한 소식을 전하지 못하게 하려고 핍박하고 죽이기까지 한 것이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는 도다,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선지자들을 저희가 죽였고,
이제 너희도 그 의인을 잡아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너희가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 하였도다 하니라"(행7:51~53)
이 설교를 들은 사람들이 귀를 막고 이를 갈면서 스데반을 돌로 쳐 죽였다.
불편한 소식 이 불편을 주는 정도가 아니라, 살인을 유발시킨 것이다.
▲이 모습은 오늘날에도 복음을 전하는 교회에서 현재진행형으로 나타나고 있다.
사실 복음이란! 기쁜 소식인데, 그런데 바울 사도는
자기가 사람을 기쁘게 한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고 하였다.(갈1:10).
그러면 복음에 도대체 무엇이 담겨 있기에, 사람들이 기뻐하지 않고 배척하는 것일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증거 되기에 그렇다.
그러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을까?
십자가의 예수는 무능한 예수이다.
십자가에서 내려오면 믿어주겠다고 하였는데 내려오지 않았다.
이것이 그들에게는 무능한 것으로 보였다. 약한 모습으로 보였단 말이다.
율법에 의하면 저주 받은 죽음이다.
그래서 모두가 외면하고 돌아선 십자가가 되었단 얘기다.
▲오늘도 성경은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너무나 불편해서 귀를 막아 버리고 싶은 말씀이 얼마나 많은가?
사람들이 종교를 선택하고 신을 섬기는 것은,
무언가 세상의 영광이나 능력을 바라고 나오는 것인데,
이런 것은 마귀가 줄 수 있다고 예수님을 유혹한 내용 속에 들어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땅에 속한 것들을 구하고,
눈에 보이는 것들을 구하는 것은, 이미 진리의 길에서 벗어난 것이다.
이런 진실에 대하여 사람들은 여전히 귀를 막고 있다.
그러니 성경의 예수가 아닌 다른 예수! 즉 종교생활 잘하고 복 받아 부자되고,
출세하고, 자녀들이 남보다 잘되고,
그리고 천국 간다는 논리로 변형시켜..
복음 아닌 거짓논리로 교회에 자리 잡아..
(복음을) 불편한 소식이 아닌 복 받는 소식으로 변질시켰다,
▲그래서 하나님은.. 들을 귀 있는 사람만 듣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조치이기도 한 것이다.
허다한 무리가 함께 갈 쌔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눅14:25~27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부(富)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딤전6:8~10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요일2:15~16
어느 한 말씀 불편하지 않는 말씀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말씀 앞에서 자신의 죄인 됨을 알고,
믿음의 주(主)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만을 바라봄으로
이 말씀들이 위로와 소망과 기쁨이 되는 사람은
참으로 은혜의 사람이요 기적의 사람인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려지는 것은.. 기적이란 말이다.
*관련글 : 세상과 불화하라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지 않는 사람 고후2:17, 4:2 10.03.07.설교스크랩/정리
우리 모두에게 두려운 말씀입니다.
▲타종교의 왜곡의 역사
불교를 창시한 석가모니의 핵심 사상은 잘 아시다시피 '무아無我'사상입니다.
즉, 나는 실재하지 않는 '무아'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실재하는 존재인 것처럼 착각하는 것으로부터
생로병사의 고통이 수반되므로
자기가 실재하지 않는 '무아'임을 깨달음으로써
모든 고통에서 부터 해방될 수 있다고 설파한 석가모니는
자기 사후에, 자신의 시신을 화장할 것을 제자들에게 명령했습니다.
자신의 시신을 화장함으로써, 제자들에게, 인생 '무아'를
자신의 죽음으로써 다시 한 번 각인시켜주려 했습니다.
그러나 석가모니의 시신을 화장한 제자들이 가장 먼저 한 것은
젓가락으로 재를 뒤지면서 사리를 찾는 일이었습니다.
스승은 자신의 죽음으로도 ‘인생 무아’임을 각인시켜 주려했는데,
그 제자들이 관심 가졌던 것은 ‘무'가 아닌 '유'였습니다.
그 이후로 스님이 입적한 뒤에, 재속에서 사리를 찾는 불교의 관습은
오늘날까지 2500년 동안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자기 죽음으로도 인생 무아임을 일깨워 주려했던 그 스승의 제자들이
대를 이어가며 '유'에 집착하고 있다면
그 불자들에 의해서 석가모니의 가르침이 제대로 계승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그 불자들에 의해 석가모니의 가르침은 왜곡되지는 않겠습니까?
불경을 왜곡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불경과 무관한 사람이 아닙니다.
불경을 아는 불자가 불경을 왜곡하기 마련입니다.
이슬람교의 '코란', 힌두교의'베다'역시
그 종교를 믿는 사제들과 교인들에 의해.. 왜곡되어 왔습니다.
종교의 역사는 종교인의 자기 종교 경전에 대한 왜곡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님은.. 종교의 역사가 스스로 우리에게 입증 해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사람들의 경우는 예외인가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제가 '인간의 일생'이라는 책에서도 상세히 밝혔습니다만
불행하게도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1. 하나님 말씀의 왜곡의 역사
▲1. 아담과 하와의 왜곡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고, 그들로 에덴동산에서 살게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창2:16~16 주1)
그러나 사탄의 유혹을 받은 하와는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창3:3
하와는 ‘반드시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죽을까 하노라’로 교묘하게 왜곡시켰습니다.
이유는 단 하나, 사탄의 유혹 앞에서 끓어오르는 욕망으로 인함이었습니다.
그리고 하와는 아무 거리낌 없이 금단의 열매를 먹었습니다.
그것은 그 열매를 금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한..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본래 그 열매를 먹지 말라는 명령을 먼저 받은 사람은 아담이었음에도
아담역시 하와가 내미는 그 선악과를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먹었다는 것은
아담도 속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고 있었음을 뜻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을 최초로 받았던 최초의 인간에 의해
최초로 왜곡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왜곡의 결과는.. 불순종과 타락이었습니다.
▲2. 출애굽 백성들의 말씀 왜곡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의 노예살이에서 해방된 뒤에
시내산 아래에서 진을 쳤을 때의 일입니다.
계명을 받으러 시내 산 정상으로 올라간 모세는
몇 주가 지나도 되돌아 올 기미가 통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에 백성들의 요구에 따라서 아론은
백성들이 가지고 온 금붙이로 금송아지를 만든 뒤에
그 앞에 제단을 쌓고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모든 백성이 그 귀에서 금 고리를 빼어 아론에게로 가져가매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금 고리를 받아 부어서 조각칼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 하는지라
아론이 보고 그 앞에 제단을 쌓고 이에 아론이 공포하여 이르되
내일은 여호와의 절일이니라 하니..." 출32:3~5
아론은 자기 자신이 손으로 빚어 만든 금송아지를
‘자신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낸 너희 하나님’이라고 공포함으로써
영이신/말씀이신 하나님의 형상을.. 금송아지 우상으로 왜곡시켜버렸습니다.
아론은 성경의 역사상 첫 번째 대제사장 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첫 번째 대 제사장에 의해서
‘하나님은 영’이시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무참하게도 금송아지로 왜곡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금송아지는.. 모세가 던진 계명의 돌판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박살났습니다.
우리는 그 어이없는 그 금송아지 사건을 통해서 두 갈래의 영적지도자를 만나게 됩니다.
①아론 형
즉 시류에 편승하면서 대중에게 영합하는 갈래로써,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기득권과 영향력을 지키고 또 확대하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은 늘 그런 사람들에 의해 왜곡되었습니다.
②모세 형
대중의 인기는커녕, 비난/ 모함/ 비판/ 원망을 받으면서도
마땅히 이르러야 할 약속의 땅으로 대중을 인도해 가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런 사람들에 의해 지켜집니다.
가슴 아픈 것은, 어느 시대든지
아론 형 지도자들이, 모세 형 지도자들보다, 압도적으로 많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의 증언입니다.
▲3. 제사장들의 말씀 왜곡과 선지자의 등장
하나님이 세우신 제사장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마치 하나님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모든 제사는.. 제사장들을 통해서만 유효했고,
제사장의 한마디 한마디는 하나님의 말씀처럼 간주되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경과하자 하나님께서는
제도권 속의 제사장 외에, 제도권 바깥의 선지자들을
별도로 함께 쓰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예를 들면, 다윗 왕 시절에
사독, 아비아달 같은 제사장들이 분명히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더불어, 제도권 밖 나단 선지자를
당신의 도구로 들어 쓰셨습니다.
왕상17장의 엘리야 선지자를 기점으로,
하나님은, 더 이상 제도권속의 제사장들을, 하나님의 도구로,
우선적으로 선택하여 쓰시지 않으셨습니다.
그 때부터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하나님께서는 제도권 밖 선지자들을, 당신의 도구로 주로 쓰셨습니다.
이 시기에 제사장으로 제몫을 다한 사람은, 성경에 여호야다 정도만 나옵니다.
물론 성경에 안 나오는, 무명의 충성스런 제사장들도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 왕을 지나서.. 엘리야 때부터는
본격적으로, 주로 선지자들이 충성스럽게 활동하는 시기가 되었습니다.
에스겔, 예레미야는 특별히 제사장 출신의 선지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선지자로 활동할 때에는
더 이상 제도권 속에 속해있지 않을 때였습니다.
◑2. 하나님 말씀의 보전의 역사
그럼 ‘하나님께서는, 왜 제도권 밖에 있는 선지자들만을, 당신의 도구로 사용하셨을까요?’
▲1. 하나님 말씀에 철저히 순종한 엘리야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먼저, 하나님께서 엘리야 선지자에게 하신 말씀 속에 찾을 수 있습니다.
너는 여기서 떠나 동쪽으로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고
그 시냇물을 마시라. 내가 까마귀들을 명하여 거기서 너를 먹이게 하리라
저가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하여 곧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머물매... 왕상17:3~5
극심한 기근과 가뭄이 이스라엘을 강타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했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기근 때에는, 도시로 가야 그나마 먹을 것을 구할 수 있습니다.
양식을 생산하는 농촌은, 정작 기근이 들면, 가장 먼저 식량이 떨어져버립니다.
당시 엘리야는, 북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에 살고 있었습니다.
몰아친 기근을 뚫고 생존하기 위해서는, 대도시 사마리아를 떠나서는 안 됩니다.
더욱이 하나님께서 가라고 말씀하신 곳은, 전혀 엉뚱한 곳이었습니다.
지리학적으로, 사마리아에서 동쪽으로 가서, 요단을 건너면,
황량한 동굴이나, 척박한 광야 땅이 나올 뿐입니다.
기근에 생존은커녕, 굶어죽기에 안성맞춤인 곳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야 선지자는
‘까마귀를 통해 너를 먹일 것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요단을 건너, 길르앗 협곡의 그릿 시냇가로 갔습니다.
만약에, 까마귀가 매일 먹을 것을 물어오지 않는다면, 그 기적이 매일 일어나지 않는다면,
엘리야는 영락없이 굶어 죽어야할 판국이었습니다.
세상에 까마귀가, 그것도 매일 음식을 물어다 나르는 것은
상식적으로 판단하면, 그보다 더 황당한 이야기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야 선지자는, 자기 육적 양식을 위해서
어떤 형태로든,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인생을 위한 종속 도구가 아니라,
자기 생명을 걸고, 절대/철저히 순종해야 할 가치로 지켜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엘리야 선지자의 그 절대적 순종을 기점으로
하나님께서는, 그 이후부터
선지자들만을 당신의 도구로 쓰셨습니다.
▲그러나 엘리야 당시의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들의 유익을 위한 도구로, 전락시켰습니다.
종교적인 기득권이나, 목회적 야망, 명예심, 조직논리에 대한 집착 등
자기 인간적 욕망들을.. 어떤 유대종교적 시스템을 통해 획득하려고 했습니다.
제사장들은 화려한 예복을 입고
매일 성전에서 장엄한 제사를 주관했지만,
바로 그 제사장들에 의해, 하나님의 말씀이 왜곡되어
풍요를 상징하는 바알 우상숭배를.. 성전 안으로까지 끌어들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강도의 소굴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왜곡하지 않는 선지자들을
당신의 도구로 들어 쓰셔야 했습니다.
(물론 선지자들 가운데도, 타락한 거짓선지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렘23:30~32/ 주2)
거짓선지자들도, 제사장과 마찬가지로, 자기 목적을 위하여 하나님 말씀을 왜곡했습니다.)
이처럼 성경은, 인간의 역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왜곡의 역사임을 우리에게 뚜렷하게 증언해 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불교신자나, 이슬람교 신자에 의해 왜곡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안다는 사람들,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안다는 직업적인 성직자들에 의해서.. 왜곡되어 왔습니다.
언제 어느 시대에서든지
절대다수는 항상 왜곡의 편에 서 있었습니다.
▲오직 소수에 의해서, 하나님 말씀의 순수성은 지켜지고, 보존되었습니다.
오직 소수만이
모세와 엘리야처럼
그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걸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세계의 역사는
언제나 그 소수에 의해 새롭게 정화되어져 내려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당신의 말씀을 왜곡하지 않는 사람,
당신의 말씀을 생의 목적으로 삼은 사람들의 삶을 통해
이 땅에 육화(인카네이션)하시기 때문입니다.
▲2. 사도 바울
바울 역시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수다한 사람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 고후2:17
2천년 바울 당시에
기독교 역사초기에
이미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했습니다.
‘혼잡하게하다’(카펠류오)는 말은, ‘행상’(카펠로스)에서 왔습니다.
이 지방 저 지방을 떠돌아다니며 물건을 파는 행상인들은,
포도주에 물을 타서, 양을 늘였습니다.
바울 당시에 수많은 사람들이,
불순한 자기 욕망/이득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했습니다.
원어적으로는, 말씀에 물을 탔습니다. 말씀으로 사기를 쳤습니다.
즉, 말씀의 뜻을 왜곡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단 한 번도
자기 욕망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한 적이 없었습니다. 고후2:17
바울의 관심사는 오직
하나님 말씀의 순전함을
자신의 삶으로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궤휼 가운데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추천하노라 고후4:2
여기에 ‘혼잡하다’는 말이 되풀이 되어 나옵니다.
그러나 여기서 사용한 헬라어는 ‘혼잡하다’는 ‘돌로오’로서 *카펠류오와 다름
그 뜻은, ‘미끼로 삼는다’는 의미입니다.
바울 당시에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욕망을 위하여, 미끼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기의 욕망의 성취를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미끼로 삼지 않았다(혼잡케 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오히려 자기 생명을 걸고,
그 말씀의 순수성을.. 선교와 순교로.. 끝까지 지켜내었습니다.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말씀을 변질시키는 자들을 뽑아 버리십니다.
바울 당시에, 자기 욕망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미끼로 삼아,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던 그 숱한 사람들이
도대체 다 어디로 갔습니까?
그들이 자기 생전에, 자기 욕망하는 것들을 다 얻었을망정
정작 그들 자신은.. 물거품처럼, 흔적도 없이 역사에서 사라져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
참수형마저도 마다하지 않았던 사도바울은
인류 역사를 새롭게 한 하나님의 통로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 가운데 지금도 살아있습니다.
그가 생명을 걸고 지키려했던 하나님의 말씀이
그를 영원토록 지켜주고 있습니다.
◑적용/ 마치는 말
하나님은 말씀이십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존재하시고, 말씀으로 말씀하십니다.
성경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끊임없이 왜곡했던 그 어리석은 인간들이
사실은 우리 자신의 모습들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단지 우리 자신의 출세와 성공을 위한 미끼로 삼아
마음껏 왜곡해 온 것은 아닌가요?
그 결과, 우리 가운데 말씀의 능력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영적무기력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자기 영혼과 타인의 영혼을 해치는.. 어리석은 삶을 살았을 수도 있습니다.
교회에 다니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지만,
그 배운 말씀이 세상에 빛이 되지 못하고,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내 이익과 성공을 위하여, 쟁투하며 살아오지는 않았는가요?
만약 그렇다면 우리 모두 참회의 절기인 사순절을 맞이해서
우리 어리석음을 하나님께 회개합시다.
그동안 알게, 모르게.
내가 정한 내 이기적 목적을 위하여,
그 목적에 부합되는 말씀들만 강조하고,
그 이외의 말씀은 파묻어버렸던
그런 말씀에 ‘물 탐’과, 말씀을 ‘미끼로 삼았던 일’을 회개합시다. 고후2:17, 4:2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 없이 그대로 전하는 것은
자신의 생명을 위협받는 일이기도 하므로
목숨을 걸고, 이 말씀의 순수성을 지켜내어야 합니다.
용기가 없으면, 손해 볼 마음이 없으면, 못하는 일입니다.
자기 목숨까지 바칠 각오가 아니면, 지키기 힘듭니다.
마귀가 강력하게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역사는, 언제나
이렇게 자기 목숨을 걸고, 하나님 말씀의 순수성을 지켜내었던 사람들에 의해서
오늘까지 이어져 내려왔음을.. 꼭 기억합시다.
그러면, 우리가 지키려는 하나님의 말씀이
도리어 우리를 영원히 지켜줄 것입니다.
모세, 엘리야, 예레미야, 에스겔, 예수님, 바울의 예에서 보듯이...
이런 사람들이, 오늘날 우리 시대를 새롭게 변화시킬 것입니다.
..................................
주1)
정녕(모트, surely) 죽으리라(타무트, thou shall die)로 번역된
히브리어로 ‘모트 타무트’는
사실 ‘죽는다’는 동사를 2번 되풀이해서 말씀하셨습니다.
히브리어 문법상 같은 동사를 두 번 반복하는 것은 강조 형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반드시 죽는다는 의미였습니다.
주2) 렘23:30~32
여호와의 말씀이라 그러므로 보라 서로 내 말을 도둑질하는 선지자들을 내가 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그들이 혀를 놀려 여호와가 말씀하셨다 하는 선지자들을 내가 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거짓 꿈을 예언하여 이르며
거짓과 헛된 자만으로 내 백성을 미혹하게 하는 자를 내가 치리라.
내가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으며 명령하지 아니하였나니
그들은 이 백성에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 복음 관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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