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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은 ‘하나님’을 나타내는가 2417

LNCK 2010. 4. 23. 21:00

◈내 인생은 ‘하나님’을 나타내는가, ‘나’를 나타내는가?             요17:6        09.09.20.설교대강녹취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요17:6


 

◑나의 정체성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있다.


자기 증명의 욕구

인간의 내면에는, 끊임없이 자기 속으로부터 밀쳐 올라오는 욕구가 한 가지 있다.

그것은 바로 <자기 증명의 욕구>이다.


세상 앞에서 당당하게 ‘나는 이런 사람이다.’ 라고

자기를 보여주고 싶은 욕구이다.


세상도 끊임없이 그것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다.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세요.’  

그것이 학력이든, 재력이든, 권력이든, 그 어떤 것이든지 간에

세상은 우리에게 ‘당신의 능력을 보여달라’고 쉴새없이 요구하고 있다.


그 결과, 학생들은 성적으로 자기 증명을 하려고 하고,

직장인들은 승진과 연봉으로 자기 증명을 하려 하고,

연예인들은 인기로 자기 증명을 하려 하고,

사업가들은 재력으로 자기 증명을 하려고 한다. 재계 몇 순위 등.  註1)


결론을 미리 말씀드리면, 성경이 말하는 인간은 본질적으로

자기 증명을 하는 존재가 아니라,

자기 속에 있는 그리스도를 증명해 보이는 존재이다.


인간의 자기 증명은, 밑 빠진 독에 물붓기다.

인간이 자기 증명을 완벽하게 해 낼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다.

인간은 전능한 신이 아니라,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 증명을 하려고, 애쓰거나 분투할 필요 자체가 없다.

    대신에, 자기 질그릇 속에 그리스도를 증명하는 존재인데...  


▲자기 증명의 욕구, 외모지상주의를 ‘어릴 적 사탕 보듯’ 해야..,

여러분, 어릴 적에 가장 부러웠던 친구가 누구인가?

아마 ‘동네 수퍼 집 아들’ 또는 ‘동네 제과점집 딸’일 것이다.

그 아이들은 과자나 빵을 마음 놓고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어릴 적에 그렇게 동경스러웠던 과자나 빵,

그런데 어른이 되고 나면..

‘내가 어릴 적에 왜 그랬던가?’ 하고 의아스럽게 생각된다.


내 신앙이 얼른 성장해서, 영적인 사람이 되어서,

‘자기 증명의 욕구’, ‘보여주기 문화’(외모지상주의)를

어릴 적 과자 쳐다보듯 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신앙적으로 어릴 때는..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자기 증명> 하기를 좋아했었다.

그러나 영적으로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내 속에 <그리스도를 자랑하고, 증명>해 보여주는 사람이 되어간다.


여러분, 성도마저 세상의 ‘자기 증명 문화’, ‘외모 지상주의 문화’에

편승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왜 성도가, 세상 문화를 따라가는가?


그 이유는, 세상 문화가 아직 자기에게 달콤하기 때문이다.

그 달콤함이 ‘어릴 적 사탕 보듯 해야’ 되는데..

아직 그게 너무 달콤하고 동경스러워 보이므로, 그것을 ‘배설물로’ 버리지 못한다.


그래서 그 솜사탕을 쫓아서 가보지만,

결국 남은 것은.. 실망뿐이게 되는데... ↙


▲아무리 ‘보여주는 문화’이지만, 인간이 보여주는 것은 불완전함 뿐이다.

여러분, 완벽한 정치인 없고, 완벽한 도덕군자도 없다.

완벽한 피겨 스케이팅 선수도 없고, 완벽한 영화배우도 없다.


한 때 완벽하게 보이더라도..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인간에게 결국 드러나는 것은.. 인간의 불완전함 뿐이다.


내가 완벽함을 절대로 보여줄 수 없는데,

왜 우리는 완벽한 모습을 보여주려고 일평생 안달하는가?

(자꾸 그러다가는 외식으로 빠지게 된다.)


▲나의 정체성은 내 속에 계신 그리스도께 있다.

그래서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는,

불완전한 내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완전하신 그리스도,

즉, 내 속에 계신 그 분을 보여주라는 것이다. ←설교문 제목


그러므로 오늘부터,

내가 세상에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를 절대 고민하지 말자.

내가 보여줄 수 있는 것은 ‘내 불완전함’ 뿐이다.


내가 세상에 보여줄 수 있는 것은

내 속에 계신 완전하신 그리스도’이시다. 할렐루야!


▲그런데 지금 내 속에 무엇이 담겨져 있는가?

그리스도께서 내 속에 충만하게, 풍성하게 거하고 계시는가?

만약 내가 내 속에 세상이, 그 정욕이 가득 담겨져 있다면,

비록 그리스도를 영접했다 하더라도, 그 분이 내 속에 충만히 거하실 수 없다.


여러분, 컴퓨터 게임에 중독된 사람은.. 그 얼굴 시선에 점점 초점이 없어진다.

왜냐하면 가상의 세계와 현실 세계를 점점 구분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음란물이나 음행에 중독된 사람은.. 그 얼굴이 탁해 보인다. 맑지가 않다.

돈독이 오른 어른은.. 그 얼굴이 옛날 10원짜리 동전빛깔처럼 누렇게 된다.


▲그리스도를 나타내려고 억지로 애쓸 필요 없다.

자기 속에 그리스도가 풍성히 거하시는 사람은,

반드시 그리스도를 자연스럽게 나타내게 되어있다.


향을 싼 종이에, 향내가 베여 있듯이,

그리스도를 모신 질그릇들은.. 반드시 그리스도가 자연스럽게 나타난다.


‘사람에게 내가 어떻게 보일까?’

이런 걱정은, 자기 속에 ‘자기로 충만한’ 사람들이 하는 걱정이다.

자기 속에 ‘그리스도로 충만한’ 사람은.. 그냥 자연스럽게 살아간다.

그리고 그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도.. 자연스럽게 나타난다.


예수님도 ‘사람이 등불을 켜서, 됫박 아래 두지 않고, 등경 위에 두어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게 한다.’고 말씀하셨듯이

자기 속에 ‘그리스도의 빛’을 가진 사람은, 반드시 등경 위에 두어지고,

그래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게 되어 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다.


▲‘진열대’가 아니라 ‘유물’을 보게 된다.

가끔 박물관에 가서 볼 때,

신라왕관, 고려청자, 이조백자 등을 받치고 있는 진열대/받침대가 있다.


사람들은 모두 다 그 유물을 주목하지,

아무도 그 유물의 받침대를 주목하지 않는다.


내 학력, 내 직장, 내 경력career

이런 것에 너무 신경 쓰지 마시라.

그것은 모두 ‘진열대/받침대’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너무 자기 자신의 외모에 주목하지 마시기 바란다.

사람들이 쳐다보는 것은, 당신 속에 있는 보배(그리스도)이지,

그 받침대(당신의 외모)가 아니다.

 


◑내 삶의 목적은 가 아니라 하나님


예수님의 지상사역에서.. 그 분의 삶의 목적은

자신을 드러냄이 아니요, 하나님을 드러냄이었다.

자신의 목적을 이루심이 아니요, 아버지의 목적을 이루어드리는 삶을 사셨다.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요17:6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그러하다면,

하물며 나는 어떠하랴!

나도 당연히, 내 삶의 목적이 (나를 드러내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어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


▲강물 위의 다리bridge가 아무리 멋있을지라도,

여러분, 간혹 강을 가로지르는 운치있고, 멋있는 다리를 보셨을 것이다.

그러나 다리는.. 사람이 머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지나가기 위해 존재한다.

 

크리스천은, 다리bridge와 같은 존재이다.

나를 통해서, 사람들이 하나님께로만 건너갈 수 있다면

내 인생은 정말 가치 있는 인생이 될 것이다.

내 다리의 운치와 멋을 보여주는 존재목적이 아니다. 


여러분, 공원 같은데, 아름다운 자연을 볼 수 있는 곳에, 벤치가 놓여 있다.

아름다운 산책로에 놓인 벤치.. 벤치의 모습도 역시 아름답다.

그러나 벤치는, 벤치를 아름답게 바라보라고 만들어놓은 것이 아니라,

그 벤치에 앉아서, 풍경을 아름답게 바라보라고 만들어놓은 것이다.


우리가 다 이렇게 벤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벤치 그 자체에 목적이 있지 않다.

그 벤치에 앉아서,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는데 목적이 있다.


오늘 우리 문화가 끊임없이 <자기존재를 증명>하려 하고,

<자기 능력을 보여 달라>고 하는 문화 속에서, 우리를 질식시키지만,

성도인 우리들은.. 달라야 한다는 것이다.


성도는 자기를 보여주는 존재가 아니다.

다리처럼, 벤치처럼, 자기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존재라는 것이다.


▲성도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는데

여러분, 집에 양초가 한 두 자루 있으실 것이다.

양초는.. 불을 붙이지 않으면, 아름답고 예쁘다.

그래서 일부러 진열장에 빛깔 좋은 양초를 장식해 놓는 집도 있다.


그런데 그 예쁜 양초에 불을 붙이고 나면,

양초는 이내 지저분해진다.

그렇다 하더라도, 촛불이 정말 빛이 되기 원한다면

자신을 태워야 한다.

자신이 지저분하게 되더라도.. 자신을 녹이고, 태워야 한다.


참 이상한 것은, 사람들은 자기가 빛이 되고 싶어 하는데,

자기(양초)가 녹아서 타 들어가는 것은.. 싫어한다.


소금이 세상에서 맛을 내려면,

자신이 녹아져야 한다.

자신의 존재가 사라져 없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존재가 사라져 없어지지 않고는.. 소금이 절대로 맛을 낼 수 없다.


그런데 우리는, 자신이 온전한 소금 결정체로서 (외모로 멋있게) 남아있기 원하면서

한편으로는 ‘나는 세상에 소금이 되기 원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모순이거나, 경험 부족이다. 이론만 알고 있을 뿐이다.

 

▲이 설교문의 주제는, <인간은 자꾸 스스로 목적적 존재가 되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계발이 유행하고, self-development

자기 증명을 하려고 발버둥치지만,

우리 성도들은 그게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면, 예수님이 아예, 자기를 목적하는 삶을 살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내가 (내 이름이 아니라)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요17:6

 

‘목적이 이끄는 삶’도 좋지만,

그 목적의 주체가 ‘하나님’이 되심을 명확하게 밝혀야 한다.

그 '목적이 이끄는 삶'의 주체가 만약에 '내가 잘 되는 삶'은..

결국 모래성을 쌓은 것처럼.. 허물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인간의 본능은.. 너가 네 인생에 목적이다. 가장 중요하다.. 이렇게 말하지만,

성경은.. 하나님이 네 인생의 목적이다. 가장 중요하다.. 이렇게 가르친다.

 

그런데 이런 삶이.. 이론은 쉬운데, 실제 삶은 결코 쉽지 않다.↙


▲여러분, 도구적인 존재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시라.  (↔목적적 존재)

「종의 마음」이란 책이 있다.

남아공의 어느 목사님이, 어느 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서,

전쟁지역과 가난한 지역을 걸어서 찾아다니면서,

길에서 만나는 홈리스, 마약중독자, 창녀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 그들의 발을 씻어주는 사역을 하였다.

그런 가운데, 그들의 영혼들이 치유되고, 회복되는 놀라운 역사들이 일어났다.


그 책 중간에 이런 얘기가 나온다.

그의 동역자 중에 한 사람이, 그 목사님께 이런 말을 했다.

“목사님, 제가 자원해서 사람들을 섬기는 종이 되는 것은.. 기쁘고 즐거운 일이지만,

사람들이 정말로 나를 종처럼 대우할 때는.. 참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크리스천이 되었다는 것은,

'내가 죽고 내 속에 그리스도로 사는 사람'이 되는 것인데,

정말 내가 예수와 함께 죽어서, 사람들이 나를 ‘종으로, 거지발싸개로’ 대하면..

그 현실이 무척 괴롭더라는 고백이다.

 

그러므로 '내가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 인생의 목적이시다'

이런 구호는 멋지지만, 내가 몸으로 살아내는데는.. 현실적으로 큰 고통이 따른다.


그래서 예수 믿는 것은, 탁상공론이 아니라, ‘십자가의 길’이다.

그러나 그 무시당하는 길을 의연하게 걸어가는 사람만.. 영광이 뒤따를 것이다.


▲여러분, 앞에서 찬양인도하는 찬양팀을 보면.. 부러우실 것이다.

그 모습이 참 아름답고 영광스럽게 보인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시간을 내어서, 모여서 연습하고, 무릎 꿇고 함께 기도하고,

어떨 때는 잘 못 한다고 욕 먹기도 하고,

정말 수많은 희생의 대가를 치른 결과.. 따르는 영광이다.


그렇지 않고, 만약에 적당하게 찬양을 인도한다면

이 찬양팀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타나지는 않으실 것’이다.

사람의 냄새나는 모습만 드러날 뿐이다.


찬양팀을 통해서, 설교자를 통해서,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이 나타나려면

정말 사람들 눈에 안 보이는 장소에서,

기도하고, 헌신하고, 거룩한 삶을 사는

그런 역사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이 찬송을 우리가 좋아하는 이유는,

우리 모두가, 어떤 존경/존중/목적이 되는 삶을 원하기 때문이다.


저 찬송 가사를 바꾸어 ‘당신은 봉사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으로 부른다면

초신자들은 싫어할 것이다.


그러나 여러분, 이 설교문에서 잊지 말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조차도

자신을 ‘자신의 삶의 목적적 존재’로 살지 않으셨다.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기 위해, 그 분은 자신을 ‘수단과 도구’로 드리셨다.


우리가 이런 사실을 깊이 묵상한다면,

절대 나는, 내 인생의 주인공이 될 수 없다.

(또 주인공이 되어봤자.. 냄새 밖에 나지 않는다고 앞서 설명했다.)


    오늘 나는, 나를 빛내기 위해서 하루를 살았는가?

    아니면 하나님을 빛내기 위해서, 오늘 하루를 살았는가?

    한 번 냉정하게 판단해 보자.



◑주님은, 우리를 믿어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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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1) 세상은 ‘보여주기 문화’(외모 지상주의)로 나아가고 있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개인기’가 있다.

사람들이 모여서 놀면, ‘개인기’를 보여주어야 한다.


결혼한 주부들이 모여서 이야기를 할 때면

자녀의 성적이든,

남편의 능력이든,

자신의 외모든... 뭔가를 보여주어야 한다.


대학을 졸업한 자녀는.. 부모에게 뭔가를 보여주어야 하고,

결혼을 앞둔 청년들은.. 뭔가(직장, 재산 등)를 보여줄 수 있어야 결혼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젊은 여성들은.. 성형수술을 해서라도, 아름다운 외모를 보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안타까운 현실이다.


여러분, 정말 예수를 만나면, 자신감이 생긴다.

사람으로서 일부 열등감이나, 일면 경쟁심리가 없을 수는 없겠지만,

그러나 그의 근본적 상태는 ‘자신이 존귀한 자’라는 것이다.

‘자기가 하나님의 존귀한 자녀’라는 자의식이 생긴다.


저는 그냥 2:8가르마를 계속 유지하고 살 작정이다.

머리를 지지고 볶고 파마를 해서, 뭔가 좀 바꿔보라는 요청도 가끔 받지만,


그러나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은,

나의 외모가 아니라, 내 속에 계신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에

저와 여러분 모두가

우리 외모보다, 속사람인 그리스도의 형상을

더욱 더 잘 가꾸게 되시기 바란다.                                                                              ▣ 복음 관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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