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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은 생명체 고전1:17~23, 고후3:18 블로그 스크랩, 축약, 출처
*원제목 : 주님과의 긴밀한 교제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계시듯이, 복음도 살아서 활동합니다.
생명이 없는 복음은, 즉 죽은 복음은, 즉 이론뿐인 복음은.. 복음이 아닙니다.
▲우리는 복음이라는 단어를 수없이 사용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진정한 복음이 무엇인지를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진정한 복음이 우리 가운데서 활동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복음의 놀라운 능력이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고 있지 않습니다.
어떤 공동체는, 교회 시스템이 매우 활발하게 돌아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가운데 복음의 그 놀라운 능력과 역사가
거의 나타나고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복음이 역사하는 곳에 당연히 나타나게 되어 있는
참다운 변화가 우리들의 삶 속에 거의 나타나고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습니다. 여전히 시기와 질투 가운데 있습니다.
그 프로그램들을 마치고 나면 일시적인 성취감은 있을지 모르지만,
진정한 주의 기쁨과 평강은 우리에게 없으며,
우리 영혼은 오히려 더욱 곤고하고 공허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의 상태입니다.
즉, 우리는 참다운 복음의 부재 가운데 살아갑니다.
▲그럼, 성경이 말하는 복음은 무엇입니까?
복음은 한마디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침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 말의 지혜로 아니함은...
...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고전1:17, 23
바울은 ‘복음’을 전한다고 해놓고, 1:17
그것을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1:23
또한 그것은 ‘말의 지혜로 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1:17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복음은 이론이 아닙니다. 말의 지혜로 아니함은...
복음은 생명(력)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전하니
복음을 전하거나/받아들이는 것은,
십자가와 그리스도에 대한 이론이나 지식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그리스도에 대한 생명을 전하고/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이 없는 복음은.. 복음이 아닙니다.
바울은 ‘생명’이라는 말 대신에, 종종 ‘능력’이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롬1:16,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전1:18
즉, 복음 속에는, 뭔가 꿈틀거리는 ‘생명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해서 ‘생명’이 없으면.. ‘복음’이 아닌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기 위하여, ‘우유와 우유병의 예’를 들어 봅니다.
우유병은.. 주님에 관한 이론적인 지식 혹은 다른 말로 해서 신학
우유는.. 주님을 우유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우유병은 우유를 담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유병도 중요합니다.
만약에 우유병이 우유에 비해 형편없이 작거나 혹은 구멍이 나 있으면,
우유는 다 땅에 쏟아져버리고 말 것입니다. 우유를 먹이지 못하게 됩니다.
이처럼 주님에 관한 바른 지식, 바른 신학, 바른 교리도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만약 우리의 신학이 찌그러지고 구멍 난 우유병과 같이 왜곡되고 잘못되어 있으면
우리는 우유로 비유되는 주님을.. 올바로 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유병이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우유병은 우유가 아니며,
우유병은 우유를 담기 위한 그저 수단에 불과합니다.
즉 주님에 관한 바른 지식이나 신학(우유병)은
주님(우유)이 아니며, 생명이 아닙니다.
종종 우리가 복음을 전한다고 하면서, 우유병만 갖고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껍데기는 전하는데, 그 속에 알맹이(우유, 생명)가 빠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간단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당신의 마음이 뜨겁습니까?
뭔가 속에서 운동하는 ‘생명, 능력’의 활동성이 느껴지십니까?
그러면 그것은 복음이 맞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전하는 내 마음이 냉랭하거나, 아무 감동이 없으면,
그것은 ‘우유병’만 들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리 예수 이름과 성경말씀을 외쳐도,
그 복음을 들은 사람의 마음이 변화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아무리 좋고 큰 우유병이라도, 그 병이 비어있을 수 있듯이,
우리가 훌륭한 신학적인 지식과 교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실제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고, 교제하는 (생명의) 지식은 전혀 없이
하나님과 동떨어져 있을 수 있습니다.
◑복음은.. 주님과 교제로 우리를 자연스럽게 인도해 갑니다.
▲복음은, 주님을 인격적으로 더욱 알아가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주님에 관한 올바른 지식을 쌓는 일에만 몰두하고 있습니다.
물론 위에서 말씀드린 대로 이 일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인격적으로, 생명이신 주님과 교제하지 못하는 가운데
듣고 배우는 모든 지식은.. 한낱 속 빈 우유병에 불과하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우유(생명)를 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 결과, 오늘날 우리 주위에는 주님에 관한 지식들이
실로 어느 때보다 더 많이 범람하고 있고,
바른 교리와 신학적인 지식을 위한 수많은 성경공부들이 행해지고 있지만,
어느 때보다 우리는 주님을 (인격적으로) 아는 지식이 고갈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수 년 동안 다니고, 여러 가지 직분으로 열심히 봉사하고,
또 성경공부의 이 과정 저 과정을 마쳤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이전에 비해,
조금도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와 있지 않으며,
그 삶에는 어떠한 근본적인 변화도 일어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에는 하나님 나라의 능력, 하나님의 거룩함,
하나님의 평강, 하나님의 기쁨과 같은 하나님의 실체 혹은 실재(reality)들이
거의 경험되고 있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인격적 교제’가 없는 결과인 것입니다.
▲복음을 통한 주님과의 긴밀한 교제는.. 우리 신앙의 모든 면에서 핵심입니다.
매 주일 강단에서 복음이 전파될 때,
즉 그리스도가/그 생명이 전파될 때,
반드시 그 복음은.. 성도로 하여금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교제로 인도합니다.
즉 복음은,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 더 알고 싶고, 주님과 더 개인적/인격적인 친밀한 교제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①주님과의 긴밀한 교제는, 우리의 구원에 있어서 핵심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 망한다고 하셨고(호4:6),
예수님은 “영생은 곧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17:3).
여기서 ‘안다’는 말은.. 남편이 아내를 알아가듯이, 인격적으로 아는 것을 뜻합니다.
복음은 예수님에 관한 몇 가지 지식이 아니라,
복음을 들으면 들을수록,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알아가는 열망이 생기며,
그 복음의 생명이 더욱 풍성히 넘치는 삶을 살게 됩니다.
②주님과의 긴밀한 교제는.. 우리의 성화에 있어서 핵심입니다.
참된 신앙은, 성수주일하고 십일조하고 전도하고 기도하는 것이라거나
혹은 술 담배 안 하고, 욕 안하고 거짓말 안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이러한 것들은 필요합니다만,
그것만 표면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율법주의적 신앙’이 될 수 있습니다.
참된 복음을 받으면, 그 복음의 생명력이 풍성하게 역사함을 통해서,
우리 속 내면에서 성화와 경건에 대한 갈망이 일어납니다.
그런 가운데서 성수주일도 하고, 십일조도 하고, 술 담배도 끊는 것이지,
그런 복음의 속 본질을 건너뛰고
겉으로 성수주일, 술 담배 끊는 것은.. 참된 복음의 왜곡입니다.
여러분, 우리 가운데 누군가가, 성수주일 꼬박꼬박 하면서
십일조 몇 백 만원씩 드린다면.. 모두가 그를 칭송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서도, 참된 복음의 생명의 역사로 인한
내면적 성화의 과정이 그에게 거의 나타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동안 ‘복음의 본질적 생명’에 대해 무관심해 왔고,
겉으로 보이는 ‘성수주일, 교회봉사, 구역예배, 십일조’
이런 것만 편중되게 강조해 왔기 때문입니다.
만약 주중에 매일 ‘예수님과 참된 인격적 교제, 만남, 그 생명을 누림’이 없이
그런 외적 교회 생활에만 이제까지 충실해 왔다면
내가 ‘참된 복음과의 접촉’이 거의 없었다는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참된 영성과 성화와 관련해서 중요한 성경구절 중 하나가 고후3:18절입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이 구절은 성화에 대해서 말하는 구절인데,
-성화는 우리가 주님의 영광을 보는 만큼.. 우리 속에 이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주의 영광을 보매..
-성화는 우리가 주님의 형상으로 변화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또한 성화는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
우리가 성령의 역사로 영광의 주님을 깨닫고, 그분을 신뢰하는 것만큼
우리는 주님의 형상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한 가지 위로는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라는 말입니다.
구약시대에는 모세가 자신의 얼굴을 수건으로 가렸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지만,
오늘날에는 수건을 벗은 것처럼
우리 모두가 (복음으로 인해) 주님의 영광을 볼 수 있도록 허락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다 주님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 영광스러운 주님을 뵙고, 그 분을 닮아 갈 수 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이요 은혜입니까?
③주님과의 긴밀한 교제는 우리의 사역에 있어서 핵심입니다.
다메섹에서 살고 있던 아나니아는.. 사도도 아니었고, 장로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울(바울)을 전도하고, 치유하고, 그를 성령으로 충만케 했습니다.
어떻게 해서 그가 그렇게 귀한 일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까?
한편으로 그것은 매우 간단했습니다.
그는 단지 주님과 긴밀한 교제를 나누는 중에,
주님의 음성을 듣고 그대로 순종했을 따름입니다.
오늘날, 무조건 확장을 외치는 교회는.. 쉴새없이 바쁘지만,
아나니아처럼, 주님과 교제 가운데, 주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들은
조용한 가운데 움직입니다.
그리고 가장 핵심적인 사역에, 쓰임받는 주님의 도구가 됩니다.
주님과의 긴밀한 교제야말로 주님을 위한 사역의 기초이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을 위한 사역보다
주님과의 교제를 우선적으로 구해야 합니다.
이것을 예수님의 삶에서 가장 잘 볼 수 있는데,
예수님은 항상 하나님을 위한 사역보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우선적으로 구하셨습니다.
“예수의 소문이 더욱 퍼지매
허다한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나음을 얻고자 하여 모여 오되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 눅5:15~16
(너무 길어서 후략합니다. 전문 또는 나머지 부분은 ‘출처’를 보세요.) ▣ 복음 관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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