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분류 없음/2010

경건한 삶에 대하여 2485

LNCK 2010. 6. 5. 20:30

◈경건한 삶 Devout Life에 대하여            롬13:8~10         도서 스크랩 (글 하단에 도서소개)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롬13:8~10



▲신자들은, 자기 자신의 특기나, 개인적 생각에 따라.. 각자 경건을 다르게 이해한다.

*금식을 잘 하는 사람은.. 자기 마음에 미움이 가득해도,

자기가 남들보다 금식을 더 잘 하고 있으니.. 자기는 경건하며,

경건이란.. 금식에 결정적으로 좌우된다고 생각한다.


*교회 봉사로 경건의 척도를 가늠하는 사람은,

자기 입술이 입만 벌리면 이웃에 대한 험담과 비방을 쏟아내면서도

자기는 교회 봉사에 열심이니.. 스스로 경건한 크리스천이라고 생각한다.


*새벽기도를 잘 하며, 기도를 경건의 척도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구제를 잘 하며, 구제를 안 하는 사람은 모두 가짜 신자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찬양을 잘 하는 사람은, 찬양이 없는 신자는.. 모두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성경공부, 심지어 전도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모두, 자기가 잘하는 강점과 특징으로 인해,

오히려 바리새적 신앙이 되어서, 자기 경건성이 심하게 왜곡될 수 있다.


이들은, 용서할 줄 모르며, 원한을 오래 품으며,

사람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는, 방탕하게 살 수도 있다.


   자기가 뭘 잘 하는 사람은, 그것 때문에 더욱 겸손해야 한다.

   초신자는.. 뭘 못 해서 넘어지지만,

   오래된 신자는.. 자기가 잘 하는 그것 때문에 교만해서 넘어진다.


그렇다면, 참된 경건이란 과연 어떤 것인가?


▲경건치 못한 사람은, 날개가 있으나 날지 못하는 타조나, 닭에 비유된다.

타조는 날지 못한다.

닭은 겨우 몇 미터밖에 날지 못한다.

그러나 독수리, 매, 비둘기들은, 창공 위로 높이, 그리고 멀리 날아다닌다.


경건한 사람과, 경건치 못한 사람의 결정적 차이는

무엇을/누구를 더 사랑하느냐.. 에 달려있다.


자기가 근본적으로, 하늘의 하나님을 더 사랑하느냐,

땅엣 것을 더 사랑하느냐.. 그 차이에 달려있다.


즉, 금식을 하든지, 작정기도를 하든지, 구제를 잘 하든지, 

그것들은 모두 외적으로 드러난 현상인데,

그 이면적 마음 바탕에, 하나님보다 땅엣 것을 더 사랑하면서

겉으로는 금식/기도/구제/찬양을 얼마든지 열심히 할 수 있다.


어쩌면 자기가 바라는 땅엣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남보다 더 잘 얻기 위해서, 

아니면 교인이나 목사로부터 인정과 칭찬을 받기 위해서

교회봉사/성경공부/전도/헌금생활을 열심히 할 수도 있다.


   이런 신자들을, 적절히 비유할 수 있는 것은.. ‘타조와 닭’이다.

   날개는 있지만, 날지 못하는 경우이다.

   하늘로 높이 날아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나는 척만 하면서, 결국 자기 본심은.. 항상 땅엣 것을 추구하는 삶이다.


그러나 경건한 신자는,

땅엣 것보다, 하늘의 하나님을 더 사랑하기 때문에,

그의 신앙이 바람을 타고, 창공을 나른다.

영원을 바라보고, 천국영생을 생각하며,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에 힘쓰는데...


▲경건한 신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며, 사랑하기 때문에 계명을 지킨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요14:15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요15:10

  

사람들은, 남들이 보는 공공장소에서는.. 비교적 계명을 잘 지킨다.

그러나 남들이 잘 보지 않는 곳에서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기 때문에.. 말(계명)을 잘 듣는다.

서로 뜨겁게 사랑하는 남녀를 생각해 보시라.


   화염과 불이 서로 다르지 않듯이, 계명과 사랑은 서로 다르지 않다.

   ‘사랑’을 영적인 이라고 한다면,

   그 불이 타올라 화염이 될 때.. 그것을 ‘경건’(계명을 지킴)이라고 한다.


   사랑하기 때문에, 경건의 삶을 산다. 즉, 주의 계명을 자원해서 지킨다. 요14:15

   ‘사랑’의 불이 없이, 타오르는 어떤 외적 열정을.. ‘외식’이라고 한다. 억지로 계명을 지킨다.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경건한 척이다. 계명이 자기에게 무거운 짐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늘 주님과 친밀한 교제에 힘쓴다.

그래서 쉬지 말고 기도하며,

매 시간 ‘주님이 이 시간 내가 무엇을 하기 원하시나?’를 여쭈어본다.

하나님의 말씀을 늘 주야로 묵상한다.


▲외적인 경건은.. 스스로 괴롭지만.. 내적인 경건은.. 스스로 행복하다.

여러분이 지금 하고 있는

봉사, 성가대, 성경공부, 구제.. 이것들이 내면적으로 즐거우신가?

물론 고생이 되지만, 내적인 만족감이 있다면.. 참된 경건이 맞다.


종종 선교사들이 오지에서 많은 고생을 하지만,

그 일을 도리어 행복하게 여기는 이유는,

그 고생 속에서 얻는, 내면적 행복감, 만족감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그런 내면적 만족감이 없이

종종 불평, 분노, 원망과 억지로 교회봉사를 하고 있다면,

그것은 참된 경건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그저 ‘외적인 행위’에 불과하다.


   경건(기도, 봉사, 헌신, 희생)의 괴로움이.. 내적 기쁨이 되는 예가 있다.

   백리향 thyme이란 나무의 꽃에는, 아주 쓴 즙이 들어 있는데,

   벌들은 그 쓴 즙을 빨아들여서, 꿀로 만든다.

   벌들에게는,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참된 경건한 신자는,

   기도, 봉사, 헌신, 희생을.. 일면 괴롭지만 오히려 기쁨으로 승화시킨다. 


종종 안 믿는 청년들이,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기를 두려워하는 것은,

경건한 신앙이, 그들의 눈에는 ‘금욕적’으로 비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억지 경건’은 정말 스스로 괴로운 것이지만,   

‘참된 경건’은, 주님을 사랑하는데서 우러나오므로, 정말 스스로 행복한 것이다.

절대 금욕적(율법적 강제에 의한 참음)이 아니다.

 

▲그러므로 계명을 지키는 생활도, 기쁨으로 지킨다.

크리스천은 율법에서 자유하게 되는데,

‘율법을 안 지키는 자유’가 아니라,

‘율법을 자발적으로 지키는 자유’이다.


억지로, 마지못해, 남의 눈을 의식해서 지키는 계명이 아니라,     *계명=율법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서, 기쁨으로 자발적으로 지키는 계명이다.


   예를 들면, 공부를 잘 하는 우등생과,

   공부를 못 하는 꼴찌 학생 중에.. 누가 더 행복하겠는가? 우등생이다.

   우등생이 공부하는 것은.. 자발성과 기쁨의 동기에서 하는 공부이고,

   꼴찌가 공부하는 것은.. 마지못해서, 억지로 책상 앞에 앉아있는 것이다.

   (여기서 ‘공부’는 계명을 지키는 것)


▲경건은 신앙생활의 꽃

불이 있으면.. 활활 불꽃을 피우며 타올라야 하고,

화초는.. 아름다운 꽃을 피워야 하고,

보석이 있으면.. 화려한 광채가 나야 한다.

마찬가지로 신앙인은.. 경건으로 승화/완성되어야 한다.


기독교 신앙을 오래 가졌는데도.. 전혀 경건의 꽃이 피워지지 않으면,

그것은 방향을 잘못 잡고 신앙생활을 해 온 결과이다.

(오늘날 성공하고 물질적 축복받는 것으로 방향을 잡으면.. 결과가 비극적일 수 있다.)


경건의 모양은, 기도, 찬양, 봉사, 전도, 구제 등으로

각자 은사에 따라서 다르게 나타날 수 있지만, (서로 겸손히 존중해야)

그 바탕은 공통적으로 똑같다.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다.

그래서 자발적으로 경건성이 나타난다.


   경건한 사람은,

   그가 속한 가정, 직장, 공동체를 더욱 아름답게 만들어준다.

   이웃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롬13:8~10


   그러나 거짓된 경건(외식)의 사람은,

   그가 속한 가정, 직장, 공동체를 더욱 힘들게 만든다.

   외식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이웃에게 부담을 준다.


▲마치는 말

오늘날 경건은, 지나칠 정도로 무리한 조건을 요구하고,

일련의 신앙적 의무를 더하는 것이라고..,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지만,

윗글은, 우리 시대에 놓인 그 혼란한 주요 쟁점(경건)을, 명확히 밝혀주고 있다.


오늘날 기독교 신앙이 ‘교회(성장)론’에 일방적으로 치우쳐서

교회성장에 도움이 되는 모든 교훈들만 기형적으로 강조되고 있다.


그 결과, 기독교 신앙의 본질적인 것들(위에서 말한 경건 등)이 외면되고 있고,

설령 그것이 강조된다 하더라도,

외형적으로만 강조되어.. 사람들이 그것을 도리어 무거운 짐으로 여기고 있다.


그러나 윗글은,

경건하게 사는 삶이 더 쉽고/ 좋고/ 행복한 길이며,

경건치 못한 삶이 오히려 더 어렵고/ 불행한 길임을 가르친다.


무엇보다 기독교 신앙이.. 마음으로 믿고.. 아무 것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그래서 닭처럼 땅바닥을 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높이 창공을 날아올라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 각자의 신앙이, 경건이라는 화려한 꽃/화염/광채로 드러나야 함을 가르친다.


   오늘 나는, 신앙생활이 기쁘고 즐거운가? ... 경건한 사람

   아니면 사람 눈을 의식하며 억지로 하는가? ... 외식하는 사람


▲출처

「리처드 포스터가 묵상한 신앙고전 52선」Devotional Classics 두란노출판사

 pp.52~61에 나오는 프랜시스 드 살레/ Introduction to the Devout Life 책을 리처드 포스트가 요약한 글.

위 내용을 읽고, 편집자가 풀어서 다시 축약, 정리했음


※리처드 포스터 목사님이 대단한 작업을 하신 책입니다. 신앙고전 52선」

신앙고전을 52편을 택해서, 탁월하게 요약을 했고, 번역도 잘 된 것 같습니다.

정통 기독교의 핵심적 강조점을 다루고 있고,

오늘날 기독교가, 전통 기독교의 핵심적 가르침과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잘 가르쳐 주는 책입니다.

 

 

♱프랜시스 드 살레  Francis de Sales 1567~1622   


프랜시스 드 살레는 살레 성의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아시시의 프랜시스와 구분, 이 분은 살레 성의 프랜시스)

파리에 있는 예수회에 속한 학교에 다녔다.

 

그는 예수회에서 고전과 히브리어, 헬라어, 훈련의 생활을 배웠다.

또한 법학과 인문학에 대해서도 가르침을 받았다.

그는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1591년에 사제로 임명을 받았다.

그리고 1602년에는 제네바의 감독이 되었다.


프랜시스는 왕성한 저작 활동을 하였는데,

그의 작품들은 교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영적인 깊이와 윤리적인 관심을 결합시켰다.

그것은 그의 전후에 살았던 어누 누구도 거의 할 수 없었던 일이다.


그는 비유의 대가였다.

영적 생활의 신비를 벌과 꿀, 타조와 닭 등

단순하고 일상적인 형상으로 곧장 설명하였다.

프랜시스는 그의 막대한 영향력으로 인하여

서방교회의 박사들 중의 한 사람으로 간주되고 있다.                                                                            영적성장  

'분류 없음 > 2010'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난 중에 침묵하기 / 정원  (0) 2010.06.08
엄마가 휴가 오신다면!  (0) 2010.06.07
(조각글 모음) 아름다운 인생   (0) 2010.06.02
아름다운, 속히 2479  (0) 2010.06.02
하나님의 임재와 예배  (0) 2010.05.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