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의 진짜 영광은? 엡3:13 스크랩 글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치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 엡3:13
※‘이는 나의 영광이니라’ .. 라고 했으면, 이해가 되는데,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 라고 하니까, 해석이 쉽게 안 됩니다. 그런데 아래 글은, 해석을 해 주고 있습니다./주
▶바울이 에베소 교인들에게 너무나 이상한(?) 당부를 했습니다.
본서는 그가 로마에 일차 투옥 되었을 때에 쓴 서신입니다.
말하자면 자신이 지금 감옥에 갇혀 있는 것에 대해, 낙심하지 말라고 권한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전혀 이상하지 않고, 너무나 정상적인 부탁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이 문제입니다. 자기가 당한 환난이 그들의 영광이라고 했습니다.
신자가 당할 환난을, 사역자가 대신 혹은 대표로 겪으니까
자기들은 평안히 지낼 수 있다는 뜻입니까?
그런 훌륭한 목자를 두어 다행이라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환난을 허락하셨기에
낙심할 문제가 아니라는 정도로 그치지 않고, 오히려 신자들의 영광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반드시 그 낙심하는 내용과 견주어
상반되는 의미를 따져 보아야할 것입니다.
신자들이 바울의 투옥에 대해 왜 낙심했겠습니까? 아주 간단합니다.
“아니 정말 모든 것 희생하며 열심히 충성한 종을
하나님이 저렇게 심한 고생을 시킬 수 있는 것인가?
안락과 형통은 주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환난은 막아주셔야 하지 않는가?
주의 큰일을 하려면 꼭 연단과 환난을 거쳐야만 하는가?
바울을 보니까 섣불리 주의 일을 해서도 안 되겠네.”
바울은 우선 그 생각이 틀렸으니 버리라고 합니다.
물론 어지간한 믿음만 있어도, 그런 의아심과 불만은 비성경적이라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연약하고 불완전한 인간적 본성에 따라 자연스레 생기는 감정의 흐름입니다.
▶이와는 다르게 사도의 환난이, 신자들의 영광이 된다는 점까지 깨달아야만
온전한 믿음이 된다고 권면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본문은, 바울 사도가 여러 환난을 당했고
지금도 매여 있는 것을 기뻐하라는 뜻입니다.
최소한 그의 환난으로 인해 자신들에게 유익이 생긴다는,
혹은 자신들의 유익 때문에, 그가 환난당하고 있다는 인식은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의 경륜을 너희가 들었을 터이라.
이것을 읽으면 그리스도의 비밀을 내가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게 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후사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예하는 자가 됨이라.” 엡3:2-6
본문의 바로 앞에 나오는 내용인데,
한 마디로 에베소 이방인들이,
바울을 통해
올바른 복음을 깨달아 구원을 얻게 된 것이 유익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안에서 함께 후사와 지체가 되어 약속에 참예하는 자가 되었으니
얼마나 큰 영광이냐는 뜻입니다.
역으로 말해.. 바울은, 그들로 하나님의 후사로 만들어 주는 바람에
여러 환난을 겪었고, 지금도 로마 감옥에 갇혀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로서 반드시 해야 할 바를 충성되게 수행했기에
마땅히 받아야 할 고난이라는 것입니다.
만약 다른 복음을 전하거나, 아예 전하지 않았다면
당하지 않았을 환난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은 예수의 약속에 이미 참예한 자이기에, 어떤 환난을 겪어도 상관없지만
자기가 가르친 교인들이 낙심을 버리고, 온전한 복음 안에 서있기만 하면
예수로 인해 반드시 영광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그럼 바울의 당부가, 오늘날 진짜 이상하다고 여겨질 까닭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날 많은 목회자들이 어떻게 가르치고 있습니까?
목회자를 잘 대접하여야.. 성도가 복을 받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목회자가 잘 되어야.. 그게 성도의 영광이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바울이 이 서신의 말미에
구체적으로 에베소 교인들에게 재차 당부한 내용을 보십시오.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엡6:19~20
그는 지금 이렇게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내가 현재 쇠사슬에 매여 있더라도 전혀 낙심치 말고
복음의 비밀을 단 한 치의 굴절과 손상 없이 담대하게 전할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
그러면 그것이 너희의 영광이 되리라.”
바울이 너무 이상한 당부를 하고 있다는 뜻은
오늘날의 목회자 가운데, 이렇게 담대하게 선포하는 분을 거의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단적으로 말하면..
신자들더러 목회자가 복음만 올바르게 전하다가,
감옥에 갈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고 요구하는 셈입니다.
그런 기도가 이상한 것이 아니고, 오리려 영광스럽게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역으로 말해, 그런 목회자와 신자들을 찾기 힘들기에 낙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작금의 기독교가 약해진 원인이 바로 이것 아니겠습니까? *작금 昨今 : 어제 작, 지금 금, 어제와 오늘
신자가 영광스럽게 여길 바울같은 목회자를 찾기가 너무 힘드니까
세상에 비쳐질 그리스도의 영광도 점점 줄고 있기 때문 아닙니까?
2/22/2010 박신 목사님 글 스크랩 nosuchjesus.com
◑삼손 같은 괴력을 발휘하고 있는가? 삿16:6~9 스크랩 글, 출처 하단
▶삼손의 괴력에 여러 번 괴롭힘을 당한 블레셋 족속은, 그를 제거하려 혈안이 되었습니다.
삼손이 사랑하는 들릴라에게 상당한 보상을 약속하며, 그 힘의 근거를 알아보라고 했습니다.
돈에 눈이 멀어진 들릴라는, 삼손에게 큰 힘의 비결을 이야기해달라고 보챘습니다.
“들릴라가 삼손에게 말하되 청컨대 당신의 큰 힘이 무엇으로 말미암아 있으며
어떻게 하면 능히 당신을 결박하여 곤고케 할 수 있을는지 내게 말하라.”(삿16:6)
(중략)
삼손이 들릴라에게서 받았던 채근을,
오늘날 우리가 세상 사람에게서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도 삼손 같은 괴력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육체적 괴력이 아닙니다. 세상을 이겨내는 영적인 괴력입니다.
그래서 주위 불신자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아야 합니다.
“아니 지금 같은 극심한 불경기에, 어떻게 그리 힘들지 않게 살 수 있느냐?
내가 보기엔 당신만큼 형편이 딱한 자도 없는 것 같은데
대체 평안과 기쁨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이 뭐야?”
“당신은, 아무리 어려운 일이 생겨도 도무지 힘을 잃는 법이 없으니 신기해.
당신을 낙망시킬 수 있는 것은, 세상에 단 하나도 없는 것 같아.”
우리가 어떻게 이럴 수 있습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는 보배가 우리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우리와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만나도 동행해 주시니까
영적 괴력이 우리 속에서 결코 마르는 법이 없이, 샘솟듯이 솟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에게 나타난 ‘삼손과 같은 괴력’을 보십시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고전4:6-9)
▶삼손이, 우리 눈에는 천하의 망나니요 난봉꾼 같습니다.
또 마지막에는 여자에게 속아서, 사실은 알고도 정에 약해져서 일생일대의 실수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서 꼭 배울 것은 하나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부족한 것입니다.
그는 그래도 마지막까지 자기 머리에, 스스로 삭도를 대는 일은 결코 하지 않았습니다.
검은 머리카락을 자랑으로 여겼습니다.
자기 괴력이 어디서 오는지 확실히 알기에,
절대로 그 근거가 훼방 받는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나아가 하나님이 자기를, 블레셋에서 자기 민족을 보호하는 자로 세우셨다는 사실도
절대 잊지 않았고 기회만 닿으면 그 일에 충성했습니다.
바꿔 말해 자기 속에 보배이신 예수님이 계시고
능력의 지극히 큰 것이 그분께로 온다는 사실만은, 죽어도 잊지 않았던 것입니다.
또 그 사실을 최고 자랑으로 여긴 것입니다.
결코 예수님을 스스로 불신 혹은 의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겉으로는 도무지 신실한 것 같지 않은 신자인데도
어떤 군급한 일을 당해도 주님이 주시는 힘에 모자라는 법은 없었던 것입니다.
▶내 질그릇 속에 예수님의 괴력을 소유한, 우리가 삼손임을 확신하십니까?
우리가 힘이 빠져도, 내 속에 계신 주님은 결코 그렇지 않음을 믿습니까?
우리에게 그런 은혜와 믿음을 주신 까닭이
미혹한 영들을 주께로 인도하라는 뜻인 줄 절감하고, 그렇게 실천하십니까?
요컨대 주위 사람들이
도대체 지금 같이 어려운 때에도
당신이 평강과 기쁨을 유지하는 비결이
궁금하다는 질문을 계속 받고 있습니까?
‘그 형편에 도리어 남을 도울 수 있다니.. 도무지 이해가 안 돼!’ 라는 반응을 접합니까?
삼손이 블레셋 사람들에게서
“그 힘의 근본은 여전히 알지 못하니라”(9절)는 반응을 얻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03/04/2010 박신 목회자님 글 스크랩 nosuchjesu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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